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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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가 옥석 감별사?

개혁과 물갈이, 당선 가능성 1차 검증 … 출마 후보자 흉기 아니면 보약 ‘양날의 칼’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4-01-29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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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조사가 옥석 감별사?

    전화조사를 하고 있는 면접원들.열린우리당은 정동영 효과로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과거 정당의 보스에게 바치던 공천헌금이 이제는 여론조사기관이나 선거기획사로 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한편으론 바람직한 변화이긴 하지만, 여론조사로 공직선거 후보를 정하는 방식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후보결정 방식이라고 보긴 어렵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은 최근 일부 정당에서 여론조사로 총선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후보에 대한 질적 분석을 떠나 수치로 따져 후보를 뽑는 한국 정치의 천박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물론 모든 조사전문가가 김소장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의 여론조사 수요가 늘면서 조사기관의 수익도 늘었다며 반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제 조사기관들은 때아닌 호황에 즐거워하고 있다. 하지만 당원들의 직접선거로 공직후보를 선출하는 ‘상향식 공천’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여론조사로 후보를 선출하는 상황 자체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공직후보 선출은 물론 여야 각 당의 총선전략 수립에도 여론조사는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설 연휴를 앞두고 터져나온 조순형 민주당 대표의 대구 출마 선언. 조사전문가들은 “우리당이 정동영 의장을 앞세워 개혁 드라이브를 걸면서 지역주의 이슈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민주당의 한계가 두드러져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실제 최근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은 20%대의 한나라당이나 우리당보다 10%나 지지율이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순간 조대표의 대구 출마라는 강수가 터져나왔다. 지역주의를 활용하되 적극적으로 지역 대결을 극복할 정치세력으로 민주당을 부각시켜보겠다는 전략이었던 것.

    지난 연말부터 한나라당을 강타한 물갈이 파문의 배경에도 여론조사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가 한 소식통은 “두 달 전쯤 최병렬 대표와 지도부가 여론조사를 근거로 40대의 적극적 지지를 끌어낼 ‘개혁 드라이브’를 걸지 않고선 총선 승리가 어렵다는 점을 인식했다. 지난 연말 당이 물갈이 논란에 휩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람직한 방향 그러나 한국 정치 후진성 사례”

    지도부는 당의 전략 수립의 기초자료로 활용하지만 일선에서는 여론조사가 출마자를 죽이고 살리는 ‘흉기’이자 ‘보약’ 역할을 하고 있다.

    3당 가운데 여론조사를 가장 앞서 활용한 곳은 한나라당. 1월10일 한나라당은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해 출마자를 △공천유력 △교체대상 △정밀검증 등 3단계로 분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체대상은 사실상 공천탈락을 의미하고, 정밀검증은 공천을 보류한 채 실사를 벌일 대상으로 분류한다는 뜻. 같은 시기 한나라당은 경쟁력 있는 후보의 조건도 확정했다. ‘40대 연령에 전문성과 개혁성을 갖춘 인물’이 가장 이상적인 후보라는 것.

    한나라당은 2월 초를 시한으로 추가 여론조사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경선지역과 무경선 지역으로 나눌 예정이다. 그러니까 후보들은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의 입만 바라보고 있지만 이들의 운명은 두 차례 이상 진행되는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갈리고 있는 셈이다.

    여론조사가 옥석 감별사?

    공천 확정자에게 노란 점퍼를 입혀주는 정동영 의장(맨 왼쪽).

    민주당은 △전 당원 경선 △당원과 일반 국민참여 경선 △여론조사를 통한 결정 등 세 가지 방식 가운데 지역구 사정에 따라 한 방식을 택해 후보를 결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최근 지도부와 일부 호남 의원들의 바람몰이 덕에 여론조사가 대세로 굳어가는 분위기다. 정창교 전자정보국장은 “당내 경선과 총선까지의 정치 일정이 급박한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결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대부분 경선 지역구에서 여론조사 방식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이 구상 중인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선출 방식은 지역구별로 출마 예상자들이 3개 이상의 여론조사 기관을 선택해 조사를 맡기되 비용은 후보자끼리 분담하는 것. 3000만원 안팎으로 추산되는 조사 비용을 출마 후보들끼리 분담할 경우 가장 싸게 경선을 치를 수 있다는 게 민주당의 계산이다.

    하지만 반대의견도 적지 않다. 전남 고흥 출신 박상천 의원은 “대도시와 달리 인구가 적은 지방의 경우 무작위로 여론조사를 할 경우 상대 당 후보의 역선택을 막을 방법이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신인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 … 사전 선거운동 시비도

    이처럼 여론조사가 능사가 아니라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민주당은 후보자간 경쟁이 치열하거나, 정치 신인들이 몰려 있는 지역에 한해 공개 청문회를 실시해 여론조사의 단점을 보완할 방침이다. 강운태 사무총장은 “정치신인끼리만 경쟁하거나 후보들의 인지도가 낮아 여론조사의 의미가 없는 지역에 한해 청문회 실시 가능성이 높다”며 “현재 경선 후보자 심사가 진행 중인 수도권과 호남 일부 등 50여개 지역구 중 7~8개 지역구에서 공개 청문회가 실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은 당헌당규에 ‘무작위 추출 선거인단’에서 총선 후보를 뽑도록 규정해놓았다. 하지만 이 방안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헌에 정해진 무작위 추출 선거인단의 규모는 유권자의 0.5% 이상. 유권자 10만명인 선거구의 경우 우리당 후보경선을 위한 무작위 추출 선거인단 규모는 적어도 500명 이상이 돼야 한다. 그런데 말이 500명이지 이 숫자를 채우기가 만만치 않다.

    우리당 조직국의 한 관계자는 “ARS(자동응답시스템)로 전화를 할 경우 설문에 응하는 비율이 10%다. 이 10% 가운데 우리당 지지자를 가려낸 뒤 이들 가운데 다시 우리당의 후보경선 선거인단에 참여할 것인지를 물어 최종 선거인단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러기까지 여간 번거롭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당 주변에서는 전화 50통을 걸어야 우리당 지지를 밝힌 응답자 한 명이 나올 정도인데 이 경우 선거인단 구성에 엄청난 시간이 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때문에 우리당은 ARS 설문에 응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지지정당에 관계없이 곧바로 우리당 선거인단 참여 의사가 있는지를 물을 계획이다. 또 1차 ARS 설문조사로 우리당 지지자를 가려낸 뒤 이들을 대상으로 당에서 전화를 걸어 선거인단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도 거론되고 있다.

    ARS의 경우 1000샘플을 만드는 데 1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ARS로 걸러진 1차 응답자를 상대로 전화 면접원이 전화를 걸 경우 별도의 비용이 추가될 전망이다. 자칫 ‘돈 안 드는 선거’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애써 선거인단을 구성해도 당원이 아닌 이들에게 후보의 이력이 담긴 홍보물을 발송할 경우 현행법 위반이다. 이 때문에 위법을 피해갈 아이디어를 만드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또 전국 유권자의 전화번호 데이터베이스가 부실하다는 점도 문제다. 선관위가 보관 중인 데이터는 2002년 6월 지방선거 때 만든 것이어서 전화번호 데이터 가운데 상당수는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ARS를 돌려도 통화가 안 돼 헛힘만 쓸 공산이 크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우리당은 몇 가지 보조 방식을 내놓고 있다. 그 첫 번째가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처럼 국민참여경선을 치르는 방안. 또 후보자간 합의를 전제로 여론조사로 후보를 정하는 방안도 허용해놓았다. 결국 우리당에서도 여론조사가 공천권을 휘두르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3김과 같은 카리스마 공천권자가 사라진 요즘 여론조사가 출마자를 들뜨게 하고 있다. 과연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2월 중순께면 여론조사라는 검증 틀을 뛰어넘은 선량 후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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