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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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놓고 돈 먹기’ 공연인가 게임인가

대기업 자본 공연산업에 경쟁적 투자 … 연말연시 흥행 참패 이벤트 부작용 우려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01-29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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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놓고 돈 먹기’ 공연인가 게임인가

    2003년과 2004년 연말연시 공연 중 흥행 성적이 가장 좋은 이은결의 매직쇼(오른쪽). 우리나라에서 3차례 공연돼 매번 높은 관객점유율을 보인 ‘캣츠’(왼쪽 위)와 대기업들의 공연산업 진출 계기가 된 초대형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1월 말, 연말연시에서 설로 이어진 공연가의 최대 대목이 마무리되는 시기다. 공연기획사마다 주판 튕기는 소리가 요란한 때이기도 하다.

    ‘대형 공연 홍수’, ‘공연 뷔페’로 불릴 만큼 공연이 많았던 2003~2004 연말연시 공연시장에서 과연 누가 벌고 누가 잃었을까.

    가장 흥행 성적이 좋은 공연은 뜻밖에 마술사 이은결의 매직쇼다. 기획자인 ㈜루트원의 최호 대표는 “이렇게 잘될 줄 알았더라면 더 큰 규모로 장기간 공연 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은결의 매직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20만석짜리 공연도 나오는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전회 매진으로 ‘불과’ 1만3000석을 판 ‘작은’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4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뮤지컬 ‘캣츠’도 연말에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1월 들어 점유율이 많이 떨어진 상태. 이은결의 매직쇼와 2등 ‘캣츠’를 제외하곤 대부분 공연 기획자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전반적인 경기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기획자들이 앞장서 제작비를 늘리고 공연 숫자도 늘려놓은지라 남 탓을 하기도 어렵다.

    연말연시를 노리고 20억원 넘는 제작비를 들였던 대형 공연들이 10여개 이상 쏟아졌지만 대부분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그중에는 오페라 ‘라보엠’(30억원)처럼 객석점유율 30%도 채우지 못한 흥행 참패에, 프랑스에서 온 연출자들이 국내 기획사와 싸우다 공연 전날 출국해버리는 스캔들까지 불러일으킨 공연도 있었다.



    ‘돈 놓고 돈 먹기’ 공연인가 게임인가

    오페라 ‘아이다’와 연말에 공연된‘라보엠’에 참여한 프랑스 스태프들의 기자회견 모습(아래).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보면 이은결의 매직쇼와 ‘라보엠’ 같은 오페라, ‘캣츠’ 같은 뮤지컬을 같이 ‘결산’한다는 것은 불공평해 보이기도 한다.

    여유층 지갑 놓고 ‘제로섬’ 게임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공연시장에서 20억~30억원의 제작비에 손익분기점으로 5만명을 넘는 공연을 기획한다면, 호랑이가 등장하는 서커스든 세계 정상의 가수가 참여하는 고급 클래식 무대든 비슷한 제약을 받는다. ‘뮤지컬 동경형’ 관객, 즉 연말연시에 7000원짜리 영화보다 5배에서 10배쯤 비싼 공연 하나 정도는 볼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문화적 욕구를 가진 계층의 지갑을 뺏고 뺏기는 똑같은 이벤트가 되는 것이다.

    제작비가 늘어나면 공연을 순수하게 비즈니스로 간주하는 금융자본이 동원된다.

    관객 수를 늘리기 위해 대형 공연장을 확보하고 장기 일정을 잡아야 한다. 또한 망설이는 관객들을 끌어들이려면 공연의 수준보다는 홍보가 더 중요하다. 클래식 오페라 공연에 음향과 조명 시설이 미흡한 체육관이 선호되고, 기획사들이 방송사와 공동주최를 따내기 위해 혈안이 되는 이유다.

    ‘돈 놓고 돈 먹기’ 공연인가 게임인가

    CJ엔터테인먼트가 처음 제작에 참여한 뮤지컬 ‘맘마미아’.

    지난해 여름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투란도트’를 공연한 아츠풀닷컴의 박형준 본부장은 “서울 오페라 관객을 1만명으로 추산했는데 11만명이 왔다. 이는 당시 공동주최사인 방송사가 인기 드라마 ‘야인시대’와 ‘올인’ 방송 시간에 집중적으로 자막광고를 내보낸 덕이었다. 오페라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하여간 투란도트는 한번 봐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분석했다.

    홍보의 이점 때문에 창작극보다는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명성을 얻은 작품이, 그중에서도 국내 출연진으로 채워지는 라이선스보다 오리지널 출연진의 흥행 성공률이 더 높다는 게 정설이다.

    공연이 문화가 아니라 돈 놓고 돈 먹기 식 이벤트로 바뀐 계기는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이 120억원이라는, 아직까지도 전무후무한 제작비를 쏟아부어 200억원을 벌어들인 사건이었다. 120억원의 제작비가 조성된 건 오리온이라는 재벌계열사 제미로가 기획했기에 가능했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오페라의 유령’이 문화계에 미친 파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삼성경제연구소가 이를 분석한 논문을 펴냈다. 오리온이라는 대기업이 공연에 뛰어들어 돈을 번 것 자체가 삼성을 긴장하게 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의 공연예술이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공연 콘텐츠를 기획하고 극장까지 운영하는 복합기업은 공연기업 자체에서보다는 영화, 게임, 방송 등 기존의 다른 콘텐츠 기업에서 공연부문으로 확장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분석에 맞춰가고 있는 곳은 정작 삼성이 아니라 오리온과 영화에서 정상에 오른 CJ엔터테인먼트(이하 CJ)란 점. 삼성이 공연시장 발전에 대해 아직도 미심쩍어하지만, 영화로 노하우를 키운 오리온과 CJ가 공연산업의 잠재력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웅진미디어와 효성도 공연산업에 뛰어들 게 확실시된다. 영화에 이어 공연에서 대기업들의 문화산업 대결 2라운드가 시작되려 하는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성공한 오리온 제미로는 2003년 초 오리지널 스태프의 ‘캣츠’를 들여와 2배 장사를 했다. 올 8월엔 5개월 동안 12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뮤지컬 ‘미녀와 야수’를 공연한다.

    한편 설탕에서부터 극장과 외식산업, 공연에 이르기까지 ‘오리온이 하는 건 뭐든지 하는’ CJ는 최근 공연사업팀을 신설해 우선 ‘캣츠’(2004년)와 ‘맘마미아’에 제작비 일부를 투자했다. 2005년엔 ‘오페라의 유령’을 오리지널 스태프의 작품으로 재공연할 계획이어서 오리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CJ의 신규사업 기획자는 “투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오리지널 스태프 등 명품 공연을 기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익 내야 즐거움 느낄 수 있나

    대기업 자본이 대거 공연산업으로 몰려오는 현상에 대해 공연계에서는 일단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의 속성을 잘 아는 공연계 관계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미 창투사 같은 금융자본의 돈을 빌려 공연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연시 공연계 전체가 흥행에서 참패한 것은 금융자본이 공연시장을 망가뜨린 결과였다. 금융자본의 지원을 받아 공연의 규모와 질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게 투자수익률이 되다 보니 기획자들도 시장에 대한 분석 없이 규모를 키우고, 해외 인기 프로그램을 무조건 확보하는 데만 매달렸다.”(공연기획자 C씨)

    한 공연기획자는 “한번 공연에 실망한 관객은 다시 공연장에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요즘의 이벤트식 공연엔 큰 문제가 있다. ‘투란도트’를 본 이후 우리나라에서 야외 오페라나 체육관 공연은 다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후배들과 걱정했는데 예상이 맞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어 공연된 초대형 야외 체육관 오페라 ‘아이다’는 50억원의 적자를 내고 기획사는 도산했으며, 출연진의 개런티를 주지 못해 송사에 휘말리는 비운을 겪었다.

    토박이 공연기획자들은 이 같은 금융자본의 속성과 대기업의 논리가 크게 다르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이미 영화산업에서 외국영화를 놓고 배급경쟁을 하다 쓴맛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연산업에서는 국내 창작물의 중요성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제미로 홍보담당자는 “해외공연물은 여러 기획사가 ‘코피티션’이란 방식으로 연합해 경쟁을 규제하고 있으며 창작물 지원파트를 별도로 두고 있다. 2~3년 후엔 무대에 올릴 해외공연물이 바닥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기업과 함께 많은 공연을 만든 설도윤씨는 “뮤지컬 제작자들이 연합해 외국산 프로그램에 맞선 창작 뮤지컬을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한다.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에 가지 않아도, 시간차 없이 수준 높은 오리지널 대형 뮤지컬을 바로 서울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관객들 입장에서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불과’ 1500억원 시장-영화산업 5000억원, 게임산업이 1조7500억원-의 공연 산업에 재벌 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어 돈 놓고 돈 먹기 식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공연계 내부의 성장이 아니라 대기업이 공연 콘텐츠 부문으로 확장하는 것을 ‘공연산업화’라고 부르는 것도 우려할 만한 생각이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개인들도 금융상품을 통해 공연 등 문화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제 뮤지컬 팬들도 자신이 보는 공연이 얼마나 큰 이익을 남길 것인지 먼저 판단한 뒤 즐거움의 크기를 결정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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