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외진 곳에 동도와 서도 및 작은 섬들로 이뤄져 있다. 둘레의 바다를 고려해도 그곳의 실질적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적어도 한국과 일본이 주기적으로 다툴 만큼 크지는 않다. 그러나 ‘독도 문제’는 엄청나게 크다. 그것은 두 나라의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가 되었고, 두 나라 시민의 삶에 여러 모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독도 문제를 독도 자체의 크기만한 문제로 돌려놓아야 한다. 사안이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든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미 커진 문제를 그냥 두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독도 문제를 작게 돌려놓으려면, 두 나라 시민들은 먼저 분쟁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까닭부터 살펴야 한다. 이런 성찰은 너른 맥락에서 차분히 이뤄져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두 나라의 상황은 그런 성찰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낳은 것은 두 나라에 가득한 민족주의이고, 바로 그것이 독도 문제를 키웠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원래 근대 유럽문명의 산물로, 나폴레옹전쟁 뒤 주로 독일 지식인들에 의해 다듬어졌다. 반어적으로, 민족주의는 19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침략을 받은 지역들에서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그것은 유럽문명의 가장 성공적인 수출품으로, 과학적 방법론이나 기독교보다도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민족주의의 근본적 특질 하나는 보편성의 폄하와 특수성의 신성화다. 나폴레옹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한 세기 반 동안 독일 사람들이 시범한 것처럼,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과 나라가 다른 민족들이나 나라들보다 우수하고, 그 우수성은 오직 자신들만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민족주의는 사람들이 육체적, 문화적 유산을 대부분 공유하고 민족들이나 나라들 사이의 차이는 아주 작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그렇게 자기 민족과 나라를 앞세우다 보니, 민족적 자존심이 시민들의 중심적 가치가 됐다. 민족적 자존을 훼손하는 일은 아무리 작아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 나쁜 것은, 민족주의자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손쉽게 늘리려는 정치가들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집단도 민족주의를 거스르기 어려우므로, 민족주의를 부추겨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연히 정치가들은 늘 민족주의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정치적 기반이 약할수록 이런 유혹은 커진다.
독도가 작고, 독도 문제도 작다는 사실 깨달아야
민족주의의 정치적 이용이 유난히 해로운 것은 그것이 ‘지적 증오(intellectual hatred)’를 키운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증오를 추상화하고 이론적 토대를 부여해 지적으로 만든다. 그런 증오는 실질적 피해와 관련 없이 증폭되고, 애초에 증오를 유발한 요인이 사라져도 그대로 남는다.
걱정스럽게도 지금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중국, 일본, 한국, 북한, 그리고 대만-에서 집권한 정치가들은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 그래서 모두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추겨 정권을 정당화하거나 정치적 자산을 늘리려고 한다.
우리 한국 시민들과 일본 시민들은 정치적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을 제지해야 한다. 우리는 독도가 작고, 독도 문제도 실은 작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래 작은 문제도 한번 커지면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다. 민족주의적 감정이 개입된 문제는 특히 그렇다. 그래서 독도 문제는 예측 가능한 미래에 양쪽이 만족할 만한 형태로 해결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치 지도자들의 선동에 현명하게 대처한다면, 큰 불편 없이 그것을 안은 채 협력의 풍요로운 열매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독도 문제를 독도 자체의 크기만한 문제로 돌려놓아야 한다. 사안이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든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미 커진 문제를 그냥 두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독도 문제를 작게 돌려놓으려면, 두 나라 시민들은 먼저 분쟁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까닭부터 살펴야 한다. 이런 성찰은 너른 맥락에서 차분히 이뤄져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두 나라의 상황은 그런 성찰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낳은 것은 두 나라에 가득한 민족주의이고, 바로 그것이 독도 문제를 키웠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원래 근대 유럽문명의 산물로, 나폴레옹전쟁 뒤 주로 독일 지식인들에 의해 다듬어졌다. 반어적으로, 민족주의는 19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침략을 받은 지역들에서 열렬히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그것은 유럽문명의 가장 성공적인 수출품으로, 과학적 방법론이나 기독교보다도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민족주의의 근본적 특질 하나는 보편성의 폄하와 특수성의 신성화다. 나폴레옹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한 세기 반 동안 독일 사람들이 시범한 것처럼,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과 나라가 다른 민족들이나 나라들보다 우수하고, 그 우수성은 오직 자신들만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민족주의는 사람들이 육체적, 문화적 유산을 대부분 공유하고 민족들이나 나라들 사이의 차이는 아주 작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그렇게 자기 민족과 나라를 앞세우다 보니, 민족적 자존심이 시민들의 중심적 가치가 됐다. 민족적 자존을 훼손하는 일은 아무리 작아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며,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 나쁜 것은, 민족주의자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손쉽게 늘리려는 정치가들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집단도 민족주의를 거스르기 어려우므로, 민족주의를 부추겨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연히 정치가들은 늘 민족주의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정치적 기반이 약할수록 이런 유혹은 커진다.
독도가 작고, 독도 문제도 작다는 사실 깨달아야
민족주의의 정치적 이용이 유난히 해로운 것은 그것이 ‘지적 증오(intellectual hatred)’를 키운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증오를 추상화하고 이론적 토대를 부여해 지적으로 만든다. 그런 증오는 실질적 피해와 관련 없이 증폭되고, 애초에 증오를 유발한 요인이 사라져도 그대로 남는다.
걱정스럽게도 지금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중국, 일본, 한국, 북한, 그리고 대만-에서 집권한 정치가들은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 그래서 모두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추겨 정권을 정당화하거나 정치적 자산을 늘리려고 한다.
우리 한국 시민들과 일본 시민들은 정치적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을 제지해야 한다. 우리는 독도가 작고, 독도 문제도 실은 작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래 작은 문제도 한번 커지면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다. 민족주의적 감정이 개입된 문제는 특히 그렇다. 그래서 독도 문제는 예측 가능한 미래에 양쪽이 만족할 만한 형태로 해결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치 지도자들의 선동에 현명하게 대처한다면, 큰 불편 없이 그것을 안은 채 협력의 풍요로운 열매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