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면
30여 년 전 남쪽 바닷가 내 고향에는 냉면집이 딱 하나 있었다. 상호가 ‘함흥 어쩌구’였는데 질긴 감자면에 맑은 육수를 부어 냈다. 메밀면으로 만든 냉면을 맛본 것은 서울 올라와서의 일이다.
그렇다면 저 남녘에서는 북한식 냉면이 유입되기 전까지 냉면을 먹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시원한 육수에 밀국수를 말아 먹었다. 식당에서 먹은 기억은 없고 어머니가 해준 밀국수 냉면은 기억하고 있다. 멸치로 육수를 내고 열무김치와 달걀 지단, 무채, 파 따위로 고명을 올렸다.
쫄깃한 면과 시원한 해물육수 … 최근 들어 전문점 늘어
밀국수 냉면은 우리 집에서만 해먹던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경남지방에서 시작해 최근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가야밀면’이 밀국수 냉면이다. 해물로 육수를 내고 건면에서 생면으로 바뀌긴 했지만 밀국수를 마는 것은 똑같다.
그런데 대중매체는 이 밀면을 소개하면서 평양냉면이 남녘으로 건너와 변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이는 잘못된 얘기다. 밀면은 평양냉면과는 맛의 포인트가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평양냉면은 육수와 면의 조화로운 향을 중시하는 음식인 데 비해, 밀면은 쫄깃한 면의 식감과 시원한 해물육수에 맛의 포인트가 있는 음식이다. 평양냉면이 한국 냉면의 대명사라 하더라도 전국의 냉면을 모두 여기에 비유하면 곤란하다.
밀면 전에, 그러니까 조선시대부터 남녘 지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냉면이 있는데 바로 진주냉면이다. 면은 메밀을 쓰고 육수는 해물로 내며 여기에 고명으로 육전을 썰어 올린다. 육전의 부침기름 때문에 평양냉면에 비해서 한참 무거운 맛을 낸다.
진주 인근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이런 진주냉면에 평양냉면이 섞인 묘한 냉면을 접하게 되는데, 두툼하고 매끄러운 ‘메밀+감자면’에 닭으로 육수를 내고 고명으로 육전이 오르는 냉면도 있다. 시원하고 개운한 냉면을 기대하고 갔다가는 육중하고 투박한 냉면에 적응하지 못한 채 두어 젓가락 께적거리다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곱배기에 육전을 추가해 올려 먹는다.
출퇴근하며 오가는 길에 ‘가야밀면’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가 새로 생겼다. 사실 남쪽 지방에서도 밀면을 맛나게 먹어본 적이 없어서(맛있다고 소문난 집에서도 그랬던 것을 보면 밀면이 내 식성에 맞지 않는 듯하기도 하고) 관심 밖이었는데 매일 이 집 간판을 보게 되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혹 이 집은 날 만족시키지 않을까?
해물육수는 감칠맛이 깊었으나 들이켤 때 목에 턱턱 걸릴 정도로 개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면은 그 자리에서 눌러 뽑아 쫄깃하기는 하지만 아무런 향이 없었다. 갖은 양념을 한 다대기를 푸니 개운함과는 거리가 더 멀어졌고, 면은 단지 쫄깃한 식감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밀국수로 내는 냉면의 한계인가?
지금은 없지만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고바우’라는 분식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는 멸치와 다시마로 낸 육수에 열무김치를 넣은 뒤 사나흘 숙성시켜 썼는데, 건면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벌컥벌컥 들이켤 때 목걸림도 없었다. 밀면이 평양냉면만한 위치에 오르려면 육수와 면에 대한 연구를 한참 더 해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