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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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저고리시스터, 김시스터즈, 블루리본… 한국 걸그룹의 선구자들

최규성의 ‘걸그룹의 조상들’

  •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8-05-2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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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인조 걸그룹 하면 대부분 트와이스, 그 이전은 소녀시대를 떠올리겠지만 아이돌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한참 전 이미 9인조 걸그룹이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노래하고 춤추는 걸 넘어 직접 악기까지 연주한 걸밴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90년대? 물론 아니다. 80년대도, 70년대도 아닌 60년대 초반 그런 밴드가 있었다. 신중현의 아내 고(故) 명정강 씨가 드럼을 쳤던 ‘블루리본’이 그 시초였다. 비록 앨범은 남기지 않았지만 주한미군 8군 무대를 중심으로 2년간 활동했다. 

    명씨는 당시 블루리본의 활동을 이렇게 회상했다. “밴드 구성은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이 둘씩, 플루트 하나, 피아노와 기타, 콘트라베이스와 드럼까지 모두 9인조였고, 다들 서울 명문여대의 음대생이었다. 무대에 오를 때는 고전무용수 한 명까지 모두 열 명이었다.” “장교들은 파트너와 우아하게 식사를 하며 댄스를 즐기곤 했다. 그래서 춤곡부터 연주한 뒤에 쇼를 공연했다. 앙코르는 클럽마다 달랐다. 일반 클럽(사병 클럽)은 록을 비롯한 신나는 곡이어야 했고, 중사 클럽(부사관 클럽)은 컨트리 쪽이었다. 계급에 따라 취향이나 쇼를 즐기고 돈을 쓰는 것에도 크게 차이가 났다.” 

    이 증언을 읽으면 그때의 풍경이 그려진다.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기 시작할 무렵, 미군 장교와 병사들 앞에서 스윙과 록, 컨트리를 연주하는 20대 초반 한국 여성들의 모습이. 어지간한 국내 기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입을 보장받았고, 또한 내국인이 즐길 수 있는 무대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으니 그들의 자부심은 요즘 인기 정상 걸그룹의 그것에 충분히 비견할 수 있으리라. 


    1939년 조선악극단 저고리시스터. 김시스터즈. 9인조 스윙재즈 걸밴드 블루리본(왼쪽 부터).

    1939년 조선악극단 저고리시스터. 김시스터즈. 9인조 스윙재즈 걸밴드 블루리본(왼쪽 부터).

    음악 사료 컬렉터인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의 ‘걸그룹의 조상들’은 20세기 등장했던 한국 걸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망라한 책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등장했다 사라진, 여성들로만 구성된 팀을 집대성했다. 공식적으로 음반이 남아 있는 이들은 물론이요, 잡지 사진자료나 심지어 밤업소 전단에만 기록이 남아 있는 이들까지 포함했다. 말하자면 1등성은 물론이거니와, 육안으로는 관찰되지 않는 5등성까지 은하계 모든 별이 담긴 천문도를 연상케 한다. 

    트와이스, 레드벨벳에 비하면 여기 나오는 이름들은 다양한 조상이 등장하는 족보에 가깝다. 이 족보의 최고점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식 기록상 한국 최초 걸그룹이라 봐야 할 ‘저고리시스터’가 그들이다. 조선악극단 소속으로 1935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들은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며 순회공연을 했다. 저고리시스터는 이름 그대로 저고리를 입고 서양식 악극을 불렀다고 한다. 비록 음반은 남기지 않았으나 ‘동아일보’에 공연 광고를 실었을 정도니 그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그룹의 핵심 멤버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과 음반사를 만들었으며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는 자신의 두 딸과 조카를 데리고 건국 이후 최초 걸그룹 ‘김시스터즈’를 결성했다. 김시스터즈는 주한미군 사이에서 인기를 타고 1959년 미국 본토까지 진출했다. 근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토크쇼 ‘에드 설리번 쇼’에 게스트로 나갈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약 10년 전 파리에서 열렸던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그룹의 합동 콘서트 이후 세계인이 모두 케이팝(K-pop)을 부르기 시작한 지금의 흥분과 달랐을까. 온고지신이라더니, ‘걸그룹의 조상들’을 통해 역사의 순환을 느낀다. 남성들에게 밀려 조연에 머물러야 했던 여성들이 걸어왔던, 별이 빛나는 길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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