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 중인 주자소도(鑄字所圖).
신하들 “어렵다”고 해도 거듭 개량 명령
태종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계미자로 책을 찍어내기는 했지만 계미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활자 모양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고, 활자 크기도 들쑥날쑥했다. 무엇보다 큰 약점은 느린 인쇄 속도였다. 조선시대의 활자 인쇄는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한 뒤 활자판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뒤집어 찍어내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한데 활자를 배열하는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 구리로 만든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하고 인쇄할 때 활자가 움직이면 인쇄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활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방법이 필요한데 계미자의 경우 그렇지가 못했다. 계미자는 밀랍을 녹여 붓고 거기에 활자를 심어 고정시켰던 것이다. 밀랍은 간단히 말해 ‘양초’ 성분 물질이라 생각하면 된다. 녹이기는 쉽지만, 무르고 열에 약하다. 밀랍에 의해 고정된 활자는 쉽게 흔들린다. 인쇄를 몇 장 하고 나면 활자가 삐뚤삐뚤해진다. 다시 고정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밀랍 고정방식 때문에 계미자로는 하루에 10장도 인쇄할 수가 없었다. 목판인쇄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려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을 인쇄한 이후 밀랍 고정방식은 한 번도 개량된 적이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 목적이 대량의 인쇄물을 빠른 시간 안에 얻는 데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더욱 많은 서적을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마침내 활자와 인쇄방법의 개량이 시도된다. 이때의 정황이 ‘세종실록’ 16년 7월2일조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세종은 이날 이천(李천)을 불러 새 활자의 주조를 명하면서 과거 한 차례 있었던 활자와 조판술의 개량을 회상한다.
금속활자가 배열된 조판틀.
금속활자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거푸집(가운데)과 거푸집을 통해 만들어진 금속활자(오른쪽). 금속활자로 인쇄한 서적들.
이 같은 기술 개량에 따라 인쇄 속도가 빨라졌다. ‘세종실록’ 3년 3월24일조에 의하면 계미자의 인쇄는 하루에 몇 장(數紙)에 불과했다. 하지만 변계량(卞季良)의 ‘주자발(鑄字跋)’에 의하면 새 활자와 조판술로 인해 하루에 20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기술 발전인 셈이다.
이 기술 개량은 세종이 주도했다. 앞의 인용 글에 의하면, 세종이 계미자의 인쇄 속도에 대한 폐단을 걱정해 이천에게 개량을 명하는데 이천이 난색을 표하자, 세종이 재차 강요해 마침내 기술 개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종실록’ 3년 3월24일조는 “임금이 직접 지휘하고 계획하여 이천과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구리판(조판틀)을 다시 주조해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게 했다”고 하고 있는 바, 활자와 조판틀을 개량하려는 생각과 개량 방법 역시 모두 세종의 의지와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이 개량 사업으로 주자소는 술을 무려 120병이나 하사받았다. 그만큼 활자 개량이 성공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활자의 제조는 경자년(1420) 겨울에 시작돼 임인년(1430) 겨울에 끝났다. 학계에서는 활자 주조가 시작된 연도를 따서 이 활자를 ‘경자자’라고 부른다.
목판 사용하던 중국보다 인쇄술 훨씬 앞서
활자와 인쇄술의 개량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번의 중요한 개량이 있었다. 앞의 기록에서와 같이 세종(16년 7월2일)은 활자를 다시 만들 것을 지시한다. 지금 있는 활자를 녹여 큰 활자를 만들자는 것이다. 일을 맡은 사람은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直殿) 김빈(金 ),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이었다. 그리고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 )’, ‘논어(論語)’ 등의 자형(字形)을 땄다.
활자는 불과 2개월 만에 완성됐으니, 앞서 경자자가 2년에 걸쳐 만들어진 데에 비하면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그만큼 활자 주조의 기술이 축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활자는 갑인년에 만들어져 갑인자라고 불린다. 갑인자는 큰 활자를 찍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사실 그 가치는 활자의 크기보다 다른 데 있었다. 즉 갑인자부터 활자가 완전히 고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갑인자부터 밀랍 고정방식을 버리고 대나무로 활자와 조판틀, 그리고 활자와 활자 사이의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활자는 움직이지 않게 됐고 인쇄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실록’에 의하면 하루에 40여 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건 대단한 진보다. 즉 계미자는 하루에 10장 미만이었고 경자자는 20장, 갑인자는 40장이었으니 속도가 무려 6, 7배나 빨라졌던 것이다. 게다가 갑인자는 글씨체가 완정(完整)하고 아름다워 이후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진다. 조선의 대표 활자인 셈이다.
세종은 이후에도 활자 개량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세종은 즉위 17년 8월24일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중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 물어보게 한다. 12월13일 돌아온 사신단은, 중국은 옛날에는 동활자를 사용했으나 목판과 다를 것이 없고 비용은 더 많이 들기 때문에 근래에는 모두 목판을 사용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 삼국 중 일본은 금속활자 인쇄 자체를 아예 몰랐고, 중국은 금속활자 인쇄술을 알기는 했지만 다시 목판으로 회귀했으니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서는 조선이 최고 수준이었던 것이다.
금속활자 보급 이전에 주로 사용된 목활자.
하지만 인쇄술의 발전은 세종조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갑인자 이후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에 필요에 따라 다양한 금속활자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갑인자의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조판술과 인쇄기술 역시 조선조 말까지 동일했다. 세종이 창안했던 조판술은 정조(正祖) 때도 바뀐 바 없었다. 활자를 활자틀에 심고 먹을 칠하고 솜뭉치로 두드려 한 장 한 장 떼어내서 책을 묶는 방식은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책 보급은 백성 아닌 사대부 위한 것
이뿐만이 아니었다. 활자는 모두 한자(漢字)였다. 물론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만든 금속활자에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나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찍은 한글 활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이 활자는 갑인자가 그랬던 것처럼 수십 수백 종의 책을, 다시 말해 애당초 수십 수백 종의 국문서적을 인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활자는 ‘월인석보’라는 특정한 책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이 활자가 널리 활용돼 국문서적을 쏟아내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가 분명하지만, 세종의 머릿속에는 한글 활자를 만들어 백성들이 읽을 독서물(讀書物)을 만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왜인가?
무엇보다 지배층의 머릿속에 ‘백성과 독서물’이란 관계, 즉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백성’을 연결하는 상상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세종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궁극적으로 독서 대중을 만들어낸 것과 달리 오로지 사대부의 탄생에만 기여했을 뿐이다. 흔히 한국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몇 년을 앞섰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활자 제작에만 초점을 맞춘 것일 뿐이다. 금속활자 외에 책을 조판하고 인쇄하는 기술, 그리고 활자가 표음문자인가, 표의문자인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제작 배경이 전혀 달랐던 것이니,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연히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몇 년을 앞섰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조선시대의 한자 활자는 20만 자 내외로 주조됐다. 적으면 10만 자, 많으면 30만 자였다. 이런 규모의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국가밖에 없었다. 민간의 누구도 감히 20만 자의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만든 금속활자가 몇 종 있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국가의 금속활자와 똑같은 기능을 했을 뿐이다. 오로지 사대부들에게 필요한 소수의 책을 찍었을 뿐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금속활자도 혁명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지배층을 탄생시키고 공고히 하는 혁명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