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 공동연구진 ‘큐빅 킬로미터 중성미자 망원경(KM3NeT)’의 탐지 구조를 묘사한 개념도. KM3NeT
AI, 중성미자의 흔적을 읽다
2월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국제 공동연구진인 ‘큐빅 킬로미터 중성미자 망원경(KM3NeT)’이 약 220PeV(페타전자볼트)에 달하는 초고에너지 중성미자를 탐지했다. 1페타는 10의 15승이며, 전자볼트란 전자 1개가 1V 전압을 받아 가질 수 있는 에너지량을 가리킨다. 이는 지금까지 관측된 중성미자 가운데 가장 큰 에너지로, 중성미자가 우주에서 극한의 에너지를 띠고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입증한 첫 사례다.연구진은 포착된 중성미자의 에너지와 입사 경로를 역추적한 끝에 이 입자가 지구 대기권이 아닌, 수십억 광년 떨어진 천체에서 기원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는 초신성, 블랙홀, 감마선 폭발 등 우주의 극한 현상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단서다.
이번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분석 과정에 머신러닝 기반의 알고리즘이 핵심적으로 활용됐다는 사실이다. KM3NeT의 기술 보고서에 따르면
5700만 개 넘는 방대한 신호 가운데 중성미자의 희귀한 패턴을 식별하고자 체렌코프 광의 시간 및 공간 분포, 에너지 강도 패턴을 분석하는 CNN(합성곱 신경망) 등 기법이 활용됐다. 이러한 알고리즘은 수많은 배경 신호 속에서 중성미자 특유의 미세한 흔적을 효과적으로 가려내는 데 기여했다.
KM3NeT 부대변인이자 이탈리아 국립 핵물리학 연구소(INFN) 연구원인 로사 코닐리오네는 “중성미자는 전하도 없고 질량도 거의 없으며 물질과 약하게만 상호작용하는 가장 신비로운 기본 입자 중 하나”라면서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 탐험할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우주 메신저”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별과 은하는 전체 우주 구성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가시적인 물질은 약 5%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95%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물질(27%)과 암흑에너지(68%)로 채워져 있다. 인류는 오랫동안 이 ‘보이지 않는 우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으며, 그 열쇠로 주목받는 입자가 바로 중성미자다. 하지만 중성미자는 그 특성상 탐지 자체가 쉽지 않다. 과학자들이 중성미자에 ‘유령 입자’라는 별명을 붙인 이유도 여기 있다.
유럽 CERN, AI 기술 적극 도입
최근 중성미자 연구에도 AI가 도입되면서 연구 방식이 재정의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남극 아이스큐브(IceCube) 관측소에서는 CNN을 활용한 머신러닝 기법을 도입해 중성미자 신호 탐지 효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는 기존 방식으로 약 75년 걸릴 분량의 데이터를 단기간에 처리한 성과로, 관측의 실험적 한계와 분석 속도를 동시에 극복했다.머신러닝으로 중성미자 플레이버(flavor)의 급격한 변환을 정밀하게 식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ANL), 독일 막스플랑크 천체물리학연구소(MPA) 등 국제 공동연구진이 수행한 이 연구는 신경망 모델이 중성미자의 밀도·에너지·방향 등 여러 변수 속에서 변환 신호를 성공적으로 식별해냈다.
또한 AI는 중성미자의 질량처럼 실험적으로 측정이 까다로운 기본 물리량을 정밀하게 추정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독일 KATRIN(Karlsruhe Tritium Neutrino) 실험팀은 머신러닝 기법을 활용해 중성미자의 질량 상한값을 0.45eV(전자볼트)로 좁히는 데 성공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약한 핵력과도 상호작용하지 않는 가상의 제4형 중성미자, 이른바 ‘스테라일(sterile) 중성미자’의 존재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트랜스포머 기반의 실시간 분석 시스템, 초해상도 재구성 기법, 양자 머신러닝 등 최신 AI 기술은 중성미자 연구 전반을 새롭게 재편했다.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역시 이 흐름에 발맞춰 AI 기반 실험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MicroBooNE, T2K 등 이미 가동 중인 국제 공동 실험에서는 CNN 분류 모델이 중성미자 이벤트 식별에 실질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독일 TRISTAN, 미국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가 주도하는 DUNE(Deep Underground Neutrino Experiment), 일본 하이퍼카미오칸데 등 향후 1~2년 새 가동될 차세대 실험들은 탐지부터 해석까지 AI 기반 환경을 전제로 구축되고 있으며, 한국 KNO(Korea Neutrino Observatory)와 예미랩(Yemi Lab) 역시 향후 설계 및 국제 협력 과정에서 AI 기술의 적극적인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소우자냐 골라핀니 LANL 선임연구원은 온라인 과학 매체 ‘이노베이션 뉴스 네트워크(Innovation News Network)’를 통해 “AI는 중성미자 천문학을 다중신호 시대로 이끌고 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