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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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뱃길에 ‘성공의 꿈’을 싣고

對中 무역 첨병 한국 보따리상들 … 뛰어든 사연 달라도 ‘번듯한 무역상’ 소망은 하나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4-01-29 13: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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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행 뱃길에 ‘성공의 꿈’을 싣고

    중국을 향하는 보따리상들은 대개 초기 화교 조선족이 태반이었지만 차츰 한국인들의 도전이 늘고 있다.

    인천에서 중국 칭다오(靑島)까지의 뱃길을 가는 데는 대략 19시간이 걸린다. 기자는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절(春節)을 앞둔 1월17일, 1만3000t급 낡은 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보따리상, 일명 따이궁(代工)이라 불리는 이들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크게 늘어나 언론의 각광을 받았는데, 이들이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對)중국 무역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던 보따리상은 페리 선상에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꽁꽁 싸맨 커다란 짐을 한두 개씩 들고 있었다. 하지만 초라한 행색의, 오로지 뱃길에 몸을 맡긴 채 차익을 남기려 던 고단한 보따리상과는 느낌이 달라 보였다.

    “아직도 보따리 장사로만 돈버는 사람이 있나요? 깐깐해진 세관도 걸림돌이긴 하지만 다들 전문 무역상으로 발전했거나 이미 전업했지요.”

    화교상인인 칭다오 상인연합회 모종신 회장(41)의 말이다. 한ㆍ중 수교 이후 10여년간 소무역 판로를 개척해온 그는 “보따리상이란 말에는 ‘불법’과 ‘영세함’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어 누구도 그렇게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고 귀띔했다. 페리호를 탄 승객들 대부분이 컨테이너 화주로 중국 내 한국계 공장에 필요한 원·부자재를 공급하는 어엿한 무역상이라는 설명이다. 이제는 보따리상 규모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 탓에 출항 때마다 600여명이 승선하곤 했던 이들은 최근 150여명 수준으로 줄었다.

    예전 비해 인원 줄고 상품 반응도 시큰둥



    1990년 한ㆍ중 뱃길이 열리고 14년이 흘렀지만 중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 뱃길에서 만나는 중국의 첫 관문인 칭다오에는 한국인이 5만명, 조선족이 10만명 이상 거주한다. 아무리 보따리상이라는 말이 듣기 싫다고 해도 중국을 배로 오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잠재적 보따리상이다. 중국에 진입하는 첫 방법은 역시 보따리상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한ㆍ중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그 규모가 커지고 있어 직접 사람 손으로 물건을 옮기는 보따리상은 무역업 입문 단계에서 주로 많이 한다”고 페리호에서 만난 한 업자는 전했다.

    1월19일 칭다오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리춘(李村)시장. 20여명의 한국 초보 상인들이 이곳에 모였다. 회원이 7000여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중국 보따리 무역 동호회인 ‘생생한 보따리’(http://cafe.daum.net/ssbotary) 회원들이다. 이곳에서 이틀째 ‘한국상품 벼룩시장’을 열고 있지만 전시해놓은 상품들의 종류는 다양하지 않았다. 중국 소비자의 반응 또한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투른 중국어를 써가며 상품 선전에 온 힘을 쏟았다.

    “전문소매업으로 발전하기 위해, 중국인들의 구매 행태를 파악하기 위해 시장조사를 나왔습니다.”

    김동철씨(51)는 이미 중국을 수십 번 오가며 무역상으로 입지를 다진 프로다. 직업군인을 그만둔 뒤 골프사업 등에 눈을 돌렸지만 결국 중국이라는 역동적인 시장에 마음을 뺏겼다고 고백한다. 그의 꿈은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중국무역을 하는 이들과 공동구매와 공동판매를 통해 무역 규모를 키우는 일이다. 후배들에게 거친 중국시장을 경험하게 하고자 이번에 직접 물건을 들고 시장에 나왔다.

    행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이는 이희철씨(41)였다. 삼성종합기술원의 고급 엔지니어였던 그는 한때 휴대전화 핵심기술 개발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후 HNC라는 PDA 제조회사의 이사를 지낸 그는 급속히 사업이 몰락하자 2002년, 고심 끝에 평소 꿈꾸던 중국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중국행 뱃길에 ‘성공의 꿈’을 싣고

    벤처사업에 실패하고 중국무역에 뛰어든 이희철씨. 이제는 어엿한 무역상 사장인 김동철씨. 취업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오여진,지랑 자매(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사업차 중국에 올 때마다 무한한 잠재력에 놀라곤 했습니다.”

    그는 홍삼강장제 하나를 팔아도 기술자답게 매우 철저하고 치밀하게 시장을 분석했다. 신뢰할 수 있는 거래선을 뚫는 일을 목표로 잡은 그의 꿈은 전자제품 유통분야에서 성공하는 것.

    신용불량자, 명예퇴직자들도 국내 삶에서 활로를 찾지 못해 중국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장터에는 이런 처지의 사람들이 몇 있었다. 이들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 ‘과연 중국시장에서 내 일을 찾을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한 참석자는 돈 쓰는 데 신중한 가난한 중국 소비자의 반응을 보고 “중국에서 장사해서 먹고살기 힘들 것 같다”고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중국시장은 대단히 이중적이다. 중소도시에까지 전 세계 모든 공산품이 들어가 있지만 여전히 많은 서민들은 풍족한 소비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 상품에 대한 평은 좋지만 한국 상인에 대한 평판은 부정적이다. 보따리상 사이에서는 “선배들이 한국 상인들의 이미지를 다 훼손해놓았다”는 불평이 터져나오지만 성공 신화 또한 계속 회자되고 있다.

    대학생 자매부터 군인 출신까지 다양

    중국행 뱃길에 ‘성공의 꿈’을 싣고

    칭다오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리춘시장 풍경.

    이번 행사에는 젊은 여성들도 참석했다. 부산에서 왔다는 오여진(26), 지랑(22) 자매도 그런 경우. 수학교육을 전공했다는 오여진씨는 “취업이 안 돼 너무 답답했다. 과외를 해서 생활은 했지만 얽매여 사는 것 같아 중국으로 도망친 셈이다”라며 웃어 보였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이미 한국인만을 상대로 한 장사도 성업 중이다. 칭다오에서 식품점을 운영하는 장영철씨(46) 역시 보따리상 출신. 그는 “중국인들과 조선족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많지만 적잖은 보따리상들이 어엿한 중견상인으로 성장해 중국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이날 매서운 한파가 칭다오를 덮쳤지만 중국인들은 최대 명절인 춘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중국 경기가 활황이어선지 표정에도 활기가 넘쳤다. 칭다오는 19세기 초반 독일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곳이다. 이후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했다. 한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농담 삼아 “이제는 한국인들이 칭다오를 점령했다”는 말도 나돌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이 쑥 들어갔다. 중국 경제가 날로 성장하면서 그런 농담을 하기가 부끄러워진 것.

    그러나 한국에서 못 이룬 꿈을 대륙에서 꽃피우기 위한 도전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어 희망을 버리기에는 아직 일러 보인다. “역시 관건은 끈질긴 노력과 도전정신의 결정체인 보따리상에 있다”는 한 상인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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