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서울 도심에서 시민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애를 먹고 있다.[뉴시스]
“앱 통한 택시 공급량 자체가 줄어들 수도”
택시 목적지 미표시 의무화는 ‘택시 대란’을 겪은 소비자 입장에선 일견 쌍수 들고 환영할 내용으로 보인다. 주요 택시단체들도 ‘공정한 배차’ ‘고객 편의’를 이유로 목적지 미표시에 찬성하고 있다. 박권수 전국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회장은 4월 19일 기자와 통화에서 “목적지 미표시 방식은 공정한 배차와 택시 이용자인 국민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면서 “이는 택시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다만 택시 시장의 생리를 살펴보면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소비자 편의를 높이자는 법안 취지와 달리, 자칫 ‘배회영업’(거리에서 직접 손님을 찾아 태우는 것)이 늘어날 가능성이 적잖기 때문이다. 택시기사가 승객의 목적지를 확인할 수 없을 경우 ‘깜깜이 운행’을 꺼리는 기사들이 아예 애플리케이션(앱)을 끄고 직접 손님을 찾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커진 앱 호출에 의존할 유인이 적어지면 수요가 많은 ‘피크 타임’일수록 배회영업 유인은 커진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국토부)가 “목적지 미표시를 전면 실시할 경우 기사의 배회영업 의존도가 높아져 앱을 통한 택시 공급량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면서 단계적 도입을 주장하고 나선 이유도 여기 있다. 국토부 측은 목적지 미표시 의무화를 별도 수수료가 붙는 ‘유료 호출’에만 우선 적용하자는 입장이다. 일선 택시기사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점진적, 단계적으로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목적지 미표시 전면 도입을 주장하는 여야 의원들은 법안소위에서 “앱이 있는데 왜 배회영업을 하느냐” “앱을 끄면 시장에서 도태되는 거 아니냐”며 의문을 나타냈다. 박권수 회장도 “배회영업을 한다 해도 손님이 타기 전 목적지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원칙적으로 목적지를 표시하지 않되 부득이한 경우 지자체 조례 등을 통해 예외를 허용하면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관건은 실제로 택시를 운행하는 기사들이 목적지 미표시에 어떻게 대응할지다. 일선 택시기사들의 생각은 어떨까. 6년 차 법인택시기사인 서 모 씨(45)는 “목적지가 가려진 채 콜이 떨어지면 퇴근이나 교대 전 1~2시간 동안은 콜을 잡기 어려울 것 같다”면서 “결국 콜을 끄고 ‘길빵’(배회영업을 뜻하는 업계 속어)을 할 수밖에 없는데, 손님에게 목적지를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차라리 택시를 접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8년 차 한 개인택시기사는 “(목적지 미표시 의무화 법안은) 카카오모빌리티가 망하라고 추진하는 법처럼 보이는데, 기사 입장에선 당장 영업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된다”며 “바쁜 시간대에 여러 콜이 동시에 오는데, 어차피 목적지를 확인할 수 없다면 차라리 시장점유율이 제일 높은 카카오T만 켜놓고 나머진 끌 것 같다”고 말했다. “기사들의 스트레스만 늘어날 뿐, 플랫폼을 견제하겠다는 목적을 이루긴 어려울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 다른 50대 법인택시기사는 “지난해 택시 대란이 한창일 때 오후 10시쯤 되면 플랫폼 앱을 전부 끄고 (서울) 강남역이나 광화문 일대에서 손님을 골라 태웠다”면서 “장거리 손님인지, 단거리 손님인지 알 수 없는 목적지 미표시 콜을 잡을 이유가 솔직히 없다”고 말했다.
목적지 미표시 도입했다 실패한 전례도
서울 중구 서울역 앞에서 시민들이 택시를 잡고 있다.[동아DB]
택시단체 사이에서 입장차도 감지된다. 서울개인택시조합은 ‘목적지 표시에 대한 의견서’를 통해 “목적지 표시와 콜 골라 잡기가 곧 택시정책에 위배되는 것이 아님에도 법으로 원천 차단할 경우 기사와 승객 모두의 편의를 저하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다”면서 “호출수수료를 지급하는 경우 목적지를 미표시하고, 지급하지 않는 경우 표시케 하는 등 정책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 택시단체 관계자는 “목적지 미표시 의무화의 취지에는 큰 틀에서 공감한다”면서도 “목적지를 미표시할 경우 택시기사 대부분이 플랫폼을 끄고 배회영업 방식으로 돌아설 여지가 크다. 승객 편의를 높이기 위해 만든 법안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골라 태우기’는 서울을 중심으로, 그것도 특정 시간대에 주로 발생하는데, 목적지 미표시를 플랫폼 중개사업자에 의무화하는 것은 과도한 듯하다”고도 말했다.
플랫폼 산업 전문가 사이에선 과도한 규제가 미래 모빌리티 산업 발전을 지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반적인 교통 플랫폼의 사용률이 저하되면 국가 차원에서 교통 빅데이터 축적이 더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율주행,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시대를 준비하는 혁신 기업의 데이터 축적 및 분석이 어려워져 모빌리티 산업 발전이 위축될 수도 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일부 택시기사의 ‘골라 태우기’를 막아 승객 편의를 높이는 데 목적지 미표시 의무화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다양한 플랫폼 도입으로 공급 확대해야”
“목적지 미표시 의무화는 택시기사에게 눈을 가린 상태로 영업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칫 서울 도심이 아닌 외곽지역에서 대다수 승객이 택시 잡기가 더 힘들어지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택시 시장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수요-공급의 불균형을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오진(誤診)에 이은 오처방(誤處方)이라고 본다. 미봉책에 불과한 규제보다는 다양한 모빌리티 플랫폼 도입을 통한 공급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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