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씨는 서초구청 민원게시판에 ‘가지를 삭둑 잘라내면 나무가 봄에 잎을 피우는 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잎도 늦게 나온다. 앞으로는 신중하게 가지치기를 해달라’는 글을 두 차례 올렸다. 하지만 서초구청은 ‘현재의 가지치기 방식은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답변을 해왔다.
그러자 소 씨는 인터넷을 뒤져 서울시의 가로수 관련 조례를 찾아냈다. ‘가로수 조성 및 관리조례 시행규칙’(규칙 제3396호)에 따르면 서초구청은 △약전지(弱剪枝) 위주로 하라 △가로수가 전기, 통신 시설물에 닿거나 도로표지판, 신호등을 가릴 경우에 가지치기를 하라 △고압선, 교통표지판, 신호등 등에 닿는 부분만 자르고 수형을 다듬어라 등의 조항을 어겼음이 확인됐다.
가로수 ‘전봇대’ 모양으로 삭둑, 앞으로 개선
소준섭 씨는 “2년 내에 가로수 가지치기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국민이 청하여 바라는 바’, ‘민원(民願)’에 대한 사전의 설명이다. 보통 ‘민원’이라고 하면 민원인의 재산이나 이익을 침해하는 행정사항을 처리해달라는 불만, 불평, 고충 등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이하 고충위)가 시정권고를 내리는 민원의 80%가 재산권 보호와 관련한 사안이다.
하지만 ‘국민이 청하여 바라는 바’는 좀더 공익적이며 올바를 수 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불합리한 행정을 지적하거나 부조리한 제도의 개선을 건의하는 등의 ‘공익적 민원 활동’이 그것이다.
“가로수를 살리면 시원한 그늘과 바람을 누릴 수 있어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기에 생업과 직결되는 일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소준섭 씨의 말이다. 고충위 유장석 조사관은 “민원의 대부분은 사적인 사안이지만, 공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민원도 꽤 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민원이라도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이 돌아가게끔 하는 민원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에 사는 신승순(39) 씨는 9세 된 아이를 둔 평범한 주부다. 하지만 신 씨는 최근 자신의 힘으로 자전거도로를 ‘살려냈다’.
5월 신 씨는 경기 남양주에서 분양을 받은 상가건물의 건축현장을 찾아갔다가 인근 자전거도로 위에 버스 승강장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전거도로는 승강장 때문에 흐름이 끊겼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은 승강장 주변을 돌아서 가야만 했다.
“우리 아이도 자전거를 자주 타거든요. 바로 앞이 버스 승강장이어서 교통사고 위험도 있겠더라고요. 승강장을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내 남양주시청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담당 공무원을 연결해주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담당 공무원들은 불친절했다. 신 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설명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좀더 적극적으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서울 서대문을 오가며 본 고충위 사무실이 떠올랐고, 그곳에 민원 신청을 했다. 최근 고충위는 남양주시청 측에 버스 승강장을 이전하라고 권고했다.
소 씨나 신 씨처럼 ‘올바른 민원맨’들이 활약할 수 있는 데는 ‘전자정부’의 영향이 컸다. 각 정부기관마다 홈페이지에 민원게시판 등을 만들어놓은 이후 시민이 정부에 다가가는 문턱이 낮아진 것이다. 고충위 지영림 전문위원(법학 박사)은 “시민의식이 성숙해갈 뿐만 아니라 ‘신문고’를 울릴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진 덕분에 정부에 직접 구체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고충위 시정권고 80%는 재산권 보호 민원
대기업에 근무하는 양동주(36) 씨는 ‘참여마당 신문고’에 하나의 민원을 올림으로써 충남 태안군 남면 주민들의 걱정거리를 단숨에 해결하는 공을 세웠다.
남면초등학교 바로 앞에는 왕복 2차선 간선도로가 놓여 있다. 어린이보호구역임에도 하루 평균 8000대의 차량이 제한속도인 시속 30km에 아랑곳하지 않고 80~90km로 쌩쌩 달려 어린이 사고 위험이 컸다. 마을 주민들은 몇 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양 씨의 민원 제기로 과속방지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남면초교 앞에 처가가 있어 자주 왕래합니다. 아이들이 쌩쌩 달리는 차들을 피해 도로를 건너다니는 모습이 위험해 보였는데, 제 아들이 그 도로에서 사고를 당할 뻔했어요. 그 일을 계기로 신문고에 민원을 올리게 됐습니다. 자동차로 20분 떨어져 있는 안면초교 앞 도로에는 서너 개의 과속방지턱이 설치돼 있어 속도를 줄이지 않을 수 없거든요. 남면초교 앞에도 과속방지턱을 설치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정말 제 말대로 된다고 하니 무척 기쁩니다.”
서울시는 시민제안을 접수하고 6개월마다 두 차례 심사를 거쳐 수상하고 있다. 과거에는 서류 접수를 받다가 2003년부터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접수받으면서 시민제안이 ‘폭증’했다. 11일까지 접수된 7월의 시민제안만 해도 50건. 조직제도담당관실 이영희 씨는 “6개월 동안 모이는 시민제안은 700~800건에 이르며 해마다 10%가량씩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남산공원길의 보기 흉한 보호철책 철거, 시내버스 교통카드 단말기 동작음을 좀더 듣기 좋은 소리로 바꾸기, 각 구청에 설치된 재활용센터의 정보 전산화…. 이미 추진됐거나 추진 중인 이러한 행정개선은 모두 시민의 아이디어로 이뤄졌다.
고령화 정책에 관심이 많은 유명천 씨는 퇴직 후 사회복지기관에서 노인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50대 중·후반에 회사에서 퇴직하지만 실질적인 은퇴 연령은 67~68세라고 합니다. 당연히 고령자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데, 직업학교가 55세까지만 받아준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서울시는 유 씨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령자 직업교육안을 검토하고 있다. 고용대책과 이창희 씨는 “직업학교 지원 연령을 높일지, 아니면 고령자를 위한 새로운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15개 특허를 보유한 발명가 변무현(53) 씨는 방송의 힘을 빌려 특허청의 잘못된 수수료 체계를 고치는 데 성공했다.
특허출원을 할 때 내야 하는 수수료를 적게 냈을 경우 특허청은 적게 낸 만큼의 수수료를 ‘보정료(특허출원 서류양식을 고치는 데 내는 비용)’ 명목으로 청구한다. 그런데 이때 보정서 수수료도 내야 한다. 즉, 적게 낸 만큼의 돈에 수수료까지 더 내야 하는 것.
변무현 씨는 요즘 유행(?)하는 ‘물바로 욕실화’를 발명한 장본인이다.
다용도 고리에 대한 특허출원을 하려다 이 같은 수수료 체계를 알게 된 변 씨는 특허청에 항의했지만 “현행 규정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할 수 없이 수수료까지 납부한 후 변 씨는 KBS 시청자 칼럼 ‘우리 사는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저는 서류 작성이나 접수를 직접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리사를 통해서 합니다. 변리사가 요구하는 대로 비용을 내니까 이런 잘못된 수수료 체계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방송에까지 이 일을 알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변 씨 사연이 방송된 직후 특허청은 보정료 수수료는 청구하지 않기로 제도를 개선했다.
모든 행정은 법에 근거해 이뤄진다. 법은 현실을 따라가며 제정되게 마련이지만 항상 현실을 반영할 수는 없다. 행정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느끼고 감시하는 역할은 국민에게 있다. 지영림 전문위원은 “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행정에 대한 국민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난다”면서도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그냥 참고 말지 뭐’라며 넘어갈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시민의 노력이 우리 사회를 좀더 바람직한 사회로 가게 하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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