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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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열풍에 기름 부었다”

심화학습 따라잡기·학교에 없는 과목 찾아 ‘학원으로’…‘입시 컨설팅’도 이젠 필수코스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1-29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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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교육 열풍에 기름 부었다”

    서울 용산구의 한 입시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수강생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학원엔 왜 보내겠어요?”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7차 교육과정 실시가 사교육 광풍에 기름을 부었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한마디로 말해 학교 교육이 시원치 않아 ‘밤의 학교’(학원)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7차 교과과정이 사교육 의존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수준별 학습, 선택 학습이라는 교과과정의 특성 자체가 일선 학교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준별 교과과정이 1단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2단계로 넘어갈 수 없는, 뒤집어 말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보다 전 단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학습 방식이다. 그러나 7차 교과과정의 이러한 ‘선의’는 대부분의 일선 학교에서 완전히 사장되고 있다.

    “말만 수준별 학습이지 6차 교과과정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교과서 한 권에 단원별로 보충과 심화 단계를 조금씩 기술해놓은 정도다. 교사도, 교실도 부족하다. 이렇다 보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수준’이 다른 학생들을 한 반에 몰아넣고 교과서에 있는 내용 전체를 일률적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학생이 공통-심화-보충이라는 전(全) 단계를 다 소화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강서구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는 C씨의 말이다.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사교육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원 K씨도 같은 맥락의 비판을 쏟아냈다.

    “수준별 학습에 맞춘답시고 교과과정을 더욱 복잡하게 세분화해놓은 것이 오히려 문제다. 일대일 수업 등 개별화 교육을 실시할 여건은 전혀 만들어주지 않은 상태에서 교과과정만 그물코처럼 촘촘하게 짜놓았다. 국가교육과정이 이토록 확고하게 짜인 상태에서 교사가 운용의 묘를 발휘할 여지란 거의 없다.”

    여기에 내신성적 산출을 위한 교내 시험은 물론, 대학입시의 성패를 가늠하는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조차 단일 평가제인 까닭에 수준별 학습이 발붙일 자리는 더욱 좁기만 하다.

    학교에선 암기 수업, 수능은 사고력 중심 … 문제해결은 학원뿐?

    사실 7차 교과과정의 ‘수준별 학습’이라는 특성이 사교육을 부추기게 되리라는 우려는 정책 시행 전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영어, 수학의 경우를 보자. 공통-일반-심화 등의 각 단계는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기 때문에 매학년마다 관련 과목 수업을 들어야 다음 단계 수업을 따라갈 수 있다. 겉으로는 학생들에 재량권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수능을 준비하려면 모두가 필수과목이나 마찬가지다. 교과 수준에 대한 이 같은 ‘상향의식’은 사교육 수요와 직결되는 원인이다.

    7차 교육과정의 또 다른 특징은 교과내용을 30% 정도 줄여 공부 부담을 덜어준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는 내용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순 압축해놓은 것일 뿐이다. 서울 S여고 사회교사인 K씨는 “두 단원을 한 단원으로 압축해놓는다고 해서 가르치는 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통합형 문제가 출제되는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행간의 지식까지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사교육 열풍에 기름 부었다”

    학원에서 단과 강좌를 고르고 있는 수험생들.

    국어, 수학, 영어 과목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 것도 아니다. 2005년 입시요강에서도 알 수 있듯 국·영·수의 비중은 날로 높아져만 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 고등학생들은 “이전보다 학력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는 세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며 한숨을 폭폭 쉰다. 지난해 11월 교육인적자원부가 중·고교생 및 대학생 17명을 초청해 가진 간담회에서도 이와 관련한 문제제기가 쏟아져나왔다. 서울고 2학년 임대운군은 “학교에서는 내신을 위한 암기 위주의 수업이 이뤄지는데 수능에서는 높은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가 출제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수능도사’들이 포진한 학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얼치기 수준별 학습’은 ‘열반’을 피해 ‘우반’으로 올라가고 싶은 학생들에게 사교육을 강요한다.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교과과정 관련 연구를 담당하는 한 연구원은 “워낙 민감한 문제라 연구결과를 모두 공개하기는 힘들지만 7차 교과과정이 ‘심화’라는 단계를 둠으로써 학생들에게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심화과정을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일정 정도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온라인 수능교육 사이트 ‘스카이에듀’의 하귀성 실장은 “요즘 고등학생들에게 3학년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3학년 1학기 중반이 되면 수시모집과 관련한 이런저런 일들로 학교가 어수선해진다. 이어 곧 기말고사가 시작되고, 다시 정시모집 시 응시할 학교 선정과 그 학교 요강에 걸맞은 과목 선택이며 내신 관리 등, 정말 숨 돌릴 새가 없다. 그러니 ‘앞서가는’ 아이들은 고교 2학년 1학기 때쯤이면 3학년 과정까지 끝내놓아야 안심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교육전문가들 조사 통해 선행학습과 성적과는 무관 ‘입증’

    말로만 ‘선택’이지 사실상 특정 과목 수강을 강요당하는 선택 중심 교과과정 또한 사교육 시장이 발견한 또 하나의 ‘금광’이다. 학교에 개설되지 않은 과목을 배우려면 학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어느 과목을 ‘선택’하느냐 그 자체가 합격-불합격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도록 돼 있는 현 대학입시 제도다. 그래서 요즘 일선 학교에서는 “선택이 로또”라는 기막힌 얘기까지 떠돈다. 대학 입시가 일종의 ‘도박’으로 전락한 것이다.

    ‘스카이에듀’ 하실장은 “과학탐구 영역은 그나마 나은데 사회탐구 영역은 입시전문가인 나도 감 잡기가 쉽지 않다. 영어, 수학 성적이야 공부 잘하는 학생들 사이에선 오히려 큰 변별 효과가 없으니 사회탐구 영역에서 어느 과목을 몇 개 선택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사태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학부모로서는 영어, 수학, 국어에 이어 탐구영역 과목들까지 다 따로따로 과외시켜야만 안심이 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음이다.

    그래서 요즘 뜨고 있는 신종 직업이 입시 컨설턴트다. 1~2년 전만 해도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시 컨설팅은 7차 교육과정식 수능 실시와 함께 이제 웬만한 수험생이면 한번쯤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또 유행하는 말이 ‘실칠정삼’(실력 7에 정보가 3)이다.

    그러나 7차 교육과정이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는 여러 혐의와 ‘정황증거’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의 대종을 이루는 선행학습이 성적 향상에 직접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양분 박사는 “2002년 중·고등학생의 6개월간 성적 추이를 살펴본 결과 모든 학년에서 과외 및 선행학습 유무와 성적 간의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강남, 강북 다 마찬가지였으며 오히려 성적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학습태도였다는 것이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정원 연구원은 “한국 교사들의 기본 자질은 여타 선진국 교사들과 비교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교사의 능력 개발을 위한 투자와 동기부여가 일천한 상황에서 갈수록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교육 체계와 정책이다. 7차 교육과정의 경우도 교사 1인당 학생 수를 줄이고, 교사에게 교과서 및 수업 방식에 대한 충분한 재량권을 주고, 학년제·반제 등 숨막히도록 꽉 짜여진 기존 체계를 자율 조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경우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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