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은 왕실 자손의 출생 과정에서 나온 태(태반, 탯줄 등)를 영원히 보존하게 해놓은 석물을 가리킨다. 조선 왕실은 전국 각지 풍수적 명당 가운데 태봉(胎峯)을 선정한 후 일정한 의식인 장태(藏胎) 의례를 거쳐 태실을 조성했다. 태실은 보통 받침돌, 태를 넣은 둥근 몸돌, 지붕돌로 이뤄진다. 이렇게 조성된 태실 일대는 일반인 접근이 어려운 금단의 영역이었다.
경북 성주군 세종대왕자 태실. 세종대왕 후손인 18명의 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 1기를 합쳐 모두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안영배 제공]
국가 차원에서 관리한 태실
현재까지 조선 왕실이 전국 곳곳에 세운 태실은 확인된 것만 180여 기에 이른다. 이 중 경북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 태실(사적 제444호)을 대표적 태실로 꼽을 수 있다. 선석산 자락 태봉 정상인 이곳에는 세종대왕의 왕자 18명과 손자 단종(단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로 이전) 등 총 19기의 태실이 조성돼 있다. 세종대왕은 풍수지리에 따라 이곳을 선택했다. 실제로 이곳은 명당 길지에 해당한다. 선석산에서 태봉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 줄기 맥이 마치 산모와 태아를 이어주는 탯줄을 연상케 하며, 태실이 자리한 태봉은 산모 자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태실 유물들은 서삼릉(희릉, 효릉, 예릉) 경내로 옮겨졌다. 일제 총독부가 1920년대 말 태실의 훼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전국에 있는 조선 왕의 태 22개와 세자, 대군, 공주의 태 32개 등 총 54개를 서삼릉 태실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옮겨진 태실은 원래의 입지 공간과 괴리됐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선 왕실은 왜 신생아의 태를 명당 터에 묻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할 정도로 집착했을까. 바로 고려 때 국가 공인 풍수 교과서로 사용된 ‘태장경(胎藏經)’의 가르침 때문이다.
“현명하고 우둔함(賢愚), 잘 될지와 못 될지(盛衰)가 모두 태에 달려 있으므로 신중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태장경’은 태를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신생아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이는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태를 길한 곳에 묻으면 이에 감응한 태주(胎主: 태의 당사자) 역시 좋은 기운을 누릴 수 있다는 동기감응(同氣感應) 원리에 따른 것이다.
‘태장경’은 무엇보다도 태를 명당 길지에 묻어서 보관하면 태주의 무병장수를 보장한다고 봤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가 국운과 관련 있다며 더욱 소중하게 다뤘다. 왕손의 건강은 왕조의 흥망성쇠와도 직결되는 것이기에 출생 때부터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더 좋은 명당을 찾아 태실을 이장하기도 했다. 태주가 임금으로 즉위할 경우 세자나 왕자 시절에 묻었던 태를 꺼내 이장하는 것을 아예 예법으로 정해놓았다. 14대 임금 선조(1552~1608)가 대표적 사례다. 선조는 세 차례에 걸쳐 명당 길지를 물색한 끝에 충청 부여 땅에 자신의 태를 이장하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조선 왕실뿐 아니다. 사대부 사회에서도 태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뤘다. 태를 불에 태우거나 잘 말린 뒤 태항아리에 넣어 묻는 식이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집 마당 혹은 정원 나무 밑에 고이 묻어두거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강물에 흘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모두 탯줄을 신성시하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또 명당 터에 태가 있으면 남아의 경우 총명해서 학문을 잘 닦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고, 여아는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며 뭇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다는 ‘태장경’ 문구를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서울 서초구 우면동 월산대군 이정(성종의 형) 태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원 위치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태실이다. [안영배 제공]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장태 문화
사실 신생아의 태를 중요시하는 전통은 한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태를 처리하는 장태 문화는 전 세계에서 발견된다. 일본에서는 태반을 삼나무로 만든 관통에 넣은 다음 음양사가 지정하는 집터의 한쪽 구석에 7자 깊이 구덩이를 파서 묻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아들이라면 붓과 묵을, 딸이라면 실과 바늘을 함께 묻는데 태와 태주가 무형의 기운으로 연결돼 있다는 믿음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장태 문화는 전 세계 총 179개 문화집단 중 109개 집단에서 발견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현상이다. 이를테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태반을 미라로 처리한 후 특별한 꾸러미에 싸서 보관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태반 꾸러미는 ‘생명의 꾸러미’로 불리면서 파라오 권력을 상징했다고 한다. 또 인도네시아 셀레베스섬 주민들은 태를 신생아의 형제나 자매로 여겨 의례적 절차에 따라 처리한 후 땅에 묻는 풍습이 있다. 중남미 섬 국가 아이티에서도 적이나 주술사가 산모와 신생아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는 흑주술 용도로 태반을 사용할 것을 우려해 아무도 모르게 매장하는 풍습이 전해진다. 이런 행위는 태와 태주가 영적이나 육체적으로 깊이 연계된다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한국 고유의 태실 풍수
경북 영천 인종대왕 태실. 조선 왕실의 안태 의식을 잘 보여주는 보물급 문화재다. [안영배 제공]
한국 고유의 태실 풍습은 역사적·문화적으로 기념할 만한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풍수학을 연구하는 필자는 태와 태주가 무형의 기운으로 연결돼 있음을 인정하는 쪽이다. 따라서 산모가 출산 후 병원에서 받아 오는 탯줄을 소중히 다룰 것을 권한다. 조선 왕실처럼 거창한 절차를 거쳐 태실을 설치하라는 게 아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의료용으로 쓰이는 산모 태반을 통째로 내주지도 않거니와, 태실을 설치할 만한 장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신생아 배꼽에 달려 있던 손가락 크기만 한 탯줄이나마 아이 미래를 위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태장경’의 말대로라면 명당에 태를 묻은 아이는 성장할 때부터 남다른 경쟁력을 가지는 셈이 아닌가. 굳이 탯줄 풍수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산부인과 병원이 아이의 고향이 된다는 현실은 정서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탯줄을 묻는 장소로는 부모가 태어난 고향의 선산도 좋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산이나 명소도 괜찮다. 아이가 자라면서 정서적 뒷배가 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는 얘기다. 이때 태실이나 봉분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손바닥만 한 항아리나 도자기에 탯줄을 넣어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라서 자연을 훼손할 일도 없다. 물론 태를 묻는 곳이 명혈(明穴)과 길지(吉地)이면 금상첨화지만, 자연의 땅과 합일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아이가 비록 병원에서 태어났더라도 자랐을 때 “너의 태는 ◯◯산에 묻혀 있으니, 너는 ◯◯산 정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당사자가 자부심과 함께 자연에 강한 유대 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를 풍수 경쟁력이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