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레, ‘가족’, 1918, 캔버스에 유채, 152.5x162.5cm,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현대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가족 형태는 핵가족이다.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은, 간혹 오해되듯 더 큰 가족 형태나 친족집단이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새롭게 진화한 모델이 아니다. 핵가족 형태는 역사를 두고 지구 어디에선가는 꼭 존재해왔다. 핵가족이 20세기의 ‘표준모델’로 부각된 이유는 그것이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그 어떤 가족 형태보다도 효율적으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가족 집단임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속히 늘어나는 이혼율과 미혼모, 동성애 등에서 보듯 핵가족 형태도 요즘에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의 ‘가족’(1918)은 20세기 핵가족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기가 수직의 구성으로 그려져 있다. 이 수직 구성은 위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기를 어머니의 다리 사이에 그린 이유는 그만큼 아기가 따뜻한 모성이 필요한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요, 아버지를 위쪽에 그린 이유는 그가 외부의 세파로부터 가족의 행복과 안위를 지켜야 할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가운데 있는 어머니는 이들 모두의 중심으로서 가정이 늘 평온하도록 사랑과 헌신으로 지켜나갈 존재임을 시사한다. 부부가 벌거벗은 모습은 이들 사이에는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그 정직성만큼이나 이들은 순결한 가정을 지켜나갈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실레는 이상적인 가정을 꿈꿨다. ‘흥미롭다’는 표현을 쓴 것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방탕한 도시였던 빈 출신으로 진한 관능과 퇴폐의 상징이었던 이 화가가 ‘뜻밖에’ 가족을 지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제아무리 일탈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라도 평범하고 따뜻한 가족에 대한 향수가 적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가족공동체를 신의 가장 고귀한 선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관능과 퇴폐의 상징 ‘실레’도 따뜻한 가족 그려
세상의 밝고 아름다운 면만을 주목한 것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는 그만큼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의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1878)은 당시 프랑스 부르주아 가정의 단란한 한때를 포착한 그림이다. 검은색 옷을 입은, 우아하면서도 교양 있어 보이는 부인이 곱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그녀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벽에 걸린 값비싼 동양 발과 테이블의 장식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녀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치며, 자녀들을 향한 애정과 배려가 눈에 보일 듯 선명하다. 두 아이는 똑같이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작은아이가 딸인 조르제트, 큰아이가 아들인 폴이다. 폴은 당시 부르주아 풍습에 따라 머리를 길게 길렀고 여자아이의 옷을 입었다. 사내아이를 여자아이처럼 꾸민다는 게 우리 눈에는 낯설게 보이지만, 그로 인해 그림은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사내아이라 생각하니 아이가 개 등에 털썩 주저앉은 모습이 비로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르누아르,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1879, 캔버스에 유채, 153x18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랑으로 가족위기 극복
이처럼 가정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행복으로 늘 충만하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그러나 경제적 위기, 사고, 학대, 구성원의 상실 등 가족의 행복을 위협하는 현실적인 요소는 무수히 많다. 이렇듯 위기가 발생하면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은 더욱 절실히 요구되지만, 오히려 유대의 끈이 약해져 해체되는 가정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한다.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4~88)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흔들리는, 그러나 끝내 사랑으로 이를 극복하는 한 가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88, 캔버스에 유채, 160.5x167.5cm,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
그를 맞는 가족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문간의 누나 혹은 형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또는 잊었던 ‘아픔’이 되살아난다는 듯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 반면 양심수와 마주한 검은 옷의 여인은 아무 주저 없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려 한다. 그 떨리는 동작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어머니임을 알 수 있다. 늙은 어머니의 엉거주춤한 자세는 아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의 표현이자 자신의 기도가 마침내 이뤄진 데 대한 감사의 표시라 할 수 있다. 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은 그저 재회가 놀랍고 반가울 따름이다. 막내는 기억이 오래돼 저 남자가 진정 내 오빠인지 긴가민가한 표정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잃었던 가족을 되찾아 즐겁기만 하다.
비록 위기가 있어도 이를 잘 극복하고 스스로를 지켜낸 가정은 사회의 가장 고귀한 보석이다. 그런 가정이 있어서 사회는 흔들림 없이 공동의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가족 중심의 가치가 뿌리내렸음에도 우리 사회는 6·25전쟁 이후 오랜 세월 이산의 아픔을 겪었고, 근대화와 고도성장으로 인한 가족해체의 아픔도 겪었다. 이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날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