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를 열고 있다. [동아DB]
결혼자본의 변신
이번에는 사회학자 눈으로 본 한국 사회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한국 사회에서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정치 집회에서 힘찬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놀랍게도 2030 여성이다. 외국의 경우 나이 든 중산층이 공연장에 많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여성이 문화적·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배경에는 조기 예술교육과 문화자본이라는 키워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 예술교육은 유독 여자아이에게 집중됐다. 많은 여자아이가 피아노와 발레를 배우고 미술학원에 다녔다. 예술교육은 부모에게 “딸을 잘 키웠다”는 자부심이 됐고, 결혼할 때 ‘교양 있는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문화적 소양이 미래를 위한 ‘결혼자본’의 일부로 작동한 것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을 빌리자면 예술교육은 단순 취미를 넘어서는, 특정 계층과 교양을 상징하는 자산이었다. 관련 논의는 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의 논문에 잘 정리돼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예술교육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문화적 자산을 결혼시장에 내놓는 것 이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여성들에게 결혼의 중요성은 예전 같지 않다. 문화자본은 여성이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고,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어린 시절 예술을 배우고 문화적 감각을 익힌 여성은 자연스럽게 공연장 등 문화공간으로 향했다. 뮤지컬, 클래식 공연, K팝 콘서트, 미술 전시의 관객은 대부분 2030 여성이다. 그들은 문화를 소비하는 동시에 문화 흐름을 만드는 주체가 됐다. 그동안 여성을 수동적 존재를 만들기 위해 작용했던 교양과 문화가 오히려 그들을 능동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문화 공간을 가득 채운 여성들은 문화를 즐기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며 그 자체로 한국 문화산업의 중심축이 됐다. 오늘날 그들은 관객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단순 소비자에서 주체적 참여자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의 에너지가 문화 소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자본을 축적한 여성들은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문화 체험과 예술교육을 통해 키운 섬세한 감수성은 정치적·사회적 이슈에서 날카로운 감시와 저항의 에너지로 변모했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여성 인권운동, 젠더 이슈 집회에서 2030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최근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정치·사회 변화의 최전선에 섰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정보를 공유하고 굿즈와 간식을 나누며 응원봉을 흔들면서 소녀시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K팝 팬덤이 집회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회학자 언어로 표현하자면 결혼자본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주어졌던 문화적 교양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공연장에서 문화를 즐기고 광장에서 변화를 외치는 젊은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을 상징한다. 이들은 더는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한국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가 된 것도 여성들의 합리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 정책은 시작부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젊은 여성들은 보조금 몇 푼에 움직이지 않는다.
여성들이 쌓은 문화자본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공연장은 물론, 광장에서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체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이 흐름은 단순히 시대 트렌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