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승리한 마하티르 모하메드 총리가 지지자들과 함게 환호하고 있다. [AP=뉴시스]
5월 총선 패배로 정계은퇴는 물론 구속 위기까지 몰린 나집 전 총리는 2009년부터 10년 동안 말레이시아를 이끌었다. 아버지는 2대 총리이자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툰 압둘 라작으로 아시아의 대표적 ‘금수저 정치인’으로 손색없는 인물이다.
그의 ‘포퓰리즘 정책’은 1980~90년대 마하티르 빈 모하맛 전 총리가 보여준 ‘세계 수준의 말레이시아 건설, 2020년 선진국 진입’이라는 비전과 패기를 희생한 대가라는 평가다. 5월 9일 치른 총선에서 61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태풍’이 돼 돌아왔다. 나집 전 총리가 이끌던 바리산 나시오날(국민전선)은 하원의석 222석 중 79석(35.6%)밖에 건지지 못한 반면, 야권연합인 희망연대(PH)는 121석(54.5%)을 확보해 첫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957년 집권한 국민전선의 61년간 집권 기록은 멕시코 제도혁명당의 71년간 집권에 이은 세계 2위 기록이다. 놀랍게도 그 신화를 무너뜨린 주역은 올해 92세의 노정객 마하티르였다.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말레이시아를 이끌었던 ‘올드보이’가 말레이시아 정치판에 다시 호출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마하티르 자신도 그 문제를 만든 원인으로 꼽힌다.
노정객, 전후체제 해체 주역으로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왼쪽)와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 [AP=뉴시스]
말레이시아 정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가 최근 야당 주도의 대중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며 “나집 총리가 지나치게 부패했고 친중(親中) 정책을 편다”며 퇴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세계적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나집은 마하티르가 낙점한 인물이다. 2003년 은퇴하며 고른 후계자 압둘라 바다위 총리가 극우보수파의 견제에 지리멸렬한 행보를 보이자 “그렇다면 주류가 직접 한번 해보라”며 덥석 금수저 총리의 등극을 눈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집 전 총리는 집권한 지 2년 만에 사상 최대 부패 혐의로 국민의 원성을 사게 된다. 2009년 설립한 국영투자기업 1MDB를 통해 최대 60억 달러(약 6조4000억 원)의 국비를 해외로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나집 전 총리의 부인 로스마 만소르 여사가 다이아몬드와 에르메스 백을 대거 사들이는 사치행각을 벌이는 데 이 비자금이 쓰였을 것이란 보도도 공분을 샀다. 그러나 ‘후진적 정치’의 세계적 공통점은 ‘여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불법과 탈법을 넘나드는 여당의 선거 장난이 10년 가까이 이어지자 희망연대가 선거 직전 여권의 옛 간판스타였던 마하티르를 영입해 정권교체를 위한 마지막 1%를 채운 것이다.
이는 1997년 한국 DJP(김대중-김종필)연대의 말레이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DJ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안와르 이브라힘(70) 전 부총리다. 5월 10일 승리를 확정한 마하티르 총리의 취임 일성이 “5월 15일 안와르 석방”일 정도로 현재 안와르는 말레이시아 정치의 가장 뜨거운 감자다.
국제뉴스에 눈이 밝은 독자라면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안와르가 마하티르에 의해 축출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부총리였던 그는 누구나 마하티르 후계자로 알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정치 엘리트’에 진입하려면 말레이계 출신의 독실한 이슬람 신도이자, 뼛속까지 연립여당을 지지하는 집안 출신이어야 한다. 안와르는 이런 조건에 가장 부합하고 서구세계와 합리적으로 대화가 가능하면서도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마하티르보다 22세가 적으니 세대교체 대상으로도 적격이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가 이 같은 흐름에 제동을 걸고 만다.
집권 20년 차인 2000년 무렵 정계은퇴가 확실시되던 마하티르 총리는 안와르를 뜻밖에도 ‘동성애 혐의’로 전격 구속한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불명확하지만 당시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고립’(마하티르)과 ‘개방’(안와르) 전략을 둘러싼 대립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동성애’라는 낙인 역시 존경받는 이슬람 교육자 출신 정치인이던 안와르의 배경을 고려하면 치졸한 정치공작에 가까웠다.
그렇게 만년 여당에서 축출된 안와르는 2000년대 줄곧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며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노려왔다. 국내에는 보도가 덜 됐지만 2008년과 2013년 선거에서는 거의 집권 직전까지 갔다. 여당의 지독한 포퓰리즘과 ‘게리맨더링’을 불사하는 복잡한 선거방식으로 번번이 무산됐을 뿐이다. 나집 정권은 그에게 정치적 족쇄를 채우려 2015년 다시 동성애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했다. 당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은 안와르는 2년여 형량을 남겨두고 5월 16일 술탄 무하마드 5세 말레이시아 국왕의 전격 사면을 통해 극적으로 풀려났다. 총선 승리 후 1주일만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포퓰리즘’은 무엇일까. 말레이시아 전후의 핵심 의제는 말레이계에 의한 근대적 국가 건설이었다. 독립 초기 다민족 연방제 국가를 만들고 보니 인구의 40%에 달하는 막강한 화교 세력이 걸림돌이 됐다. 경제적 부의 80% 이상이 화인(華人) 차지였기 때문. 그러다 인종 간 폭력사태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꺼냈다. 화교 인구가 절대다수인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해 화교 비중을 20%대로 낮추고, 말레이계에 경제 특권을 몰아주는 ‘부미푸트라 정책(토착민 우대 정치)’을 택한 것이다.
안와르에게 권력이양 언제?
5월 16일 말레이시아 국왕의 사면으로 전격 석방된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가 환하게 웃고 있다. [AP=뉴시스]
이 같은 전근대적 정책은 1990년대 무렵 폐지가 공론화됐지만 그 어떤 정치인도 표가 무서워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야당연합의 집권으로 말레이시아도 전후체제가 사실상 붕괴하고 역사적 전환점에 서게 된 것이다.
정권교체의 또 다른 원인으로 부패한 나집 전 총리를 앞세운 외세(外勢) 중국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꼽힌다. 남중국해 문제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친(親)중국화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부정부패에 물들어 있던 나집 전 총리야말로 그런 중국의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 마하티르 총리는 선거 직전 해외 언론과 인터뷰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투자방식을 환영하지 않는다”며 명확한 선을 그었다. 또 적폐청산을 위해 5월 12일 나집 전 총리의 출국도 금지했다.
현재 말레이시아 안팎의 관심은 92세 마하티르가 70세 안와르에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넘겨줄지에 쏠려 있다. 정권교체의 실제 주인공이 안와르이기 때문. 1월 마하티르는 정권교체에 성공하면 수감 중인 안와르 전 부총리를 석방하고 총리 자리를 넘기겠다는 약속을 한 후 총선거에 출마했다. 또 5월 15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선 “(정권이양시기가) 1년이 될지, 조금 더 걸릴지는 그(안와르)에게 달려있으며, 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석방된 안와르가 총리 자격을 갖추려면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하거나, 상원의원으로 선출돼야 한다. 총리직 이양까지 시간적, 정치적 변수가 많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제 극적인 정권이양이 이뤄진다면 마하티르 총리는 ‘국부’ 수준을 뛰어넘어 아시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상징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물론 나이와 관계없이 절대 쉽지 않은 과제인 것도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