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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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수작, 짐작… 시대상 반영한 술자리 말들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입력2025-04-0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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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술 또는 술자리에 기원을 둔 것이 많다. GettyImages

    오늘날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술 또는 술자리에 기원을 둔 것이 많다. GettyImages

    술을 마시는 행위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술이 사람들 사이 진솔한 대화의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술을 마심으로써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술자리에는 언제나 ‘말’이 함께한다. 이런 말들은 하나의 상징이 돼 단어나 관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술과 관련된 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원을 갖고 있을까.

    수작, 술자리 예절에 담긴 꿍꿍이

    ‘건배’를 뜻하는 영단어 ‘토스트(toast)’는 ‘굽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torrere’에서 유래했다. 17세기 영국에는 구운 빵 조각을 와인에 띄워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신에게 올리는 제의’로서 좋은 뜻을 담아 하늘에 바치는 행위였다. 그러다 이것이 점차 누군가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술잔을 드는 행위로 변모했다. 즉 서양에서 토스트는 건강, 성공 등 여러 가지를 신에게 부탁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건배는 북유럽 바이킹 문화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바이킹 전사들은 전투를 끝낸 뒤 적과 화친하기 위해 술을 마셨다. 하지만 서로를 100% 믿을 수는 없었다. 화친한 척하면서 상대를 암살하려 술에 독을 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을 부딪쳐 술이 섞이게 하고, 독이 없음을 증명하고자 바닥에 있는 술까지 마시는 풍습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마를 건(乾)에 잔 배(杯), 술을 마를 때까지 마신다는 한자어 표현도 여기서 나왔다.

    시점상 근현대 이전까지 한국에는 건배라는 고정된 외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술을 따르면서 특정한 말을 건넸고, 그 말에 뜻을 실었다. 이 같은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수작(酬酌)’이다. 갚을 수와 따를 작 자로, 술과 말을 주고받는 의례를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작은 술과 관련된 중요 예절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수작을 부리다’라는 표현이 파생됐다. 친하지 않고 굳이 술을 마셔야 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술을 권하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간이 수작을 받지 아니하였다” 같은 문장은 술을 받은 것과 별개로 정치적 중립 등은 지켰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따를 작 자에서는 다양한 단어가 생겨났다. 헤아릴 짐(斟)에 따를 작을 쓰는 ‘짐작’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상대와 첫 대면한 경우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내 수작을 통해 천천히 상대방의 주량을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타인의 속마음이나 처지, 상황 등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의미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짐작, 상대 주량 헤아리는 과정

    ‘작정’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술을 얼마나 따라줄지 정했다(定)는 뜻으로, 오늘날 결심이나 결정을 의미하는 작정이라는 말로 이어졌다. 법률 용어인 ‘참작’도 술과 관련이 있다. 참작에는 참여할 참(參) 자를 쓰는데, 술자리에서 누군가 실수를 할 경우 실수한 당사자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당사자의 책임을 적게 묻는 정상참작도 여기서 나왔다. 오늘날 혼술과 비슷한 조선시대 단어는 바로 ‘독작’이다. 홀로 독(獨)에 따를 작 자 그대로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문신 임상덕의 시문집 ‘노촌집(老村集)’ 권1에 독작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술자리에서 피어난 말들은 사회를 비추고 있기도 하다. 수작, 짐작, 작정, 참작 등은 조선시대 정치 상황과 관련해 사람들 간 미묘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흥청망청’이라는 표현은 왕권 타락을 풍자한다. 그리고 이런 말들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말이 거울처럼 시대상을 담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술자리에서는 항상 말을 아끼고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