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각종 공연들에 대한 기업의 단체구매가 크게 늘고 있다.
H기업 Y홍보팀장은 “접대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아직까지 문화접대에 익숙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접대실명제 실시 이후 상대방에게 부담이 덜 되는 문화접대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며 “접대효과가 바로 나타나 놀라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KTB네트워크 경영지원본부 권오용 상무는 “술이나 골프, 고급음식을 접대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공연티켓을 구매해 가족과 함께 관람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접대받는 이가 가족과 함께 간단한 식사와 공연을 즐기게 하는 것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접대로의 전환은 단순히 접대 규제를 비켜가기 위한 일시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부터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예술의 전당의 경우 지난해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리골레토’ ‘돈조반니’ 등 오페라 공연에서 기업의 단체 구매가 25% 이상 차지할 만큼 기업 고객의 비중이 늘어났다. 2002년의 경우 오페라 공연에서 기업의 구매 비율이 5% 미만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세다.
실례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발레 ‘백조의 호수’(5월)와 뮤지컬 ‘명성황후’(9월) 2000석을 각각 예약구매했다. 신한은행은 6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개최 1주년 기념 오페라 ‘투란도트’ 티켓을 1억원어치 구입했으며, 10월에는 ‘빅콘서트 2003’의 18만원짜리 티켓을 다량 구입해 접대 대상자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하나은행도 오페라 ‘마술피리’ 티켓 1억원어치를 구입해 VIP 고객에게 증정했다.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된 현상”
문화계에서는 기업들의 문화접대 바람이 공연계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의 ‘마술피리’(왼쪽), 한국오페라단의 ‘투란도트’.
“VIP 고객이나 바이어들에게 우리나라 전통문화상품을 선물하려 하는데 어떤 품목이 좋을까요?”(A사 마케팅 담당자)
“한지로 만든 공예품, 장식품 등이 좋습니다.”(메세나협의회)
“올해부터 외부 손님들을 위한 간담회를 조금 색다른 장소에서 하고 싶습니다. 어디가 좋을까요?”(B사 홍보담당자)
“서울 시내에 있는 아담한 갤러리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스탠딩 뷔페 등으로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겠습니다. 또는 작은 음악당을 빌려 음악회를 직접 기획해 손님을 초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실제로 한 기업 회장은 자택으로 손님을 초대해 영재 음악인들의 음악회를 열기도 합니다.”(메세나협의회)
박찬 메세나협의회 기획운영국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과도한 소모성 접대를 지양하고 실속 있는 문화접대를 위해 컨설팅을 받으려는 기업들의 문의가 계속 늘고 있다”며 “요즘 가족 본위의 생활 패턴이 중시되는 데다 정부의 접대비 규제 조치까지 취해진 것이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접대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기업은 접대 대상자에게 문화 체험의 기회를 선사하면서 기업의 긍정적 이미지까지 심어줄 수 있다. 또 공연을 후원하고 받은 관람권으로 대상자에게 접대하는 경우가 많아 접대 비용이 협찬금이나 광고비 계정으로 계산되므로 기업측으로서도 부담이 적다. 더욱이 이는 공연계의 협찬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정혜자 금호문화재단 부이사장은 “이전에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단순한 스폰서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브랜드나 기업의 마케팅 도구로 보는 경우가 많다”며 “문화예술상품 접대는 기업 입장에서는 문화적인 이미지를 고객에게 심어줄 수 있고 문화계는 스폰서를 통해 양질의 공연을 할 수 있으므로 양쪽에서 모두 반길 일 아니냐”고 말했다.
호암아트홀을 위탁 경영하는 정재옥 크레디아 대표는 “작년 한해 호암아트홀 공연의 경우 기업 등 단체 구매가 전년 대비 30% 정도 늘었다”며 “올해 계획한 ‘퀸엘리자베스 위너 시리즈’ 공연 등에도 롤렉스 등 다수 기업에서 지원의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처럼 접대문화에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바람이 그리 세지는 않다. 접대를 제공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대부분 남성인 경우가 많아, 익숙지 않은 공연관람보다는 친밀감을 높여주는 향락 접대나 골프 접대를 더 좋아하기 때문. B기업 김모 홍보팀장은 “기업이 접대하는 목적은 만나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인데 공연티켓을 주거나 고급스럽게 노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접대 효과도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세청 규제에 맞서는 새로운 편법들이 나타나고 있다. 100만원어치 접대를 하고도 50만원 한도 내에서 영수증을 여러 개로 나누는 경우, 백화점 상품권을 대량구매해서 접대할 때 그것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경우 등이 생겨났다. 1인당 20만~30만원씩 드는 골프접대의 경우 4인1조에 100만원을 간단히 넘어서 상대방의 인적사항을 눈치 봐가며 적어야 하는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번 기회에 향락 접대에서 벗어나 더 건전한 접대문화가 정착되기를 기대하는 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