주간동아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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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30% 법칙’

그래도 아직은 착한 사람이 있는 세상입니다

  • | 지식큐레이터 imtyio@gmail.com

    입력2018-05-2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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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구한 고릴라의 모습(왼쪽). 5월 12일 제2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던 사고 차량의 블랙박스에 찍힌 ‘투스카니 의인’ 한영탁 씨. [shutterstock, 유튜브 캡처]

    아이를 구한 고릴라의 모습(왼쪽). 5월 12일 제2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던 사고 차량의 블랙박스에 찍힌 ‘투스카니 의인’ 한영탁 씨. [shutterstock, 유튜브 캡처]

    1996년 8월 16일 미국 시카고 브룩필드동물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족과 함께 동물원을 찾은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5.4m 깊이의 우리로 떨어졌다. 가족은 물론이고 구경꾼도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우리 저쪽에서 고릴라 한 마리가 다가왔다. 모두 긴장했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암컷 고릴라가 재빨리 그 아이를 들어 올려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고릴라는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등을 두드리다 동물원 직원에게 데려다줬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고릴라 이름(Binti Jua)을 입력하면 이 놀라운 동영상을 볼 수 있다. 

    해마다 5월이면 문득 이 동영상이 생각나 돌려 본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핏빛 낭자한 학살 등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인간의 추악한 이기적인 모습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흔히 가장 못된 인간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장본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심(人心)은 정말 수심(獸心)보다 나은가. 

    인간의 이기적인 선택을 보여주는 경제학 게임 가운데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이 게임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여기 A, B 두 용의자가 있다. 경찰은 두 용의자에게 금고털이를 자백 받고자 각각 다른 방에 가둔 뒤 묻는다. “은행 금고를 턴 게 당신 둘이지?” 범죄 사실을 자백하면 형량을 줄여주겠노라 당근도 제시한다. 

    두 용의자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은 서로를 믿고 범죄 사실을 숨김으로써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은 웬만해서는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데다, 상대가 자백해 자신만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한다. 그러니 이 가정대로라면 결국 둘 다 자백할 개연성이 크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가 지배하는 세상?

    1950년 세상에 등장한 죄수의 딜레마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이기적인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통찰로 여겨졌다. 세상을 결딴낼 핵무기를 서로에게 겨누며 냉전을 벌이던 미국과 옛 소련 등 냉엄한 국제 정치에서부터 이기주의자가 이타주의자를 구석으로 모는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까지 죄수의 딜레마로 설명할 수 있을 듯했다. 

    정말로 죄수의 딜레마는 세상을 설명하는 절대 법칙일까. 심리학자 리 로스는 죄수의 딜레마를 살짝 비틀어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그는 두 집단으로 나눈 뒤 한 집단에게는 ‘공동체 게임(community game)’을 할 것이라고, 다른 집단에게는 ‘월스트리트 게임(Wall Street game)’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냥 이렇게 말만 했을 뿐이다. 

    애초 그다지 다를 게 없던 평범한 두 집단의 반응은 극적으로 갈렸다. 공동체 게임을 한다고 들은 사람의 약 70%는 상대방을 믿고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30%는 달랐다). 반면 월스트리트 게임을 한다고 들은 사람은 33%가량만 협력했다. ‘이타주의’를 상징하는 ‘공동체’ 혹은 ‘이기주의’를 상징하는 ‘월스트리트’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행동이 바뀐 셈이다. 

    경제학자 아이리스 보넷과 브루노 프레이의 실험도 흥미롭다. 이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학생을 모집해 두 그룹으로 나눴다. 그리고 A그룹 학생들에게 각각 10달러씩을 준 다음 자신이 원하는 만큼 가져가고 나머지 돈은 B그룹 누군가의 봉투에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A그룹 학생이 10달러를 모두 가져간다 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A그룹 학생 가운데 B그룹 학생에게 한 푼도 주지 않은 학생은 28%에 그쳤다. 그러니까 3분의 2 넘는 학생이 타인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걱정이 전혀 없는 데도 10달러를 모조리 가져가는 이기적인 행태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면 어떨까.

    착한 30% 대 나쁜 30%, 승자는?

    보넷과 프레이는 두 그룹 학생이 서로 얼굴만 한 번씩 보게 했다. 이 경우에도 두 그룹의 학생은 다시 만날 일이 없고, 역시 누가 어떤 봉투를 줬는지 또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한 푼도 주지 않은 A그룹 학생의 비율은 28%에서 11%로 떨어졌고, B그룹 학생에게 주는 평균 금액도 늘었다. 

    이어지는 실험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번에는 아예 A그룹 학생들에게 B그룹 학생들의 전공, 취미 같은 개인정보를 알려줬다. 그러자 놀랍게도 B그룹 학생이 받은 평균 금액은 10달러의 절반인 5달러로 늘었다. 한 푼도 주지 않은 A그룹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타인과 얼굴을 마주하거나 간단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협력 정도가 커진 것이다. 

    이런 심리 실험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애초 ‘신뢰’가 중요하다는 신호만이라도 주면(커뮤니티 게임), 혹은 자신의 평판을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대부분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심지어 딱 한 번 얼굴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가 생긴다. 설령 그것이 자발적이지 않다 해도 알게 뭔가. 어차피 사람 속은 알 도리가 없는데. 

    개인적으로 마음에 와 닿은 대목은 바로 ‘착한 30%’와 ‘나쁜 30%’이다. 인정사정없는 월스트리트 게임을 한다는 신호에도 33%는 여전히 협력을 선택했다(착한 30%). 반면 신뢰를 강조하면서 공동체 게임을 한다고 말해도 30%는 자기만 챙겼다. 또 10달러를 모조리 가져가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 상황에서 얌체처럼 그 돈을 모조리 챙긴 28%가 있었다(나쁜 30%). 

    여기서부터는 아니면 말고 식의 가설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든 타인을 배려할 준비가 된 30%와 그런 마음 따위는 없는 30%, 그리고 그 양극단 사이 40%로 구성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애초 남을 도울 마음이 전혀 없는 30%마저도 평판이 나빠질 위험이 생기면 기꺼이 타인을 배려하는 척이라도 한다. 이것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비밀이다. 

    이제 고릴라 아닌 사람 이야기로 끝내자. 5월 12일 제2서해안고속도로에서 있었던 일이다. 의식 잃은 운전자의 차량이 중앙분리대에 충돌하고도 계속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한영탁(46) 씨는 자신의 자동차로 막아서며 추가 사고를 막았다. 질주하는 자동차를 막아설 때 한씨가 무슨 계산 따위를 했을 리 없다. 그도 30%의 착한 이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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