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의 소셜 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1세기 실학운동’을 자처하는 희망제작소는 시민의 아이디어를 접수받아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작은’ 정책들을 만들고자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창안운동’은 꽤나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희망제작소는 정식으로 문을 열기 전 국가청렴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과 회의를 했다. 사회창안이라는 개념을 낯설어한 시민들이 희망제작소 게시판에 각종 민원을 쏟아내면 이들 기관에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시민들은 평소 생활 속에서 생각했던 각종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문을 연 지 4개월이 채 안 됐지만 벌써 320여 개의 시민 아이디어가 모였다. 쏟아져 들어온 시민 아이디어는 복지, 생태, 교통, 교육, 여성, 공공 등 분야도 매우 다양하다.
복지, 생태 등 다양한 분야서 제안 쏟아져
희망제작소, 보건복지부, 건설교통부, 여성가족부, 대한산부인과학회, 서울YWCA가 힘을 합쳐 진행하고 있는 ‘임산부 배려 캠페인’은 희망제작소로 날아온 시민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네 살배기 아이를 둔 조혜원(36) 씨는 힘들었던 임신 초기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초기 임부(姙婦)에게 핑크리본, 아기발바닥 배지 등을 달게 해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을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희망제작소 게시판에 올렸다. 희망제작소는 이 아이디어를 첫 번째 사업으로 선정, ‘숙성 작업’에 돌입했다. 정부와 공동으로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고, 과천 공무원들이 서울 안국동에 있는 희망제작소 사무실로 찾아와 머리를 맞댔다. 캠페인단은 임부임을 나타낼 상징물로 적합한 디자인을 현재 공모 중이다. 상징물이 결정되면 대한산부인과학회를 통해 전국의 산부인과에서 임부들에게 배포할 예정이다. 아이디어 창안자 조 씨는 “희망제작소에 내놓기 전까지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인데, 정부와 민간단체가 하나씩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어서 무척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희망제작소에는 시민 누구나 아이디어를 게재할 수 있다. ‘비회원’도 가능하다. 실시간으로 등록되는 아이디어는 ‘신선한 아이디어’로 불린다. 이 중 일부 아이디어는 1차 선별단계를 거쳐 ‘주목할 아이디어’로 채택되고, 희망제작소의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들은 그에 대한 기초 조사에 들어간다. 과거에도 제기된 문제인가, 해외 사례는 있는가, 이 문제를 다룬 논문이 있는가 등을 조사하는 것. 그리고 다시 필요성과 실현 가능성이 높은 아이디어를 ‘참좋은 아이디어’로 선별한다. 참좋은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전문가 인터뷰 등 좀더 심층적인 조사가 이뤄진다. 현재 희망제작소에는 39개의 주목할 아이디어와 13개의 참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임부 배려 캠페인’ 숙성 작업에 돌입
‘임산부 배려 캠페인’ 이외에도 ‘현실화 단계’를 밟고 있는 아이디어가 몇 개 더 있다. ‘새로운 디자인의 전기고지서’ 아이디어도 그중 하나. 전기고지서에 수력, 화력, 원자력 등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원의 종류와 비율을 명기해 시민들의 환경 의식을 높이자는 취지다. 이 아이디어의 창안자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 희망제작소는 이 아이디어를 들고 한국전력을 방문했다. 한국전력은 “전기고지서 도안을 바꿀 시점이 되면 희망제작소의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참좋은 아이디어로 뽑혔지만 아쉽게도 현실화하지 못한 것도 있다. 김종민 씨가 제안한 ‘일수벌금제’가 그랬다. 일수벌금제란 소득에 비례해 교통범칙금 등을 내는 제도.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노키아 최고위 간부 안시 반요키가 오토바이 과속운전으로 벌금 10만3600달러(약 9800만원)를 내 국제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의 문병원 센터장은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일수벌금제 도입을 논의한 적 있는데, 고소득자의 실제 소득 규모가 제대로 파악되어 있지 않아 일수벌금제가 오히려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희망제작소에서도 아직 우리 사회에 도입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희망제작소에 모인 시민 아이디어들은 기발하고도 실용적인 것들이 많다. 잠자는 쿠폰으로 불우이웃을 돕자, 이동식 어린이방을 만들자, 수요일에는 밤 10시까지 공공도서관 문을 열자 등등이 ‘숙성 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골수 회원’도 늘어나고 있다. ‘깔깔마녀’ ‘ak’ 등 주목할 아이디어를 여러 개 석권한 회원이 생겨나고 있는 것. 문 센터장은 “전체 회원 7000여 명 중 20~30명이 활발하게 여러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삶의 현장에 대안이 있고 지혜가 있다는 애초의 생각이 맞았다고 봅니다. 시민의 아이디어 창안 수준이 굉장히 높거든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항상 ‘이렇게는 안 된다’는 네거티브 논의만 이뤄져왔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하자’는 포지티브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사회창안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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