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한국어는 명확성을 강점으로 하지만, 다의성을 잘 살리지 못해 서양철학이나 문학을 번역할 때 원의미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GETTYIMAGES]
중국어나 일본어는 다의성을 살리는 데 비교적 유리하다. 중국어에서 로고스는 ‘道(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길’뿐 아니라 ‘우주의 질서’나 ‘철학적 진리’를 상징하는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어로는 로고스를 ‘言葉(ことば)’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원어 그대로인 ‘ロゴス’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어는 한자와 가나, 외래어를 혼용할 수 있는 만큼 언어적 유연성을 발휘해 번역 과정에서도 다의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한국어는 다의적 표현보다 감성과 간결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로고스를 이성이나 논리로 번역하면 한국어 특유의 직관적이고 간결한 언어적 장점은 살릴 수 있지만, 본래의 풍부한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서양철학은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종종 단순화된다”는 비판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번역의 난제는 현대 철학에서도 두드러진다. 발터 베냐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를 살펴보자. 독일어 ‘Gewalt’는 폭력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넘어 권위, 힘, 지배라는 의미까지 포괄한다. 베냐민은 단어가 가진 다의성을 절묘하게 활용해 법과 폭력의 관계를 해부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폭력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법 창조적 폭력(rechtsetzende Gewalt)’이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처럼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혁명적 힘이다. 다른 하나는 ‘법 유지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이다. 경찰이나 군대가 행사하는, 기존 질서를 지키는 강제력이 여기에 포함된다.
흥미로운 점은 두 폭력이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혁명으로 세워진 새 질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필요로 한다. 경찰의 폭력 역시 법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법과 폭력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권력 구조를 창조한다. 국제정치를 보면 이 말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베냐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적 폭력(Divine Violenc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법적 폭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신적 폭력은 기존 모든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며 진정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혁명적 가능성을 연다. 마치 ‘메시아적 순간’처럼 이 폭력은 모든 억압적 질서를 초월한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폭력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다소 어색하다.
번역=아르테 포베라
이탈리아 조각가 피노 파스칼리는 아르테 포베라를 대표하는 작가다. 이탈리아 밀라노 폰다지오네 프라다에 전시된 파스칼리의 작품들. [김재준 제공]
결국 한국어는 명확성을 강점으로 하지만, 다의성을 잘 살리지 못해 서양철학이나 문학을 번역할 때 원의미를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다. 반대로 중국어는 다의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지만, 논리적 명료성이 약화될 위험이 있다. 번역자는 이러한 언어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좋은 번역자는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번역자는 문화적·철학적 뉘앙스를 재구성하는 창조적 해석을 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의 틈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아르테 포베라처럼 번역 역시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본질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아닐까. 결국 번역이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옮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