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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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은 ‘학교 하기 나름’

논산 대건고·서울 한가람고 등 수준별 수업·선택과목 확대 수년 전부터 모범적 실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1-29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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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과정은 ‘학교 하기 나름’
    충남 논산시 대건고등학교의 수학 수업은 ‘3무(無) 수업’으로 불린다. ‘교과서가 없고, 조는 학생이 없으며, 다른 학생과 성적을 비교해 창피 주는 교사가 없는’ 수업이라는 뜻이다. 대신 ‘재미있고, 실력이 늘며, 수학 사랑이 생긴다’. 그래서 대건고의 수학 수업은 동시에 ‘3유(有) 수업’이기도 하다.

    어떻게 고등학교 수학 수업이 재미있을 수 있을까. 이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대건고만의 독특한 수업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

    수학 수업을 앞둔 쉬는 시간이면 이 학교 복도는 한 손에 파일을 든 채 다른 교실로 이동하는 학생들로 북적거린다. 시험 결과에 따라 기초반, 보통반, 심화반으로 구분 편성된 학생들이 저마다 자기 수준에 맞는 반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들이 들고 가는 것은 대건고 교사들이 각 반에 맞게 제작한 ‘특수 X-파일’. ‘심화반’용은 문제 해결능력 배양에, ‘보통반’용은 사고력 육성에, ‘기초반’용은 기본 개념과 원리 익히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학생들은 이 교재를 통해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

    대부분 학교들은 새 지침 적응 못한 채 허둥지둥 흉내내기

    교육과정은 ‘학교 하기 나름’

    7차 교육과정의 기본 원리를 현장에서 실현하고 있는 모범 학교들은 다양하고 특색 있는 수업을 진행한다. 논산 대건고의 전통 성년식(왼쪽), 한가람고의 안락사 모의재판 모습.

    이것이 바로 ‘성적이 뛰어난 학생에게는 성취감을,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학생에게는 학습 동기를 부여한다’는 대건고 수준별 학습의 실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 또는 지나치게 쉬운 수업에서 소외당해온 학생들에게 그들의 필요에 맞는 수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수준별 학습은 1995년 도입 이후 학생과 학부모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순항하고 있다. 이제는 영어 수업도 수학과 동일한 형태로 진행된다.



    대건고의 성공은 ‘7차 교육과정’이 강조하는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 원리가 현장에서 어떻게 실현돼야 하는지 선명히 보여주는 한 모델이다.

    올해부터 고등학교에 전면 시행되고 있는 ‘7차 교육과정’은 일선 고교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한 반에 학생들을 수십명씩 몰아넣은 채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교과서를 ‘달달’ 외우게 하는 것만이 모범적인 교육이라고 믿어온 ‘구식’ 학교들이 교육부의 새로운 지침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겉모습만 ‘수준별 수업’으로 포장한 채 실상은 ‘우열반 편성’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학교도 적지 않다.

    ‘7차 교육과정’의 또 다른 축인 ‘선택과목 확대’ 원리 역시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학교는 극소수다. 최근 1~2년 사이에 선택영역을 대폭 개설하고 인근 학교와의 연대를 통해 선택과목을 확충했다고 밝히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실상은 학교측이 일방적으로 수업과목을 지정하고, 모든 학생을 같은 교과서로 가르치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997년 개교 당시부터 선택과목을 두고 학생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온 서울 한가람고등학교는 이 분야의 모범 사례로 꼽힐 만하다. 한가람고는 7차 교육과정 시행 이후 문·이과의 구별을 없애고 통합 계열을 운영해 학생들이 개설 교과 대부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선택과목 가운데 듣고 싶은 수업을 학생이 고른 후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 스스로 시간표를 짤 수 있게 만든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 활용하고 있는 전북 부안여자상업고등학교도 ‘선택과목 확대’와 자율성 보장 원리를 앞장서 실현하고 있는 학교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대건고나 한가람고, 부안여상 등과 같은 예가 극히 드물다는 점. 대다수의 학교들은 여전히 7차 교육과정 이전의 상태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건고는 이미 10년, 한가람고는 7년 전부터 수준별 학습과 선택과목 확충을 위한 연구를 계속해왔다는 점도 당장 교육 현실이 뒤바뀌기는 어려울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교사들은 “7차 교육과정이 현장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돼 학생들의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교육과정은 ‘학교 하기 나름’

    2004년부터 전면 시행되고 있는 ‘7차 교육과정’은 일선 고교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7차 교육과정을 입안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허경철 박사도 “7차 교육과정이 도입된 후 이를 받아들여 모범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학교는 아직 없다”며 “앞으로 10년 정도는 추이를 지켜봐야 정착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혀 도입 시기가 부적절했음을 일정 부분 시인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7차 교육과정은 우리 현실에 맞게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대건고 박용서 교감은 “수준별 학습을 실시하고, 학생들의 선택권을 강화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를 만족시키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반박했다.

    “우리 학교의 경우 상위 학급에 배정될 수 있는 성적을 내고도 하위반에 넣어달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학기마다 몇 명씩 나와요. 부족한 기초실력을 보충하려는 것이죠. 학생들이 스스로 수준별 수업을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수준별 수업을 도입한 후 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크게 높아졌어요.”

    박교감의 자랑대로 대건고는 수준별 수업을 진행한 후 해마다 재학생의 95% 이상을 4년제 대학에 합격시키며 충남의 새로운 명문고로 부상하고 있다. 이 명성을 듣고 서울, 대전 등 다른 지역에서 대건고에 지원하는 이들이 전체 지원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이에 대해 교육전문월간지 ‘우리교육’의 김종구 기자는 “대건고나 한가람고는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실험과 투자를 통해 자신만의 교육 노하우를 구축해왔고, 그 결과 성공을 거둔 것”이라며 “이 단계를 생략한 채 무작정 정책을 밀어붙이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교육부의 오판이 지금의 혼란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건고는 오늘과 같은 수업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영어·수학 교과 연구실을 따로 만들고 매년 5명의 교사들에게 해외연수 경비를 지원하는 등 투자를 계속해왔다. 한가람고 역시 학년별로 영어, 수학 교사를 8명씩 채용하고 수준별 교재 개발에 나서는 교사에게는 연구비와 성과급을 따로 지급하고 있다. 꾸준하고 단계적인 인적·물적 투자를 통해서만 7차 교육과정의 이상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전국의 교사들이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교과 연구모임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전문가들은 교육당국이 이러한 일선 교사들의 목소리를 수용해 △선택과목 운영을 위한 담당 교사 수급 및 운용 대책 수립 △통합교과의 지향점을 분명히 제시해주는 교과서 및 교사용 지도서 개발 △수준별 지도를 쉽게 할 수 있는 교과 교실공간 확보 등의 기본조건 충족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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