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아프리카 난민촌, 봉사의 의미 깨달아”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
1995년, 나는 봉사단체인 ‘굿네이버스’ 관계자들과 함께 열흘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내전이 한창이던 아프리카 르완다로 난민 구호활동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굿네이버스 후원회장이 되어 처음 아프리카에 가게 된 나는 그 여행길이 그렇게나 멀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르완다로 바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방콕으로 가서 아부다비행 비행기를 타고, 아부다비에서 다시 나이로비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탔다. 나이로비에서는 조그만 프로펠러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펠러기의 남은 좌석에는 라면과 초코파이 등 한국에서 가져온 구호물자를 가득 실었다.
좌석과 통로는 물론이고 비행기 날개 부분에까지 짐을 실은 프로펠러기는 아프리카 초원 위를 천천히 날아갔다. 작은 비행기가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중간에 바다처럼 넓은 빅토리아 호수 위를 날아갈 때는 이 비행기가 호수 위로 추락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날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르완다가 아닌, 자이레 고마 공항이었다(말이 공항이지 아무 시설도 없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르완다는 비행기로 입국할 수가 없어서 고마에서 차편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자이레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통행료’ 몇 푼을 쥐어주고 우리가 탄 차는 르완다의 난민 캠프로 향했다. 굿네이버스가 급식과 교육시설을 후원하는 캠프였다.
콩죽 한 끼로 하루 연명 … 귀국 후 많은 생각과 반성
난민촌의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콩죽 한 끼로 하루를 연명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캠프 안은 사정이 낫다고 했다. 캠프 바깥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때 우리 일행을 인솔했던 이는 르완다에 와 있던 30대 중반의 한국인 선교사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이 여성 선교사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전으로 치안도 불안한, 세계 최빈국인 르완다에서 혼자 선교활동을 하는 씩씩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 여성의 강인함을 새삼 실감했다.
난민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르완다 교사들 중에는 프랑스 유학파가 많았다. 프랑스 최고의 대학 소르본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 지성인들이 조국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난민촌에서 먹고 자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해진 옷에 신발도 신지 못한, 그러나 정성으로 아이들을 보살피던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캠프의 한 담당자는 우리에게 해 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해가 진 뒤에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구호품을 나눠주고 바삐 차에 올랐지만, 자이레 국경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낮에 본 군인들이 또 우리를 가로막았다. 술에 취한 군인들이 우리 앞에 총부리를 대고 흔들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우리를 인솔하던 여성 선교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군인들의 우두머리를 이끌고 근처 숲으로 갔다. 세상에! 그 와중에 ‘국경 통과비’를 흥정해서 깎은 것이다. 그 대단한 선교사는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건강한지 궁금하다.
아프리카에 다녀와서 나는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됐다. 우리는 참 복 받은 환경에서 살고 있구나,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구나 싶었다. 그 후 굿네이버스의 일원으로 평양보육원 등 많은 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10여 년 전, 르완다에서 받았던 충격과 감동은 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_‘온니’와 마로카의 신나는 자동차 여행 한수진 SBS 보도제작국 기자
불행하게도 나의 여행 리스트는 매우 빈곤하다.
어릴 적부터 생활 반경이 좁았다. 서울을 벗어난 기억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88학번’에게 배낭여행 붐은 아직 일지 않았고, 해외연수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난 이례적이지도, 열정적이지도 못했다. 수학여행과 졸업여행, 동아리 MT가 경주와 제주도, 설악산, 그리고 대천해수욕장 밤바다의 쏟아지는 별을 추가해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여행 일지는 백지에 가까울 뻔했다.
호시절 호경기와 시운(時運)이 맞은 덕분에 남보다 직장생활을 빨리 시작했지만, 그 때문에 여행과는 더욱 멀어졌다. 매일 밤 생방송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일에 8년간 묶이다 보니 자동차로 집과 회사만 오갔고, 여권 표지는 오랫동안 새것처럼 빳빳했다.
여행다운 여행을 처음 한 것은 2002년 7월. 1년 동안 해외연수 대상자로 선발되어 34살에 맞은 미국 초행길이었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서울에 남고 나 혼자 떠난 길이었다.
떠나면서 아예 연수의 목적을 ‘여행’으로 삼았다. ‘책상머리 공부’보다 ‘산 공부’가 적성에도 맞았지만,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맞으랴 하는 절박함이 더 컸다.
베이스캠프는 캘리포니아주 남단 샌디에이고의 UCSD 대학. 학기 중만 아니면 여행을 간다는 원칙으로 계획을 세우니, 한 달짜리 장기 스케줄이 두 번이나 잡혔다.
든든한 동반자도 구했다. 일본 경찰청에서 사이버수사를 담당하는 사무관으로 같은 대학에 연수 중이던 네키 마로카. 3살 아래의 미혼인 이 친구와는 룸메이트로 만나 1년 내내 자매처럼 붙어다녔다. 주변에서 “얼굴이 닮았다”고들 했는데, 그보다 마음과 죽이 훨씬 잘 맞았다.
룸메이트로 만나 미국 누벼 … 국경 건너뛴 뜨거운 우정
애리조나주 세도나를 반환점으로 미국 중서부 쪽을 달린 ‘1차 동진여행’에선 나의 차를, 샌디에이고에서 걸어서 국경을 건널 수 있는 멕시코 티화나로부터 캘리포니아 해안선을 따라가는 ‘2차 북진여행’에선 그녀의 차를 교대로 몰았다. 부부도, 친한 동창도 여행 가보면 ‘진면목’에 놀라 싸운다지만, 우리의 여행 궁합은 환상적이었다. 그녀는 나를 “온니, 온니(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서로가 선호하는 관광지를 적절하게 배합한 ‘동생’의 여행계획서에 ‘온니’는 환호작약했고, 마른 오징어와 햇반, 즉석카레를 공수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온니’의 한국 노래에 ‘동생’은 박장대소했다.
미국 곳곳에 포진한 서로의 친척과 친구들이 합쳐지면서 ‘자매’의 여행 시너지는 극대화됐다. ‘주마간산’의 우려를 거뜬히 뛰어넘으며, 미국 뒷골목의 음식과 낭만을 물리도록 포식했다.
3년도 더 지났지만 잘 차려진 뷔페상처럼 다채롭던 미국의 대자연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소중하고 귀하고 배부르기로는 여행에서 얻은 친구 마로카가 10배, 100배다. 긴 동행 덕택에 ‘동생’과 ‘온니’의 우정은 피를 나눈 듯 뜨거워졌다. 수시로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는 그녀는 “내 한류(韓流)의 시작은 ‘온니’였다(?)”고 놀려대며 지금도 1년에 한두 번씩 한국을 찾는다.
풍경의 추억보다 사람의 냄새에 훨씬 더 가슴 뻐근한 나는, 혹시 여행의 진수를 깨닫지 못하는 뇌나 가슴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닐까 가끔씩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국에 다녀온 뒤 다시 여행을 가지 않았는데도 그리 답답해하지 않는 나를 보면 그 혐의는 더 짙어진다.
3_“낮선 땅에서 마음 터놓은 아버지와 아들” 김정명 명지대 체육학부 교수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는 특별한 관계 맺기다. 일상의 표피적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여행이기 때문이다. 3년 전, 고교 1학년이던 큰아들 보광이와의 여행을 계획할 때 나는 이러한 실체를 만나리라 기대했다. 가부장의 틀 속에 가려졌던 아버지의 약점과 허상을 노출시킬 각오를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친구같이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터키와 그리스, 이탈리아였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한 우리의 여행,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들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 수직적인 부자관계였다. 내 나름대로 친구와 여행하듯 아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는데도 녀석은 아버지가 제시한 의견을 별 저항 없이 따르곤 했다. 낯선 곳에서 아버지와 ‘맞먹어’봤자 유리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단 둘이 배낭여행 … 좌충우돌 속에서 부자유친 확인
다만 사물을 보고 대하는 보광이의 관심은 나와 판이하게 달랐다. 단 둘이 여행을 떠나니 그 차이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관광지, 먹고 싶은 음식, 잠자는 시간 어느 하나 일치하는 게 없었다. 터키 여행에서 나는 인류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서로의 감흥을 나누길 기대했지만, 아들은 이스탄불 거리 한구석에서 인터넷 카페를 찾아냈을 때 가장 기뻐했다. 종교 건축물들을 둘러보면서 서구 신앙의 뿌리와 역사를 짚어보게 하려는 내 의도와 달리 아들은 건축물이 얼마나 웅장한가 정도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고, 그보다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근사한 스포츠카를 찾느라 바빴다.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한 날, 처음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혼자 있게 해주었더니 녀석은 겁내기는커녕 환하게 웃으며 마냥 좋아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약간은 서운해져서 마음이 찡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아들이 늦잠을 자며 꾸물대는 바람에 델피신전으로 가는 차편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너무나 ‘가부장적으로’ 화를 냈고, 궁지에 몰린 아들은 미케네로 가자는 대책을 내놓았다. 아들의 임기응변 덕에 부자 여행이 맞은 최초의 위기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그밖에도 산토리니 섬에서 아들 대신 펑크 난 자전거를 타다 엉덩이가 부르텄던 일, 이탈리아에서 아들이 혼자 나폴리와 폼페이로 갔을 때 로마에 남아 종일토록 전전긍긍하던 일 등 21일의 여행은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을 남기면서 흘러갔다. 여행이 무르익으면서 보광이는 나름대로 아버지에게 도전(?)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 또한 지금은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돌아보면 21일간의 특별한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수직적이면서 동시에 수평적일 수 있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살을 맞댄 여행 중 부지불식간에 노출됐던 ‘아버지의 약함과 부족함’이 아들에게는 아버지와 맞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아버지라면 누구나 자신과 맞설 만큼 당당한 아들을 원할 것이다. 다만 일상 중에 그런 심경을 표현할 기회가 없을 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은 그것을 위한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아들과 함께 ‘부자유친 로드맵’이라는 여행기를 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보광이와 함께 쓴 이 책을 보면 3년 전의 좌충우돌 여행이 생생히 떠오르고, 훌쩍 커버린 아들아이의 모습이 새삼 대견스럽다.
르완다 난민촌에서 어린이를 품에 안은 유인촌 대표.
물론 르완다로 바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방콕으로 가서 아부다비행 비행기를 타고, 아부다비에서 다시 나이로비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탔다. 나이로비에서는 조그만 프로펠러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펠러기의 남은 좌석에는 라면과 초코파이 등 한국에서 가져온 구호물자를 가득 실었다.
좌석과 통로는 물론이고 비행기 날개 부분에까지 짐을 실은 프로펠러기는 아프리카 초원 위를 천천히 날아갔다. 작은 비행기가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중간에 바다처럼 넓은 빅토리아 호수 위를 날아갈 때는 이 비행기가 호수 위로 추락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날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르완다가 아닌, 자이레 고마 공항이었다(말이 공항이지 아무 시설도 없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르완다는 비행기로 입국할 수가 없어서 고마에서 차편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자이레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통행료’ 몇 푼을 쥐어주고 우리가 탄 차는 르완다의 난민 캠프로 향했다. 굿네이버스가 급식과 교육시설을 후원하는 캠프였다.
콩죽 한 끼로 하루 연명 … 귀국 후 많은 생각과 반성
난민촌의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콩죽 한 끼로 하루를 연명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캠프 안은 사정이 낫다고 했다. 캠프 바깥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때 우리 일행을 인솔했던 이는 르완다에 와 있던 30대 중반의 한국인 선교사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이 여성 선교사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전으로 치안도 불안한, 세계 최빈국인 르완다에서 혼자 선교활동을 하는 씩씩한 모습을 보면서 한국 여성의 강인함을 새삼 실감했다.
난민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르완다 교사들 중에는 프랑스 유학파가 많았다. 프랑스 최고의 대학 소르본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 지성인들이 조국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난민촌에서 먹고 자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해진 옷에 신발도 신지 못한, 그러나 정성으로 아이들을 보살피던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캠프의 한 담당자는 우리에게 해 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해가 진 뒤에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구호품을 나눠주고 바삐 차에 올랐지만, 자이레 국경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낮에 본 군인들이 또 우리를 가로막았다. 술에 취한 군인들이 우리 앞에 총부리를 대고 흔들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우리를 인솔하던 여성 선교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군인들의 우두머리를 이끌고 근처 숲으로 갔다. 세상에! 그 와중에 ‘국경 통과비’를 흥정해서 깎은 것이다. 그 대단한 선교사는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건강한지 궁금하다.
아프리카에 다녀와서 나는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됐다. 우리는 참 복 받은 환경에서 살고 있구나,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구나 싶었다. 그 후 굿네이버스의 일원으로 평양보육원 등 많은 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10여 년 전, 르완다에서 받았던 충격과 감동은 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_‘온니’와 마로카의 신나는 자동차 여행 한수진 SBS 보도제작국 기자
캘리포니아의 허스트 캐슬에서 마로카가 찍어준 사진.
어릴 적부터 생활 반경이 좁았다. 서울을 벗어난 기억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88학번’에게 배낭여행 붐은 아직 일지 않았고, 해외연수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난 이례적이지도, 열정적이지도 못했다. 수학여행과 졸업여행, 동아리 MT가 경주와 제주도, 설악산, 그리고 대천해수욕장 밤바다의 쏟아지는 별을 추가해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여행 일지는 백지에 가까울 뻔했다.
호시절 호경기와 시운(時運)이 맞은 덕분에 남보다 직장생활을 빨리 시작했지만, 그 때문에 여행과는 더욱 멀어졌다. 매일 밤 생방송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일에 8년간 묶이다 보니 자동차로 집과 회사만 오갔고, 여권 표지는 오랫동안 새것처럼 빳빳했다.
여행다운 여행을 처음 한 것은 2002년 7월. 1년 동안 해외연수 대상자로 선발되어 34살에 맞은 미국 초행길이었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서울에 남고 나 혼자 떠난 길이었다.
떠나면서 아예 연수의 목적을 ‘여행’으로 삼았다. ‘책상머리 공부’보다 ‘산 공부’가 적성에도 맞았지만,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맞으랴 하는 절박함이 더 컸다.
베이스캠프는 캘리포니아주 남단 샌디에이고의 UCSD 대학. 학기 중만 아니면 여행을 간다는 원칙으로 계획을 세우니, 한 달짜리 장기 스케줄이 두 번이나 잡혔다.
든든한 동반자도 구했다. 일본 경찰청에서 사이버수사를 담당하는 사무관으로 같은 대학에 연수 중이던 네키 마로카. 3살 아래의 미혼인 이 친구와는 룸메이트로 만나 1년 내내 자매처럼 붙어다녔다. 주변에서 “얼굴이 닮았다”고들 했는데, 그보다 마음과 죽이 훨씬 잘 맞았다.
룸메이트로 만나 미국 누벼 … 국경 건너뛴 뜨거운 우정
애리조나주 세도나를 반환점으로 미국 중서부 쪽을 달린 ‘1차 동진여행’에선 나의 차를, 샌디에이고에서 걸어서 국경을 건널 수 있는 멕시코 티화나로부터 캘리포니아 해안선을 따라가는 ‘2차 북진여행’에선 그녀의 차를 교대로 몰았다. 부부도, 친한 동창도 여행 가보면 ‘진면목’에 놀라 싸운다지만, 우리의 여행 궁합은 환상적이었다. 그녀는 나를 “온니, 온니(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서로가 선호하는 관광지를 적절하게 배합한 ‘동생’의 여행계획서에 ‘온니’는 환호작약했고, 마른 오징어와 햇반, 즉석카레를 공수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온니’의 한국 노래에 ‘동생’은 박장대소했다.
미국 곳곳에 포진한 서로의 친척과 친구들이 합쳐지면서 ‘자매’의 여행 시너지는 극대화됐다. ‘주마간산’의 우려를 거뜬히 뛰어넘으며, 미국 뒷골목의 음식과 낭만을 물리도록 포식했다.
3년도 더 지났지만 잘 차려진 뷔페상처럼 다채롭던 미국의 대자연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소중하고 귀하고 배부르기로는 여행에서 얻은 친구 마로카가 10배, 100배다. 긴 동행 덕택에 ‘동생’과 ‘온니’의 우정은 피를 나눈 듯 뜨거워졌다. 수시로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는 그녀는 “내 한류(韓流)의 시작은 ‘온니’였다(?)”고 놀려대며 지금도 1년에 한두 번씩 한국을 찾는다.
풍경의 추억보다 사람의 냄새에 훨씬 더 가슴 뻐근한 나는, 혹시 여행의 진수를 깨닫지 못하는 뇌나 가슴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닐까 가끔씩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국에 다녀온 뒤 다시 여행을 가지 않았는데도 그리 답답해하지 않는 나를 보면 그 혐의는 더 짙어진다.
3_“낮선 땅에서 마음 터놓은 아버지와 아들” 김정명 명지대 체육학부 교수
터키 여행 중에 아들 보광 군과 함께 포즈를 취한 김정명 교수.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한 우리의 여행,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들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 수직적인 부자관계였다. 내 나름대로 친구와 여행하듯 아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는데도 녀석은 아버지가 제시한 의견을 별 저항 없이 따르곤 했다. 낯선 곳에서 아버지와 ‘맞먹어’봤자 유리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단 둘이 배낭여행 … 좌충우돌 속에서 부자유친 확인
다만 사물을 보고 대하는 보광이의 관심은 나와 판이하게 달랐다. 단 둘이 여행을 떠나니 그 차이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관광지, 먹고 싶은 음식, 잠자는 시간 어느 하나 일치하는 게 없었다. 터키 여행에서 나는 인류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서로의 감흥을 나누길 기대했지만, 아들은 이스탄불 거리 한구석에서 인터넷 카페를 찾아냈을 때 가장 기뻐했다. 종교 건축물들을 둘러보면서 서구 신앙의 뿌리와 역사를 짚어보게 하려는 내 의도와 달리 아들은 건축물이 얼마나 웅장한가 정도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고, 그보다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근사한 스포츠카를 찾느라 바빴다.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한 날, 처음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혼자 있게 해주었더니 녀석은 겁내기는커녕 환하게 웃으며 마냥 좋아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약간은 서운해져서 마음이 찡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아들이 늦잠을 자며 꾸물대는 바람에 델피신전으로 가는 차편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너무나 ‘가부장적으로’ 화를 냈고, 궁지에 몰린 아들은 미케네로 가자는 대책을 내놓았다. 아들의 임기응변 덕에 부자 여행이 맞은 최초의 위기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그밖에도 산토리니 섬에서 아들 대신 펑크 난 자전거를 타다 엉덩이가 부르텄던 일, 이탈리아에서 아들이 혼자 나폴리와 폼페이로 갔을 때 로마에 남아 종일토록 전전긍긍하던 일 등 21일의 여행은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을 남기면서 흘러갔다. 여행이 무르익으면서 보광이는 나름대로 아버지에게 도전(?)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 또한 지금은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돌아보면 21일간의 특별한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수직적이면서 동시에 수평적일 수 있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살을 맞댄 여행 중 부지불식간에 노출됐던 ‘아버지의 약함과 부족함’이 아들에게는 아버지와 맞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아버지라면 누구나 자신과 맞설 만큼 당당한 아들을 원할 것이다. 다만 일상 중에 그런 심경을 표현할 기회가 없을 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은 그것을 위한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아들과 함께 ‘부자유친 로드맵’이라는 여행기를 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보광이와 함께 쓴 이 책을 보면 3년 전의 좌충우돌 여행이 생생히 떠오르고, 훌쩍 커버린 아들아이의 모습이 새삼 대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