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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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원서 읽으면서도 우리 책에 무한 애정

“신지식 배우되 옛 책도 아껴야” … 외국 문명 취한 세태엔 강력 비판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7-04-27 1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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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원서 읽으면서도 우리 책에 무한 애정

    신채호의 친필과 사진.

    대한민국 사람으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모를 리 없다. 만일 모른다면 그 사람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거나 학교교육이 잘못됐을 것이다. 신채호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외곬의 민족주의자요, 철저한 비타협적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 문필가다. 또 그는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 1842~ 1921)에게서 사상적 세례를 받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단재의 공식적 사회활동은 1905년 장지연(張志淵)의 주선으로 황성신문사에 입사해 계몽적 논설을 쓰면서부터 시작됐고, 그 다음 해 대한매일신보사로 옮겨 애국·항일(抗日)의 격렬한 필봉을 휘두른다. 1910년 4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을 예측한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다. 그 후 이역에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한국사 연구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은 여기서 굳이 췌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열 살에 사서삼경 외던 천재

    단재의 사상과 학문은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을 갖지만, 그 지적 토대는 한학(漢學)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단재는 어렸을 때 조부 신성우(申星雨)에게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에 이미 ‘사서삼경’을 외우고 한시와 한문을 지을 수 있었다 하니, 그야말로 무사자통(無師自通) 수준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18세 때 조부의 주선으로 당시 대단한 장서가였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서재에 들어가 며칠 만에 장서를 다 보고 나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학에서 지적 토대를 마련한 단재였지만,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지식의 범위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 전해진 중국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1873~ 1929)의 저술들을 읽고 세계 변화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조선의 계몽지식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단재가 어렵다고 정평이 난 영어 원서를 줄줄 읽을 정도로 영어에도 능통했다는 것이다. 단재가 영어를 배운 것은 상하이 망명 시절이었다. 이광수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단재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에게 영어를 배웠다. 김규식이 누군가. 미국에 유학해 프린스턴대학원(Prince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니 본토 발음을 까다롭게 가르칠 수밖에. 깐깐하게 발음을 따지는 김규식에게 진절머리가 난 단재는 영어책을 가지고 이광수를 찾아왔다. “나, 고주(孤舟·이광수의 호)한테 배우겠소. 발음은 쓸 데가 없으니 뜻만 가르쳐달라 해도 그 사람이 꽤 까다롭게 그러는군.”



    영어 원서 읽으면서도 우리 책에 무한 애정

    2004년 이장된 신채호의 가묘. 사당과 기념관 인근에 있다.

    김규식과 이광수에게 영어 배워

    이광수가 과연 단재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영어를 가르쳤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단재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는 영어책을 읽으면 이미 읽고 난 페이지는 모두 찢어서 휴지로 썼다. 누가 그것을 보고 정말 저 책을 읽고 아는가 싶어 물어보았더니 화를 버럭 내며 담뱃진이 질질 흐르는 담뱃대로 원문을 이리저리 그어가면서 읽고 설명하는데, 내용을 통달하고 있어 모두들 경악했다는 것이 아닌가.

    한데 단재의 영어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였던 이윤재(李允宰, 1888~1943)가 전하는 말이다. 베이징(北京)에 있을 때 단재는 이윤재의 집을 자주 찾아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이윤재의 책상 위에 영어책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절구절 ‘하여슬람’ 하면서 한문식으로 토를 달아 느릿느릿 읽는 것이 아닌가. “I am a boy”를 “I는 am a boy라”는 식으로 말이다. 기가 막힌 이윤재가 “선생은 영어를 어찌 한문 읽듯 읽소?” 하자, 단재는 웃으며 “영어나 한문이나 글은 마찬가지가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학과 영문학에 정통했던 변영만(卞榮晩, 1889~1954)은 어느 날 단재가 영어 읽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단재는 ‘neighbour’를 ‘네이그후바우어’라고 읽지 않는가. 변영만은 놀라 단재에게 “단어 안에 묵음이 있으니 ‘네이버’라고만 발음하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단재의 말이 더 엉뚱하다. “나도 그거야 모르겠소. 그러나 그건 영국인의 법이겠지요. 내가 그것을 꼭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이오.” 아, 이 자신감! 요즘 어디서 이런 대담한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신채호는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 숭배론’,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 제국 쇠망사’까지 거침없이 읽었다 하니 독해력 수준이 예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어책을 읽고 크로포트킨까지 섭렵했으니 단재의 사유는 자기 지식의 출발점이었던 한학, 곧 구학과는 결별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구서(舊書) 수집의 필요’라는 논설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조선의 옛 지식을 담은 한문책을 열심히 수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 읽어보자.

    세계가 이미 새로워지매 서적 또한 새로워져 정치 법률을 배우려 해도 새 정치, 새 법률을 배울지며, 윤리와 철학을 배우려 해도 새 윤리, 새 철학을 배울지어늘, 이 부패한 구서를 수집하여 어디에 쓸 것인가. 동서의 뱃길로 한국에 실어 나를 것은 저 신서(新書)이며, 문인 학사가 날로 번역해낼 책이 저 신서적이라. 후생(後生) 소년이 신서적만 보려고 해도 또 시간이 모자람을 한탄하거늘, 이 쓸데없는 구서를 수집해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그렇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옛 서적을 버리고 새 서적으로 새 사상을 배우자. 근대적 계몽주의자 신채호의 생각이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사람마다 모두 새 서적을 광포(廣布)하지 못함을 한탄하나, 나는 구서(舊書)가 장차 사라져버릴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대저 외국문명을 수입하매, 조국사상을 아주 잊어버리고, 이 세상이 오로지 외국의 인물만을 숭배하게 된다면 점점 우리도 모르는 사이 부외노(附外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문명국에서는 그 국수(國粹)를 고취하며 국성(國性)을 발휘하는 것이다. 현재 경성(서울)의 일반 사회를 보건대, 미신기구(媚新棄舊·새것에 아첨하고 옛것을 버림)의 마음이 불붙듯 번져 선배가 발한 언론이라 하면 아무리 정밀하고 간절한 언론이더라도 반드시 부패한 묵은 이야기라고 하여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며, 구서적(舊書籍)에 나타난 사적(事蹟)이라 하면 아무리 거창한 사실이라도 반드시 쓸데없는 지난 이야기라고 하여 입에 올리기를 창피하게 여긴다. 오로지 서양 철학자, 근대의 지식인이 지껄인 이야기는 잘되었거나 말거나 불문하고 노래하고 찬미하니, 이 역시 노예근성이 초래한 바가 아니겠는가.

    새 사조(思潮)에 취한 나머지 자신을 몰각하는 풍조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다. 단재는 이어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어느 유명한 학교 졸업생과 대화를 하다 일본 역사를 물으니 족리시대(足利時代), 덕천시대(德川時代) 등을 얼음에 박 밀듯 좔좔 외우고, 유럽 역사도 제법 알기에 한국의 역사를 물었더니 신라, 백제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동명왕(東明王)과 온조(溫祚)가 어느 시대 임금인지 모르더라는 것이다. 단재는 이제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에 들어선다.

    자국의 서적은 수천 년 동안 국민 선조 선배의 사상 심혈이 결집한 것이라 국민의 정신도 여기서 보고 국민의 성질도 여기서 찾을 것이며, 그 밖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 등의 연혁도 이것을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니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구서는 곧 ‘민족’을 담은 책이다. 따라서 ‘민족’ 됨을 잃지 않으려면 구서를 적극 수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재는 민족주의자였다. 오늘날 ‘민족’이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구성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나는 단재처럼 열렬히 민족주의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단재의 시대에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인간 해방의 사상이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열렬한 단재의 민족주의에 찬동한다.

    단재의 구서를 수집하자는 주장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막대한 양의 구서가 해외로 거침없이 유출됐다. 아니 약탈됐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와서 구서를 수집해간 일본 서적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급히 귀가하여 여장을 차리고 있는 돈을 모두 가지고 일로 경성(京城)에 왔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인 경영의 고본옥(古本屋, 古書店)을 내리 훑었다. 촌구(村口·일본인 서적상) 씨가 착목한 것은 주로 고간당본(古刊唐本·중국에서 찍은 책)이었다. 그 가운데는 송판(宋版)의 ‘육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 있었다. 이러한 것에는 조선의 고본옥은 전혀 눈뜨지 못했는지 61책 송판을 겨우 3원 남짓으로 입수했으니 꿈같은 이야기다. 당본의 옛것은 거의 1책 6전 정도로 살 수 있었고, 조선본이 비교적 비쌌다. 촌구 씨는 이들 송판이나 원판(元版)의 귀중본을 가지고 경성을 떠나 도쿄(東京)로 돌아오니, ‘육신주문선’만으로도 천 몇백원에 팔렸고, 기타 희구본(稀購本)도 곧장 팔렸으므로 풍부한 자금을 준비해가지고 재차 도선(渡鮮)해 어느 한 서포(書鋪)의 재고품을 전부 사자고 할 정도의 배포로 흥정하였는데, 때마침 만철(滿鐵)이 그 일을 듣고는 “조선본은 만철에서 수집하고 있으니, 일절 손대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당본은 그대에게 일임하고 만철 자신도 일절 손대지 않겠다”고 타협해왔기에 응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河東鎬, ‘近代書誌攷類叢’, 탑출판사, 1987, 13~14쪽)

    조선의 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긴 일본인 서적상과 일제가 조선과 만주, 중국의 식민지배를 위해 세운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가 조선 서적의 수집 영역을 분할하고 합의하는 대목이다. 마치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한 것처럼 말이다.

    조선 서적 일본인들이 헐값에 대량 구입

    지난해 12월 나는 일본 천리대학을 방문했다. 천리대학은 일본에서 서열이 많이 낮은 대학이다. 하지만 도서관만큼은 일본 전체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규모다. 마침 인큐내뷸러(incunabula·구텐베르크 인쇄술 발명 이후 약 100년 동안 인쇄된 초기 간본들)를 전시하고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도 비록 낙장(落張)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유리장 속에 얌전히 누워 있어 내 눈은 뜻밖의 호사를 했다.

    한데 천리대학 도서관 직원의 안내와 해설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무한히 쓰라려왔다. 천리대학 도서관은 한국 고서를 많이 수장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천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학’ 아닌 ‘조선학’을 연구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수집한 책들이 모두 이 도서관의 소장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일본의 관변 학자인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등이 수집한 막대한 책도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어떤가. 단재가 살아 있어 천리대학 도서관의 한국 고서들을 보았다면 과연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은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1년 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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