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 농부가 매혈소에서 피를 뽑고 있다.
혈액이 부족하다고 대국민 홍보를 하면서도 교회 등의 단체 헌혈이 많은 휴일엔 문을 닫는 ‘헌혈의집’이 절반을 넘는다. 적혈구 혈액이 부족하다고 푸념하면서 의약품 원료로 쓰이는 혈장 성분을 주로 채혈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가 없이 헌혈에 나서는 시민들이 좋은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헌혈자가 나중에 헌혈증서를 가지고 왔을 때 지급해야 할 헌혈환부적립금도 수년째 적자를 면치 못하며 사실상 고갈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헌혈이 줄어 환자에게 쓸 피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헌혈 부족 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입 혈액의 문제다. 특히 중국 혈액이 걱정이다. 수입 혈액의 안전성 여부는 생산 국가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환자 수혈용 혈액은 국내에서 헌혈한 혈액으로 자급자족하고 있으나 알부민 등 혈액제제의 원료가 되는 혈장은 필요량의 상당 부분을 미국과 중국, 스페인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적십자사 자료에 따르면 대한적십자사 명의로(실수입자는 제약사) 2005년 수입한 혈장은 29만9000ℓ. 이는 2003년 16만4000ℓ, 2004년 13만6000ℓ보다 2배가량 늘어난 수치로, 하루 1600명씩 1년 동안 헌혈해야 하는 양이다.
미국산 혈장은 핵산증폭검사 거쳐 비교적 안전
혈액 자급자족은 혈액 선진국의 필요 조건이다. 재화나 서비스와 달리 혈액은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내 혈액을 사용하는 것보다 위험성이 클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례로 영국은 자국의 혈액제제를 수입한 14개 나라에 ‘인간광우병(vCJD,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 발병 가능성을 경고했다. 브라질과 터키 측에는 영국산 혈액제제를 사용한 사람들의 헌혈을 막는 동시에 이들을 추적 및 관리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수입 혈장 중 미국에서 들여온 것은 대부분 매혈센터를 거친 것으로, 미국 매혈센터들은 양질의 등록헌혈자 위주로 피를 뽑기 때문에 안전성이 입증돼 있다고 한다. 소수의 ‘안전한 단골손님’에게 많은 양을 채혈해 외국에 수출하는 것.
스페인에서 수입되는 혈장도 원산지가 스페인일 뿐 사실상 미국 혈액이라고 한다. “스페인 공장에서 가공될 뿐 재료는 미국산 혈액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수입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혈장은 핵산증폭검사(NAT)를 거친 것이다.”(적십자사 관계자)
적십자사도 수혈로 인한 에이즈, B형 및 C형 간염의 감염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 2005년 초 NAT 장비를 도입해 검사 시 에이즈 바이러스가 드러나지 않는 잠복기를 22일에서 11일로, C형 간염 잠복기를 84일에서 23일로 줄인 바 있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중국에서 수입된 혈장이다. 수입된 중국산 혈장은 2003년 6만8000ℓ, 2004년 3만2000ℓ, 2005년 3만7000ℓ 등이다. 중국에서 혈장의 안전성을 확인한 뒤 수입하고 있다는 게 적십자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90년대 중반 ‘매혈 경제’가 유행할 때보다는 다소 나아졌지만, 중국은 여전히 매혈이 거리낌 없이 이뤄진다. 혈두(血頭·피를 팔 사람을 고르는 두목)가 농촌과 대학가에 파고들어 매혈을 부추기는 것은 중국만의 독특한 광경이다.
중국 위생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내 에이즈 감염자는 65만명에 이르며, 지난 한 해 동안에만 무려 7만여 명의 새로운 감염자가 발생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에이즈 감염자를 포함하면 감염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게 정설이다. 중국의 에이즈 급증엔 혈장 매매도 한몫한다.
익명을 요구한 적십자사의 한 관계자는 “미국형 매혈이 아닌 후진국형 매혈이 일반화된 중국 혈장은 가격은 저렴할지 몰라도 혈액관리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면서 “대형 혈액사고로 파장이 일었던, NAT 장비를 도입하기 이전의 한국보다도 관리 체계가 많이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식약청 등도 2001년 12월 “중국 혈액원이 선진국에 비해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선진국으로부터의 혈장 수입을 권장하고, 알부민 수급에 문제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을 허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적십자사는 ‘에이즈 오염 혈액’ 유통 문제가 불거졌을 때, “낙후된 검사 기법 때문에 발생한 불가피한 혈액 사고”라고 해명했다. 효소면역검사에서 ‘음성’으로 판정돼 출고됐으나 (새로 도입된) NAT 장비로 검사한 결과 양성으로 판별됐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NAT 장비를 도입했을까?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 혈액으로 만든 혈액제제 ‘안심 불가’ 판결
“중국이 NAT를 도입할 계획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지난해까지는 확실히 NAT 장비를 도입하지 않았다”는 게 A제약사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따라서 중국의 혈액관리 수준을 높게 봐준다고 해도 혈액사고가 잦았던 2005년 이전 한국의 혈액검사 수준인 셈이다.
일본은 80년대 초 혈우병 치료제로 인해 1800여 명이 에이즈에 감염된 뒤 4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고를 겪었다. 당시 오염된 혈액으로 혈액제제를 만들었던 녹십자는 파산했다. 국내에서도 “ 혈우병 환자 중 간염이나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제약사들은 “에이즈 감염 혈액이 의약품에 들어가더라도 제조 공정에서 불활성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완제품은 확실히 안전하다”고 강조한다. 중국 혈장을 들여와 혈액제제를 만드는 A사 관계자는 “제품을 만들기 전에도 정밀하게 검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산 혈장은 제약사의 주장대로 안전할까?
이와 관련해 지난해 9월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혈액으로 만든 혈액제제는 안심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서 제약사가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으로 혈액제제를 제조한 만큼 혈우병 환자들이 이 혈액제제의 투여로 감염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B혈액제제의 원료가 되는 혈장유래원료(Fr.V)는 최근 물량이 달려 국제시장에서의 가격이 초급등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수입되는 혈장이 바로 Fr.V. ‘질이 떨어지는’ 중국산 Fr.V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한국을 ‘공습’하고 있다. 철저한 안전대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