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6일 한나라당사에 마련된 공천 접수처에서 서류를 접수하고 있는 출마 후보들.
“이상득입니다. 앞으로 모든 것을 김의원하고 의논해 처리하겠습니다. 용기 잃지 마세요. 김의원 옆에는 이상득이 있습니다. 김의원 파이팅. ”
달라진 선거 패러다임 끈이나 동정으론 불가능
위로와 함께 향후 정치일정에 대해 김 전 의원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이 메시지는 2000년 총선 때 김 전 의원의 부인이 선거법을 위반, 당선 무효형이 확정되자 이총장이 전화를 해 남긴 것. 2년이 흐른 2004년 1월14일, 김 전 의원은 당사에서 이상득 총장을 만났다. 김 전 의원은 이 자리에서 이총장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였지만 “4·15 총선 공천을 보장하라”는 무언의 압박 의미도 들어 있었다. 이어 최병렬 대표를 만난 김 전 의원은 “당시 이회창 총재가 두 번 이상 선거 지원유세에 나서주겠다고 약속했다”며 과거 당지도부의 약속을 되새겨 주었다. 그러나 김 전 의원은 기대했던 답을 얻지 못했다.
“공천은 여론조사 등 규정에 따라 원칙을 가지고 추진할 것이다. 과거와 달리 ‘걱정 마라’고 할 입장이 못 된다.”
최대표의 발언에 냉랭한 찬바람이 일었다. 김 전 의원은 과거처럼 ‘연(緣)’이나 ‘동정’으로는 공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자력갱생을 목표로 설 연휴 내내 지역구를 돌아다녔다.
공천전쟁이 불을 뿜고 있다. 설 연휴 출마 후보들은 저마다 공천고지를 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2차에 걸쳐 공천자를 모집한 한나라당의 평균 공천 경쟁률은 3.19대 1. 외형상 체면치레할 수 있는 수치. 그러나 당지도부는 ‘수준 미달’로 결론 내렸다. 경쟁률도 낮지만 문제는 질(質). 지역 쏠림 현상을 감안하면 내세울 만한 거물이 거의 없다는 게 당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주당 사정은 더 열악하다. 1월 중순 현재 민주당 공천 경쟁률은 1.85대 1. 227개 지역구 중 무신청 지역이 44곳이나 된다. 후보가 있는 183개 지역구 가운데 82곳은 단독후보 지역이다. 150여개 지역구가 사실상 사고지구당으로 분류되는 민주당의 내부 사정을 감안할 경우 “앞이 캄캄하다”는 게 한 당직자의 고백이다. 이 당직자는 “‘정동영 임팩트’가 현실로 나타난 후 영입작업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반대로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 사정은 연초보다 한결 쉬워 보인다.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을 제치면서 인사영입에 탄력이 붙고 있다는 게 이강철 상임중앙위원의 설명이다. 그는 “초기 인사영입에서 한나라당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각 당이 영입과 공천에 어려움을 겪는 데는 달라진 선거 및 공천 패러다임이 자리잡고 있다.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L의원은 “3김(金)시대의 전유물인 공천헌금과 낙점 등 과거의 기준은 이제 무용지물이 돼버렸다”며 “이제는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부대변인 출신으로, 경기 안산 단원지역 출마를 노리는 민영삼씨(44)는 요즘 하루에도 서너 번씩 피가 ‘거꾸로’ 쏟는다. 자고 나면 자천타천 출마예상 후보가 늘기 때문. 김진관 전 제주지검장과 경선을 준비 중이던 민부대변인은 느닷없이 김도훈 전 청주지검 검사가 안산으로 날아들자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문을 닫았다. 민주당이 영입한 2명의 전직 검사가 공교롭게도 자신과 맞붙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더욱 참기 힘든 일은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은 한화갑 전 대표의 안산 출마론이 당내에서 터져나온 것. “노무현 개혁의 상징인물인 천정배 의원를 잡아야 한다”는 명분이 따라붙지만 정치거물과 지명도 높은 인물들의 잇따른 안산행을 민부대변인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와 관련, 민부대변인은 1월24일 “지명도 있는 정치인을 불러 민주당 바람을 동반 상승시켜 반사이득을 보겠다는 이웃 지역구 출마인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천경쟁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고독한 전쟁”이라고 설명했다.
1월18일 민주당 상임중앙위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조순형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
경기도 출마를 노리는 우리당 C씨는 지난해 당의장 경선 때 정동영 후보 측근으로 활동하며 “정후보가 당의장이 되면 ○○○지역 공천티켓은 내 것”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이 소식은 같은 지역을 노리던 경쟁자 L씨의 귀에 들어갔고 L씨는 정후보를 찾아가 엄중 항의, 정후보로부터 “공천 내락은 없다”는 말을 끌어냈다.
한나라당은 부패 또는 비리와 관련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공천혁명과 인적쇄신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부패 이미지’를 떨쳐내려는 일환이다. 중부권 출신으로 재선인 A의원(무소속)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들로부터 ‘계륵’으로 통한다. 여론조사 등을 통해 확인한 그의 지역 경쟁력은 평가할 만한 수준. 그러나 중앙 정치권에서는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천심사위 관계자들은 B후보를 공천, A의원과 가상 대결을 해본 결과 낙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런 약점을 파악한 A의원측은 “되도록 빨리 공천문제를 매듭지어 달라”며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당은 공천 시기를 늦출 계획이다. 그가 공천장을 거머쥘 경우 언론과 경쟁후보측에서 “개혁공천에 반(反)한다”는 여론몰이에 나설까봐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포지티브 경력 알리기 전략·흑색선전도 구사
2000년 4월 충남 공주·연기 합동연설회 모습(공주시 공주중학교).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에서 서울과 수도권 PK(부산·경남)지역과 일부 충청지역을 전략 지구로 선정했다. 이 지역 공천원칙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 특히 서울과 수도권의 경우 불과 몇백 표와 몇천 표 사이에서 당락이 갈린다. 때문에 대부분의 지구당에서 정밀 검증을 실시, 경쟁력 있는 후보를 공천할 계획이다. 당 한 관계자는 “비공개 공천신청을 한 인사들 가운데 경쟁력이 있는 후보들을 이런 전략 지역에 투입, 승률을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의 K씨는 “수도권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후보는 개혁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40대 집단”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과 우리당 관계자들의 분석도 비슷하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2000년 총선에서 386돌풍이 일어났다면 이번 총선에선 40대 중심의 세대교체 열풍이 불 것”이라며 “40대 역할론을 어느 당이 선점하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우리당의 공천 희망자 가운데 40대가 52%에 달했고, 한나라당은 41.7%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최근 내부 전략회의에서 ‘40대가 지지하는 든든한 한나라당’이란 선거 캠페인을 마련했다. 민주당과 우리당도 40대 표심을 겨냥한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이중 삼중의 그물망을 뚫고 나가기 힘든 공천후보들의 경우 진로를 돌려 ‘거래’에 나서기도 한다. 최근 영남 지역의 한 민주당 지구당위원장은 이 지역 한나라당 지구당위원장을 찾아가 경선에 필요한 조직을 지원하겠다는 ‘딜’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역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핵심들이다. 한나라당 당내 경선 때부터 당신을 밀어주겠다”는 게 그가 말한 골자. 이 인사는 동원된 핵심인력 1인당 10만원씩의 일당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지역 구도상 자당 간판으로 당선이 무망한 지역의 일부 지구당위원장들이 자신의 조직을 활용해 정치브로커로 나서고 있는 이런 현상은 공천경쟁이 심한 지역일수록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또 한 표가 아쉬운 공천 희망자들은 이런 유혹에 곧잘 넘어간다. 각 당은 설 연휴가 끝난 직후 여론조사에 들어가 공천후보들의 경쟁력 파악에 나섰다. 총성은 울렸고 전쟁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