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 갑사 삼신불괘불탱(국보 제298호). 왼쪽부터 화신불인 석가불, 법신불인 비로자나불, 보신불인 노사나불로 이뤄진 삼신불을 그린 12.57m 높이의 조선시대 대형괘불이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대웅전의 본존불은 역사상 실재했던 석가모니 부처다. 대적광전, 화엄전(華嚴殿), 비로전(毘盧殿)의 본존불은 비로자나부처다.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의 본존불은 아미타부처다. 그뿐 아니다.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 미륵부처를 모신 미륵전,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보현보살을 모신 보현전…. 부처의 제자인 아라한과 보살을 포함해 3000불이니, 1만3000불이니 하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부처 손바닥 안을 벗어나지 못한 손오공도 아니고, 부처는 왜 이렇게 증식하게 된 걸까. 노자는 일찍이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무한이 나온다”는 말을 남겼다. 무한으로 확대되기 전 반드시 이분법의 숫자인 2를 거쳐 완전수인 3에 도달해야 함을 일깨운 아포리즘의 정수다.
물론 그 시작이 된 하나는 2562년 전 인도 부다가야에서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다. 석가모니 사후 기원전 1세기 전후로 대승불교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먼저 비로자나부처가 등장한다. 초기 대승불교 3대 경전으로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이 꼽히는데 비로자나부처는 법화경에서 처음 언급된다. 일시적으로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그 원형이 되는 부처가 존재했다며 이를 비로자나부처라고 부른 것이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범어) 바이로차나를 음역한 한자어다. 바이로차나는 ‘골고루 비추는 빛’을 뜻한다. 비로자나불이 태양이나 달에 비견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를 의역한 한자어가 ‘위대한 빛(태양)의 여래’라는 뜻을 가진 대일여래(大日如來)다.
흥미롭게도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닮았다. 성불한 사람을 부처라고 부를 때 석가모니 이전과 이후에도 성불한 사람은 여럿일 텐데 그 원형(이데아)이 되는 최초의 성불자이자 이탈리아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부동의 일자’로서 비로자나불의 개념이 제기된 것이다.
이 개념을 발전시켜 완성한 경전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은 영원무구한 보편적 진리 자체를 형상화한 부처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비로자나불의 현현이 아닌 게 없다. 그럼 비로자나와 석가모니는 어떻게 구별될까.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의 개념이 여기서 등장한다. 비로자나가 부처 깨달음의 본체를 뜻하는 법신이라면, 석가모니는 그걸 감각적으로 형상화해준 색신이다. 비로자나가 무형·무색·무취의 공(空)이라면, 석가모니는 유형·유색·유취의 색(色)인 셈이다. 또한 석가모니를 비로자나의 화신(化身) 또는 중생의 요청에 응해 인간으로 태어난 응신(應身)으로 설명한다.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 해인사의 목조비로자나불 좌상, 동해 삼화사의 철조노사나불 좌상(왼쪽부터). [동아DB, 문화재청]
하지만 아직 무한으로 비약하려면 3이란 숫자가 필요하다. 불교가 탄생한 인도의 고유 종교인 힌두교의 최고신은 브라만, 비슈누, 시바 등 3신으로 이뤄져 있었다. 힌두교의 3신 신앙은 기원전 2세기 무렵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 대승불교 형성기와 겹친다. 그래서인지 대승불교 이론가들은 제3의 부처를 찾아 나선 끝에 보신(報身)이란 개념의 창안에 이르게 된다.
보신이란 법신과 화신을 중재하는 존재다. 이는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의 비유를 빌리면 이해하기 쉽다. 월인천강지곡은 ‘부처가 백억세계(百億世界)에 화신(化身)하시어 교화(敎化)하심이 달이 일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를 노래한다. 여기서 하늘에 뜬 달이 법신으로서 비로자나불이고 강에 비친 달의 형상이 화신으로서 석가모니라면, 그 형상화를 중재하는 달빛이 보신으로서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한다.
노사나불은 범어 로차나를 음역한 것인데 문제는 이게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바이로차나에서 ‘바이’를 제거한 단어와 철자가 같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노사나불=비로자나불’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화엄경에서 불법을 설파하는 주체로 노사나불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화엄경을 노사나경으로 부르는 이유다. 이 경우 ‘노사나불=비로자나불’ 설정은 모순에 직면한다. 비로자나불은 거대한 침묵에 잠긴 존재라 설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사나불은 그런 비로자나불을 대신해 그 가르침을 설파하는 존재다.
석가불은 생전에 비로자나불에 대해 말한 바 없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을 대신해 그 가르침을 설파할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제3의 부처로서 노사나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대적광전의 본존불이 비로자나불일 때 그 좌우 협시불상이 석가불과 노사나불이다. 이는 대웅전의 본존불이 석가불일 때 보통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 협시불상으로 등장하는 것의 변형이다. 흥미롭게도 노사나불은 이렇게 협시불로만 등장할 뿐 본존불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유가 뭘까. 노사나불은 후대의 무수한 부처로 도약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필요한 일종의 징검다리 부처였기 때문이다. 일단 3신불(三身佛) 개념이 완성된 이후 3번째 부처 자리를 다시 방위 개념과 결부돼 등장한 아미타불이 차지하게 된다.
석가불이 동방의 부처라면 아미타불은 불교적 이상국을 상징하는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부처다. 아미타는 범어로 아미타하(무한한 빛) 또는 아미타유(무한한 수명)를 음차한 단어라 무량광(無量光) 또는 무량수(無量壽)를 특징으로 한다. 무량수전은 이를 딴 전각명이고 극락전은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정토를 극락으로 설정한 정토종의 전통에서 나왔다.
불교의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의 3신불 개념은 기독교의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삼위일체(trinity)를 연상케 한다. 삼위일체 역시 예수나 바울이 언급한 것이 아니라 4세기 무렵 후대 교부들에 의해 확립된 이론이다. 이렇게 숫자 3은 도교, 힌두교, 불교, 기독교를 관통하는 신비한 마력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