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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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그림, 정물화가 난 좋다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01-30 10: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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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그림, 정물화가 난 좋다

    문형민, ‘Unknown City’,디지털 c-프린트. 설원기, ‘창이 있는 정물’, 한지 위에 목탄, 먹. 노정연, ‘In Starbucks’, 캔버스에 아크릴. 김지혜,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 정보영, ‘Being Divided’, 캔버스에 유화. 김범, ‘무제’(좌상), 테라코타.(왼쪽부터)

    “그림 참 잘 그렸다!”

    미술전시장에 가면 관람객들 사이에서 가끔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십중팔구 현실의 대상을 사진처럼 똑같이 그렸다는 뜻이다. ‘잘 그렸다’는 말 뒤에는 ‘진짜 사과 같다’, ‘진짜처럼 먹음직스럽다’는 칭찬이 이어지기도 한다.

    난해한 설치미술 앞에서 난감해하는 관람객들도 사과나 도자기 같은 정물을 사진처럼 그려놓은 정물화 앞에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나름의 안목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정물화(still-life)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이다. ‘좋은’ 정물화란 과일이나 물건 같은 ‘죽은 물건’을 윤기와 주름과 그림자까지 그대로 묘사한 그림으로 통해왔다. 그래서 정물화는 동ㆍ서양을 불문하고 화가의 기술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기본기였다.

    꽃과 과일, 각종 문방구 용품들을 그린 정물화 따위가 인간의 위대한 행적을 담은 역사화나 초상화, 신의 권능을 그린 종교화와 어찌 비교될 수 있었겠는가. 이 같은 생각은 사물을 똑같이 그리는 데 어떤 화가보다 뛰어난 기계, 즉 사진기가 발명될 때까지 계속됐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물화는 좀 특별한 의미를 갖긴 했다. 그것은 서양의 미술을 얼마나 잘 배웠는가를 평가하는 능력평가로서 지금도 미대 입시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카메라의 역사가 100년을 넘어서고, 현대미술이 대중들을 따돌리고 저만치 앞서 가버린 지금도 정물화는 그려진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이후 정물화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싶다. 젊은 작가들이 ‘죽은 사물’들을 찾아내고 그리는 데 열심이기 때문이다.

    일민미술관서 3월14일까지

    ‘정물예찬’전은 오늘날 정물화가 존재하는 이유, 그 회화의 매력을 정말로 다양한 증거를 들어서 보여주는 전시다. 1960~80년대 정물작품 60여점으로 이뤄진 ‘특별전’을 제외해도 본 전시에만 무려 3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작가의 나이도 20대에서 50대까지 넓게 퍼져 있다.

    이들이 회화의 하위 장르로 받아들여진 정물화를 다시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시 참여 작가인 김지혜, 최은경, 박재웅, 박이소, 설원기 등은 물 컵이나 대파, 책 등 별 볼일 없는 물건들을 소재로 삼았다. 정밀하게 그린 예전의 정물화에 비하면 그야말로 ‘못 그렸다’.

    근대 회화 이전의 작가들이 2차원의 캔버스에 3차원의 사물을 눈속임으로 그럴듯하게 그려넣기 위해 고민했다면, 이들은 사물들을 납작하게 펴서 이것이 물건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그린 것은 물 컵이나 대파가 아니라 작가가 찍어넣은 물감이자 ‘그리는 행위’, 또는 그림에 대한 ‘신념’ 그 자체다. 박이소의 두 작품 ‘역사’와 ‘전통’은 반복적으로 전통이란 말이 씌어진 책을 그려서 형식만 남은 예술을 통렬히 풍자한다.

    오늘날 작가들이 정물로 선택한 별 볼일 없는 대상들은 대개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되는 물건들이다. 작가들은 1회용 스타벅스 컵, 샤넬의 립스틱, 사탕, 프라모델을 자본주의적 삶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근세의 화가들이 해골, 시계, 과일과 꽃 등을 삶의 알레고리로 즐겨 그린 것처럼 오늘날 작가들은 첨단 자본주의의 발랄한 이미지와 색깔을 빌려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움으로써 내면의 풍경을 그린다. 그곳에는 음영을 만드는 자연스런 햇빛도 없다.

    감상자로서도 모과나 항아리를 그린 정물보다는 스타벅스의 로고가 더 익숙하고 ‘리얼’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언제나 똑같고, 변하지 않으며, 저항할 수도 없는 ‘일상’이란 것이다.

    작가들은 보잘것없는 물건, 조잡한 싸구려들을 아름답지 않게 그림으로써 미술시장에서 회화가 갖는 가치에 저항한다. 이들은 미술작품이 가진 신화를 깨뜨리기 위해 미술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정물화에 도전한다.

    그러나 정물화, 또는 회화는 2차원의 캔버스를 넘어서는 환영을 감상자에게 제공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이 아닐까. 설치와 영상미술의 시대에도 손으로 그린 회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정물예찬’은 곧 그림 예찬이다.

    시끌벅적한 축제처럼 느껴지는 이 전시를 제대로 보려면 꽤 많은 시간이 든다. 일단 전시장을 부분별로 한번 돌아본 뒤 순서대로 나오는 음식을 맛보듯, 다시 하나씩 감상할 수 있다면 결코 흔하지 않은 즐거움을 보장한다. 1월30일~3월14일까지, 일민미술관(02-202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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