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배우들 중 박광정만큼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도 없는 듯하다. 그는 내 첫 TV 연출작인 ‘블루스 하우스’(동아TV 30부작 드라마, 1996년)에 출연한 적이 있다. 연극배우 출신으로 영화와 TV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호성 선배가 어느 날 좋은 배우가 있다며 그를 내게 소개했다. 박광정은 이호성과 함께 박헌수 감독의 영화 ‘진짜 사나이’(1996년)를 찍은 바 있다. 그렇게 박광정을 처음 만난 뒤 우리는 2년여 동안 TV 영화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녹화를 끝내고 늘 식사를 같이 하면서 나는 그가 맥주를 좋아한다거나 햇빛에 맨살을 드러내는 걸 싫어한다는 등의 취향까지 알게 됐다.
박광정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달라진 결정적 계기는 그가 연출한 연극 ‘비언소’(1996년)를 본 것이다. ‘비언소’에는 당시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막 영화에 데뷔한 송강호도 출연했는데, 나는 박광정의 연출 솜씨에 깜짝 놀랐다. 그는 아주 뛰어난 연출가였다. 한정된 무대공간에서 관객들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속도감, 재기 넘치는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후 그가 연출한 ‘마술가게’ 재공연을 봤다. 그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던 하일지 원작의 ‘진술’을 강신일 주연의 모노드라마로 올렸을 때와 지난해부터 올해 2월까지 장기공연한 ‘하이 라이프’를 대학로 무대에 올렸을 때는 인터넷 카페 ‘하재봉의 영화사냥’ 회원을 모두 데리고 가서 관람하기도 했다.
15년 맛깔스런 감초 연기 … 첫 주연 신고식
김태식 감독의 데뷔작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박광정이 주연한 첫 번째 영화다. 그 이전 육상효 감독의 ‘아이언 팜’에서 주연급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작품을 책임지는 위치는 아니었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는 박광정이 나오지 않는 장면이 거의 없다. 영화는 도장공 태한(박광정 분)이 아내의 애인인 택시 운전사 중식(정보석 분)의 차를 전세내 서울 대학로 낙산에서 강원도 낙산까지 가는 로드무비 스타일이다.
비록 전국 10여 개관에서 소규모로 개봉하지만, 영화는 이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됐고 선댄스 영화제 등에 초청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해외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미국과 일본 영화사들이 리메이크를 위해 판권 계약을 맺었을 만큼 국제적 관심이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불륜을 소재로 했지만 흔한 작품은 아니다. 영화의 초점은 ‘불륜에 빠진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추적하며 질투하는 남자의 심리에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박광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92년 영화 ‘명자 아끼꼬 소냐’로 데뷔한 이후 15년 동안 영화, 연극, TV 드라마를 넘나들며 맛깔나는 감초 역으로 등장했던 박광정은 첫 주연작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자귀모’에서 명계남과 함께 귀신 역으로, ‘넘버 3’에서는 유한마담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삼류시인 랭보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는 이제 비로소 주연을 맡아 나약한 도시 소시민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구축하고 있다.
박광정이 맡은 태한이라는 역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국영화에서 벌써 출현했어야 할 캐릭터다. 태한은 아내의 애인을 만나서 주먹 한 방 날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를 함정에 빠뜨려 살해하는 것도 아니다. 밉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특히 중식을 자신의 집인 강원도 낙산까지 유인한 뒤 그가 아내와 정사를 벌이는 현장을 급습하려는 태한의 계획은 전봇대에 올라 떨면서 자신의 안방을 지켜보는 것에 그친다. 박광정은 우리들 누구나 가슴속에 갖고 있는 소심함을 극대화해 소시민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해외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이 박광정을 ‘우디 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뉴요커들의 일상을 그린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우디 앨런 감독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계 입양아 순이와 결혼한 우디 앨런도 자신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며 나약하면서 때로는 얄미운 소시민의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했다.
1962년 전남 광주 출생인 박광정은 원래 81년 대학에 입학할 때 공대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87학번으로 연극영화과에 다시 입학한다. 그의 좌우명은 ‘가늘고 길게’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몸은 무척 가늘다. 같이 방송할 때는 한여름에도 팔목이 드러나는 옷을 입지 않으려 했다.
그런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알몸 신(scene)을 무려 세 번이나 찍었다. 욕조에 두 무릎을 웅크린 채 알몸으로 앉은 태한을 카메라는 부감샷으로 잡는다. 태한은 아내의 부정을 알고 무척 외로워하는 듯했다. 그는 아내에 대한 증오보다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신분을 감추고 대학로 낙산에서 젊은 여자(조은지 분)와 함께 살고 있는 중식의 집 앞으로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막 출발하려는 그의 차에 올라타 강원도 낙산까지 가자고 한다.
강원도까지 가는 도중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국도변 강원도 계곡에서 목욕하는 장면이 있다. 중식은 우람한 알몸을 드러내며 단단한 근육을 이용해 물 위로 돌팔매질을 한다. 그러나 태한은 왜소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태한의 앙상하고 왜소한 몸은 중식의 근육질 몸매와 대비되면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에는 중식을 따돌리고 서울의 낙산으로 온 태한이 중식의 여자와 함께 발가벗고 누워 있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섹스신은 없었다. 중식의 여자 곁에서 알몸으로 웅크린 태한은 울먹거리며 “너무 고맙고… 그래서 눈물이 나네요. 복받으실 거예요”라고 말한다.
얄미운 소시민 모습 뛰어난 표현 … 해외에선 ‘우디 박’
이 장면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아내 애인의 여자와 섹스함으로써 복수를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장면은 현대 소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 기능을 갖고 있다. 산비탈을 올라 셔터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두운 방에 웅크린 여자의 살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일종의 자궁 회귀 욕망을 드러낸다. 신화적인 의미가 있는 장면인데, 상처난 짐승을 감싸안 듯 중식의 여자는 태한을 가슴에 품는다.
“내 얼굴을 크게 잡는 빅클로즈업 샷이 많아 시선 처리에 특히 신경 썼다. 대사를 많이 하거나 액션 위주의 연기가 아니라, 주로 아내의 애인을 지켜보는 장면이어서 태한의 내면이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했다.”
대중에게 박광정은 연기자일 뿐이지만 그는 대학로에서 톱클래스로 인정받는 연극연출가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영화연출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성근을 캐스팅했던 ‘진술’이 제작 단계에서 무산되고, 그 다음 준비했던 ‘당신의 가방모찌’도 제작 시작 시점에서 보류됐다. 그의 영화 연출작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좀더 인내심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
박광정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달라진 결정적 계기는 그가 연출한 연극 ‘비언소’(1996년)를 본 것이다. ‘비언소’에는 당시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막 영화에 데뷔한 송강호도 출연했는데, 나는 박광정의 연출 솜씨에 깜짝 놀랐다. 그는 아주 뛰어난 연출가였다. 한정된 무대공간에서 관객들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속도감, 재기 넘치는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후 그가 연출한 ‘마술가게’ 재공연을 봤다. 그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던 하일지 원작의 ‘진술’을 강신일 주연의 모노드라마로 올렸을 때와 지난해부터 올해 2월까지 장기공연한 ‘하이 라이프’를 대학로 무대에 올렸을 때는 인터넷 카페 ‘하재봉의 영화사냥’ 회원을 모두 데리고 가서 관람하기도 했다.
15년 맛깔스런 감초 연기 … 첫 주연 신고식
김태식 감독의 데뷔작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박광정이 주연한 첫 번째 영화다. 그 이전 육상효 감독의 ‘아이언 팜’에서 주연급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작품을 책임지는 위치는 아니었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는 박광정이 나오지 않는 장면이 거의 없다. 영화는 도장공 태한(박광정 분)이 아내의 애인인 택시 운전사 중식(정보석 분)의 차를 전세내 서울 대학로 낙산에서 강원도 낙산까지 가는 로드무비 스타일이다.
비록 전국 10여 개관에서 소규모로 개봉하지만, 영화는 이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됐고 선댄스 영화제 등에 초청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해외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미국과 일본 영화사들이 리메이크를 위해 판권 계약을 맺었을 만큼 국제적 관심이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불륜을 소재로 했지만 흔한 작품은 아니다. 영화의 초점은 ‘불륜에 빠진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추적하며 질투하는 남자의 심리에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박광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92년 영화 ‘명자 아끼꼬 소냐’로 데뷔한 이후 15년 동안 영화, 연극, TV 드라마를 넘나들며 맛깔나는 감초 역으로 등장했던 박광정은 첫 주연작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자귀모’에서 명계남과 함께 귀신 역으로, ‘넘버 3’에서는 유한마담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삼류시인 랭보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는 이제 비로소 주연을 맡아 나약한 도시 소시민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구축하고 있다.
박광정이 맡은 태한이라는 역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국영화에서 벌써 출현했어야 할 캐릭터다. 태한은 아내의 애인을 만나서 주먹 한 방 날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를 함정에 빠뜨려 살해하는 것도 아니다. 밉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특히 중식을 자신의 집인 강원도 낙산까지 유인한 뒤 그가 아내와 정사를 벌이는 현장을 급습하려는 태한의 계획은 전봇대에 올라 떨면서 자신의 안방을 지켜보는 것에 그친다. 박광정은 우리들 누구나 가슴속에 갖고 있는 소심함을 극대화해 소시민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해외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이 박광정을 ‘우디 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뉴요커들의 일상을 그린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우디 앨런 감독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계 입양아 순이와 결혼한 우디 앨런도 자신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며 나약하면서 때로는 얄미운 소시민의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했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그런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알몸 신(scene)을 무려 세 번이나 찍었다. 욕조에 두 무릎을 웅크린 채 알몸으로 앉은 태한을 카메라는 부감샷으로 잡는다. 태한은 아내의 부정을 알고 무척 외로워하는 듯했다. 그는 아내에 대한 증오보다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신분을 감추고 대학로 낙산에서 젊은 여자(조은지 분)와 함께 살고 있는 중식의 집 앞으로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막 출발하려는 그의 차에 올라타 강원도 낙산까지 가자고 한다.
강원도까지 가는 도중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국도변 강원도 계곡에서 목욕하는 장면이 있다. 중식은 우람한 알몸을 드러내며 단단한 근육을 이용해 물 위로 돌팔매질을 한다. 그러나 태한은 왜소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태한의 앙상하고 왜소한 몸은 중식의 근육질 몸매와 대비되면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에는 중식을 따돌리고 서울의 낙산으로 온 태한이 중식의 여자와 함께 발가벗고 누워 있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섹스신은 없었다. 중식의 여자 곁에서 알몸으로 웅크린 태한은 울먹거리며 “너무 고맙고… 그래서 눈물이 나네요. 복받으실 거예요”라고 말한다.
얄미운 소시민 모습 뛰어난 표현 … 해외에선 ‘우디 박’
이 장면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아내 애인의 여자와 섹스함으로써 복수를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장면은 현대 소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 기능을 갖고 있다. 산비탈을 올라 셔터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두운 방에 웅크린 여자의 살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일종의 자궁 회귀 욕망을 드러낸다. 신화적인 의미가 있는 장면인데, 상처난 짐승을 감싸안 듯 중식의 여자는 태한을 가슴에 품는다.
“내 얼굴을 크게 잡는 빅클로즈업 샷이 많아 시선 처리에 특히 신경 썼다. 대사를 많이 하거나 액션 위주의 연기가 아니라, 주로 아내의 애인을 지켜보는 장면이어서 태한의 내면이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했다.”
대중에게 박광정은 연기자일 뿐이지만 그는 대학로에서 톱클래스로 인정받는 연극연출가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영화연출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성근을 캐스팅했던 ‘진술’이 제작 단계에서 무산되고, 그 다음 준비했던 ‘당신의 가방모찌’도 제작 시작 시점에서 보류됐다. 그의 영화 연출작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좀더 인내심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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