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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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에 막내린 학예사의 ‘미술 사랑’

부산시립미술관 이동석씨 과로와 스트레스로 숨져 … 척박한 기획자들의 현실 그대로 노출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01-29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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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혹에 막내린 학예사의 ‘미술 사랑’

    고 이동석 학예사(박스 안)가 마지막으로 기획한 ‘센스&센스빌리티’가 열리고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활발히 활동하는 7인의 한국 작가전으로 화려하고 감각적이다.

    ”그 사람이 누워 있는 병원을 오가면서 미술관 앞을 늘 지나쳤어요.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더군요.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기획한 전시지만 현수막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새해 1월9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한 부산시립미술관 이동석 학예연구사(이하 학예사)의 미망인 김혜진 교수(상지대 정치학)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을 잇진 못했다. 열흘 남짓, 남편을 떠나보낸 사실을 실감하기엔 짧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그가 여전히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그가 마지막으로 기획한 전시 ‘센스&센스빌리티’가 성황리에 열려 설 연휴 동안 가족 단위 관람객들을 맞고 있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이 화려한 전시가 한 사람의 생명과 맞바꾼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전시 준비와 원고 마감에 계속 쫓겨

    고 이동석 학예사는 홍익대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비평부문에 당선됐으며 1998년 개관한 부산시립미술관에 공채로 들어가 학예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라 그는 개인적으로 시인이었으며, 부산 지역에선 처음으로 비영리 대안공간 ‘섬’을 만들어 운영했고, 돈 없는 작가들의 전시 서문을 무료로 즐겨 써준 평론가이기도 했다.



    또한 부산 출신 작가들은 있었지만 지역적 정체성이 희박했던 그곳에서 지역적 특성을 발견해 이를 서울로 끌어올려 담론화한 ‘진짜 부산 미술인’이었다.

    평론가로서는 드물게 지역 미술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서 청탁도 많이 받았다. 1월1일에도 그는 원고를 쓰다 갑자기 쓰러졌다. 동료들은 그가 전날 밤까지 ‘센스&센스빌리티’ 관련 글 등 3개의 원고를 탈고하고, 또 다른 원고 마감에 쫓기고 있었다고 전한다. 12월19일 전시를 오픈하느라 과로한 데다 끝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이 겹쳐 신경성 뇌출혈을 일으킨 것이다.

    ‘센스&센스빌리티’는 제목 그대로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전시였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7인의 작가가 참여한 2층의 8개 방을 그 혼자 두 달 만에 채웠다고 했다. 강진식, 고낙범, 김유선, 이진용 등 참여 작가들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작가들이어서 개인전에도 각각 두 달은 걸릴 만한 정도다.

    당초 기획했던 전시가 시간 부족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다른 전시 기획을 급히 만들었지만 동료 학예사들도 1년에 보통 5개씩은 전시를 만들어야 할 처지라 서로 도울 수도 없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한 동료 학예사는 “그나마 이동석씨가 작가들과 평소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빨리 진행됐다. 1~2년 뒤에 하려 했던 전시를 꼭 이번에 하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불혹에 막내린 학예사의 ‘미술 사랑’

    부산시립미술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전시장 중 하나로 꼽힌다.

    여기에 전시 오픈일에 임박해 벌어진 사건이 그를 괴롭혔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해 전시장 벽면을 칠하게 했는데, 이들이 바닥에 페인트를 떨어뜨리자 건물 관리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라”며 그를 다그쳤다. 여기서 그치기 않고 또다시 관람객들 앞에서 관리 공무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추궁하자 그는 바로 사표를 냈다. 이틀 뒤 관장의 중재로 이들의 사과를 받았지만, 그는 이미 미술관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는 게 부인과 주변 동료들의 말이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뒤 반응은 두 가지다. 한 기업미술관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대학원생(큐레이터 전공)은 “시립미술관의 학예사라면 자유롭고 안정된 자리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었다니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시립미술관 학예사로서 그의 삶을 아는 이들은 “결국 올 것이 왔다”며 안타까워했다. 물론 고 이학예사가 남달리 섬세한 성격이긴 했지만 국ㆍ공ㆍ시립 학예사들의 경우 예외 없이 관료조직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윤재갑씨는 “그동안 국ㆍ공립 기관 학예사들이 가끔 소속 기관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이학예사처럼 무고하게 시스템 왜곡의 희생양이 된 사례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늘 시간에 쫓겼어요. 전시가 결정되면 새벽 3시에 들어와 6시에 나가더군요.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니 그만두라고도 했지요. 부산에서 경기도 산골에 있는 작가를 만나러 가는 출장도 거의 1박2일이라 언제나 시간에 쫓겨 허덕였지요. 미술관 조직 때문에 늘 힘들다고 말했고….”(부인 김혜진 교수)

    “일의 성격으로 보면 학예사가 전시 기획을 하고, 공무원 조직이 실무 지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학예사가 기획에서 전시 설치 실무까지 한 뒤 그 내용을 서류로 만들어 공무원들에게 보여준다. 공무원들이 예산과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립미술관 학예사의 말이다. 관장도 공무원이 임명한 계약직이다 보니 공무원들이 반대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10년 전만 해도 국ㆍ공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공무원들과 학예사(기획자·큐레이터)들 사이에 갈등이랄 게 아예 없었다. 건물 담당 공무원이 ‘유명한’ 작가(또는 작품 소장자)와 직접 계약을 해 빈 공간에 늘어놓으면 그것이 ‘전시’였다. 그러다 ‘미디어시티’전과 ‘광주 비엔날레’ 등 국제전을 계기로 외국처럼 미술전문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기획자들과 관료들 사이에 마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시 평가의 기준이 단순 관람객 숫자에서 국내·외 전문가들의 비평으로 옮겨간 이상 관료들도 전문가들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다.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기획자들과 공무원들이 성명서와 해명자료를 뿌리며 싸우는 일이 우리 미술계의 관행처럼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문화의 세기’를 부르짖으며 지방자치단체마다 턱없이 큰 미술관과 박물관 짓기 경쟁을 벌인 것도 학예사들의 위상을 더욱 왜곡되게 만들었다. 미술관 설립 붐이 불자 대학 큐레이터 학과들이 잇따라 신설돼 기획자들은 갑자기 많아졌지만 미술관과 박물관은 소장한 작품이 없어 싼 인건비에 학예사를 고용해 이들로 하여금 계속 기획전을 채워넣게 하는 것이다.

    한 기업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미국에서 막 돌아왔을 땐 교수가 되려는 기획자들을 경멸했다. 또 벽에 못질하는 모습을 찍어 큐레이터의 모습이라고 쓴 기사를 보면서 이 역시 자기 콤플렉스라 여겼다. 큐레이터란 현장에 있어야 하고, 못질하고, 전구 바꿔 끼우는 일도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슬 자신이 없어진다. 기획자로서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씁쓸해한다.

    부산시립미술관의 한 학예사는 “전시 오프닝 날, 뿌듯하기보다 부끄러울 때가 더 많다. 그게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최근에야 비로소 전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공무원 조직과 학예사 조직을 프로젝트로 묶어 팀제로 운영하는 미술관들도 생겨나고 있다. 또는 국ㆍ공립미술관을 아예 재단으로 분리해 운영하기도 한다. 학예사가 한 전시의 기획을 책임 감독하고, 공무원들이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가 자리를 잡으려면 학예사 스스로 예술적 감수성뿐 아니라 행정 능력도 갖춰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이처럼 예외적 경우를 논외로 한다면, 남부럽지 않은 학력과 경력을 가진 기획자들이 열악한 조건의 전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교수나 작가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즐거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고 시각적 이슈들을 제기하여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민중미술 이후 우리 미술계에서 가장 큰 변화의 동력이 있었다면 바로 19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이들 젊은 기획자들이다.

    고 이동석 학예사도 서울의 미술관으로 옮겨가 주말부부 생활을 청산하고 사랑하는 아들과 부인 곁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고민 끝에 포기했다. 부산의 재능 있는 작가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날이 그의 몸은 야위어갔고 그러면서 그는 “날 내버려둬, 장렬하게 산화할 테니”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부산에서 그가 어울린 작가들, 서로 희망이 되고 의지가 된 사람들을 개인적 편의를 위해 털고 가는 게 쉽지 않았나 봐요.”

    부인의 말처럼 그의 생명을 하루하루 이어간 것도 기획자로서의 자부심과 희망이었을 것이다. 부산 지역 작가들과 동료 기획자들이 이 같은 뜻을 모아 유고집을 낼 계획을 세운 가운데 그가 살아서 작가들과 마지막 우정을 나누었던 기획전 ‘센스&센스빌리티’는 2월10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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