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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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者들에게 바친 한평생 ‘한국의 슈바이처’

은명내과 원장 김경희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01-29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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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貧者들에게 바친 한평생 ‘한국의 슈바이처’


    ”하나님, 저의 죄를 사해주시면 앞으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1936년 1월 서울 정동교회. 배재고보 2학년 한 학생이 하나님께 영적으로 다시 새 사람이 될 것(重生)을 맹세했다. 어머니 돈 훔친 일, 친구와 싸운 일 등 16세 소년에겐 용서받아야 할 죄가 너무 많았다. 그러고는 가난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자신의 손으로 구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 폐결핵으로 죽은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둘 스쳐가자 소년의 두 눈엔 눈물이 고였다. 굳센 결의가 담긴 눈물이었다.

    그로부터 꼭 6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백발이 성성한 노의사가 된 소년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 은명내과 원장 김경희 박사(84). 그는 지난 60여년 동안 소년시절의 약속을 지켜왔다. 세브란스 의전 시절 시작한 사회봉사활동은 해방 이후 귀국 교포를 대상으로 한 구호사업에서 판자촌 영세민 무료진료, 심장병 수술 후원, 무료진료소 운영으로 발전해 마침내는 전 재산의 사회환원으로 이어졌다. 만 84세, 현역 의사로는 최고령인 그는 지금도 하루 40~50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진료비가 없으면 공짜, 받은 진료비는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진료와 수술비, 장학금 등으로 되돌려진다. 때문에 은명내과를 찾아 진료를 받는 것 자체가 남을 돕는 일이 되는 셈이다. 그는 요즘도 한 달에 1000만원을 무료진료소 운영과 극빈세대 구호, 어린이 교육, 수술비 지원 등으로 쓰고 있다. 전 재산을 기부했기 때문에 이 돈은 모두 김박사의 진료비에서 나온다. 그 자신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지만, 그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하루도 청진기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60여년간 영세민 무료진료 헌신



    “할아버지가 한말 궁의(宮醫·한의사)였기 때문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꼬마였을 때부터 했어요. 가난한 친구들이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헐벗고 가난한 이와의 만남은 이미 1941년 세브란스 의전 2학년 시절부터 시작됐다. 어릴 때 죽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서울 답십리에 있던 조선보육원의 아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 해방 후 만주 일본 등지에서 귀국한 무의탁 교포를 위한 무료진료와 구호활동에 나섰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짧은 의학지식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 교토대 의학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6년 만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73년 은명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의료, 교육봉사 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왕진가방을 들고 답십리, 청계천, 망원동, 한강 뚝방 등 서울지역의 판자촌에 뛰어들었다. 피난민과 영세민이 섞여 있는 그곳에서 그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무료진료 사업을 벌였다.

    “일본 유학시절, 폐병 3기 환자들이 모인 판자촌에 들어가 환자들을 돌보던 일본인 전도사의 전기를 읽고 감명받은 적이 있었죠. 그래서 저도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비참했던 곳을 일부러 찾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10여년간 전국을 떠돌던 그가 1984년 정착한 곳은 서울 상계동 빈민촌. 지금이야 아파트로 가득하지만 당시 상계동은 허허벌판에 판자촌이 즐비한 난민촌이었다. 그는 이곳에 은명내과를 차리고 이 지역 주민을 상대로 진료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1000원 진료’가 시작된다. 어떤 검사나 진료를 받든지 치료의 대가는 무조건 1000원. 의료보험이 정착되지 않아 부르는 게 값이던 시절, 그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무보험 환자에겐 단돈 1000원의 진료비만 받았다. 사실 1000원 진료를 시작한 것도 김박사 본의가 아니었다. 처음엔 무료로 진료했는데 “우리를 거지로 아느냐”는 지역민의 반발에 부딪혀 1000원을 받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졌을 뿐이다. 당시 상계동 빈민 환자들에겐 1000원이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셈이다. 1000원 진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김박사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극빈환자 자녀들의 등록금을 대신 내주다 은명장학회를 설립했다. 1985년 설립된 이 장학회의 혜택을 받은 학생만 모두 2100여명. 1990년에는 이 지역 빈곤 학생들을 위한 무료독서실을 마련했고, 장학금 혜택을 받은 학생 중 대학생이 된 사람은 독서실을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무료 과외공부에 나서고 있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겐 수술비를 전액 후원했다. 1986년부터 지금까지 36명의 환자가 김박사의 도움으로 심장수술을 받아 새 생명을 얻었다.

    貧者들에게 바친 한평생 ‘한국의 슈바이처’

    김경희 박사는 그 자신이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는 80대 노인이지만 하루도 청진기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그를 이을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다.

    “첫 수술을 받은 정원이가 벌써 대학생이 되었으니까 참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새파랗게 질린 아이를 데려와 살려달라는 데 별수 있어요. 내가 수술을 할 수는 없고….” 1997년부터는 무의탁노인과 영세민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는 일도 시작해 18명의 환자가 수술로 건강을 되찾았다. 특히 의료보호환자 지정명단에서는 빠졌지만 실질적으로 돌봐줄 사람이 없는 노인들은 김박사가 아니면 생명을 잃을 상황이었다. 그는 이 사업에 ‘생명사랑 인간회복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박사는 찾아오는 환자들에 대한 무료진료뿐만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왕진에 나섰다. 순회진료를 실시해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수술비를 대주고, 약이 필요한 사람에겐 무료로 약을 나눠줬다. 1990년에는 은명내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극빈환자들을 위해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무료진료소와 무료심부름센터도 따로 만들었다. 15년째 김박사를 도와 무료진료와 봉사에 나서고 있는 중계본동 현대교회 진삼웅 목사(50)는 “지금껏 10만여명에 달하는 환자들이 이곳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다”며 “이곳에서는 신체 장애우들에 대한 심부름 봉사도 함께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나이가 산수(傘壽ㆍ여든 살)를 향하던 1996년, 그는 전 재산(부동산ㆍ54억원)을 모교인 연세대에 기증했다. 은명내과와 자신이 사는 집을 제외하곤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한 것. 김박사는 “재산의 절반은 아내가 번 건데 그 사람이 먼저 기부하자고 제의해 그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시 그가 살아온 봉사인생의 완결판은 2000년에 만들어진 사회봉사 공동체 ‘은명마을’. 그는 은명내과가 있는 노원구 지역의 극빈 이웃 100가구를 선정해 살림살이나 경조사, 학자금, 치료 등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챙겨주는 공동체를 건설했다. 그가 이 모든 가구의 실질적인 가장이 된 것이다.

    그는 요즘도 무료진료소 운영과 봉사활동을 위해 은명내과를 꾸리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은명내과는 봉사활동의 실질적 자금이 마련되는 곳. 하지만 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않다. 본인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의 병을 안다. 그는 얼마 전 쓰러진 적도 있다. 그러나 허리와 목에 디스크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서도 그는 진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도 봉사활동을 계속할 만큼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아는지 언제부터인가 대를 이어 봉사에 나설 ‘후계자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다 보니 줄 게 있어야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은명내과와 의료 시설, 그리고 나의 ‘마음’밖에 없어….”

    84세의 나이답지 않게 해맑은 동안(童顔)인 김박사는 후계자를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다 내놓았다. 그의 뒤를 이을 또 다른 ‘슈바이처’는 언제쯤 나타날까.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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