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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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AI 기술력 바짝 추격하는 중국

“美 과도한 AI 규제, 중국 자립과 기술 혁신하는 역효과”

  • 이종림 과학전문기자

    입력2025-04-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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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사진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로 만든 관련 이미지. 이종림 제공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사진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로 만든 관련 이미지. 이종림 제공

    미국 정부가 중국의 첨단기술 산업을 겨냥한 규제를 또 한 번 강화했다. 미국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은 최근 총 80개 기관을 자국의 수출 통제 대상인 ‘엔티티 리스트’(Entity List·실체 목록)에 새로 추가했다고 밝혔다. 이 중 50곳 이상이 중국 기업 및 기관으로, 이번 조치의 핵심 타깃이 사실상 중국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 기업은 정부의 사전 허가 없이는 이 리스트에 오른 기관에 반도체, 소프트웨어, 장비 등을 수출할 수 없다. 실질적으로 거래가 차단되는 셈이다. 미국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인공지능(AI) 칩을 ‘전략 무기’로 간주하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성명을 통해 “수십 개의 중국 기관이 군사 목적으로 진행된 첨단 AI, 슈퍼컴퓨터, 고성능 연산 칩 개발에 연루된 혐의가 있다”며 “이를 통제하는 것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필수적 조치”라고 강조했다. 블랙리스트 지정 사유로 해당 업체가 중국의 엑사스케일 컴퓨팅(exascale computing)과 양자기술 개발에 관여하고 있으며, 이들의 기술이 군사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고 미국 국가안보에 반한다는 점을 든 것이다. 특히 AI 칩, 슈퍼컴퓨터, 양자처럼 초고속 데이터 연산이 가능한 기술은 대규모 병렬 연산, 전장 시뮬레이션, 미사일 궤적 예측 등 군사 응용 분야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중국 군사 기술 겨냥한 미국 블랙리스트

    이번 블랙리스트에는 베이징 AI 연구소, 화웨이 및 자회사 하이실리콘, 양자기술과 슈퍼컴퓨팅 분야의 중국 주요 기업 약 50곳이 포함됐다. 이 중 인스퍼(Inspur)는 세계 3위 서버 제조사이자 중국 최대 클라우드 인프라 공급업체로, 슈퍼컴퓨터 구축과 AI 클라우드 플랫폼 운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인스퍼의 대표 제품인 ‘NF5488A5’ 서버는 중국 국가슈퍼컴퓨팅센터에 공급돼 거대언어모델 훈련과 실시간 전장 시뮬레이션에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중국의 AI 기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AI가 전통 무기체계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군사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중국군의 연간 AI 프로세서 수요는 약 340만 개에 달하며, 이 중 상당수가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와 FPGA(Field-Programmable Gate Array)다. 특히 군사용 AI는 수천 개 센서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통합 처리하고, 복잡한 전투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해야 하기에 수십 페타플롭스(PFLOPS: 1페타플롭스는 초당 1000조 번의 수학 연산처리가 가능하다는 뜻)급 연산 성능을 갖춘 칩이 요구된다. 전투 드론 운용, 미사일 유도, 전장 환경 분석 등에서 ‘지휘관의 두뇌’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중국 상무부는 이번 미국의 규제에 대해 “글로벌 공급망과 산업체계의 안정성을 저해하고 국제 경제 및 무역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반발했다. 미국은 2022년부터 AI 반도체와 첨단기술 수출을 통제했다. 미국은 엔비디아의 A100, H100 등 고성능 GPU의 수출 제한을 시작으로 EDA(전자설계자동화) 소프트웨어, 반도체 장비 등으로 규제 범위를 넓혀왔다.

    이번 추가 제재로 미·중 패권 경쟁의 중심이 AI, 슈퍼컴퓨팅, 양자 등 미래 기술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중국은 기술 자립을 위한 투자와 독자 생태계 구축에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초크포인트’(choke point·조임목) 전략이 오히려 중국의 자립과 기술 혁신을 가속화하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전략 연구소 우드로윌슨센터는 “미국의 AI 전략은 방어에 치중돼 있어 공격 면에서는 부족하다”며 “과도한 규제는 오히려 중국에 효율적이고 저렴한 AI 기술을 개발해 신흥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화웨이, SMIC, 인스퍼 등 중국 주요 기업은 미국산 장비 없이 칩을 설계하고 제조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고, 중국 정부는 여기에 수십조 위안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에 GPU 및 AI 칩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오고 있다. 화웨이는 고성능 AI 프로세서 ‘어센드(Ascend) 910B’와 ‘어센드 910C’를 출시했으며, 바이두 역시 ‘쿤룬(Kunlun)’ 시리즈 상용화에 성공했다. 아직 엔비디아급 성능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기술 자립 속도와 진척 수준은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흔들리는 미국 기술 패권

    AI 칩은 미·중 패권 경쟁의 중심축으로 부상해 기술 질서와 산업 생태계 구조를 재편하는 ‘핵심 노드’로 작용하고 있다. 수출 통제가 장기화할 경우 엔비디아, AMD, ASML 등 서방 반도체 기업은 매출 감소와 공급망 불안이라는 부메랑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금융, 방위산업, 클라우드 인프라 등 AI 칩 의존도가 높은 산업 전반이 글로벌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

    현재까지 미국은 AI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격차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다. 미국 전략기술 분석기관 고비니(Govini)의 ‘2024 국가안보 점수표’에 따르면 중국은 2021년 AI 및 머신러닝 분야 특허 수에서 미국을 앞섰고 2023년에는 미국의 2배를 넘어섰다. 또 미국 스탠퍼드대의 ‘2024년 AI 인덱스 보고서’는 중국이 2023년 전 세계 AI 연구 논문 중 상위 1% 인용 비중에서 미국을 추월했다고 밝혔다. 질적 수준에서도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앤드루 로고이스키 영국 서리대 인간 중심 AI 연구소장은 ‘글로벌파이낸스’를 통해 “현재는 AI 기술력에서 미국이 앞서 있지만 이 격차가 영구적이지는 않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