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첫 번째 추상 수채, 1910, 종이에 수채, 50x65cm, 파리 퐁피두센터.
추상화는 사물을 사실대로 재현하지 않고 점-선-면-색채 등 순수한 조형요소만을 부각시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추상화의 연원은 꽤 오래된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토기 따위에 그려놓은 기하학 형상이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다. 선사인들은 여러 지역에 걸쳐 동그라미나 세모, 만(卍)자 꼴 등의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인간이 사물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단순화, 상징화해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증거라 하겠다. 중국의 한자 같은 상형문자도 일종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해(日)나 산(山), 물고기(魚) 등을 형상에 따라 단순화해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취는, 추상화가 이미지를 통해 정보를 좀더 효율적으로 소통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임을 일러준다.
옛사람들의 추상화 경험은 자연의 아름다움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순수한 미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발달시켰고, 건축물의 격자창이나 옷의 패턴처럼 특히 장식미술 분야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이끌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추상미술은 주류 미술로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이렇듯 미술사의 흐름을 따라 유구한 전개를 이어왔다.
이성 중심·합리적 전통에서 탈피 … 비구상·비재현적 시도
칸딘스키, 붉은 점이 있는 회화, 1914,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 파리 퐁피두센터.
주지하듯 제1차 세계대전은 서양 문명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전쟁이었다. 전쟁 직전의 유럽 사회는 산업화를 통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빈부 차이가 극심해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연히 혁명이 빈발했다. 또 대도시화로 인해 생활환경이 나빠지고 인간소외 현상도 확산됐다. 제국주의로 성장한 서구 자본주의는 저개발 식민지를 수탈하는 한편, 식민지를 놓고 다투는 열강들 간의 무한경쟁에도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유럽을 뒤흔든 전쟁이 발발했다. 이 모든 모순의 바탕에는 이성의 도구화와 문명의 비인간화가 놓여 있었다.
몬드리안, 빨강 노랑 파랑이 있는 구성, 1927, 캔버스에 유채, 61x40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추상회화가 서양 문명과 서양미술 전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려고는 했으나 막상 추상회화 안에는 기계문명 시대, 산업화 시대의 미학도 어느 정도 담겨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대량생산으로 인해 단순한 디자인이 선호되면서 기하학적 이미지가 지닌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한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특히 기하학적 추상의 경우 이런 시대적 미감,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미감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단순하고 장식이 없는 물건이나 이미지일수록 더 순수하고 도덕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 절제의 미학까지 더해짐으로써 기하학적 추상은 시대의 미감을 선도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디자인 분야에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
현대미술가 가운데 추상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작품 제작과 이론을 통해 최초로 정당화한 사람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나는 데생 하던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작업실 문을 열었는데, 그때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지닌 그림 한 폭이 눈에 띄었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그림은 어떤 특별한 주제도, 식별할 수 있는 대상도 담고 있지 않았다. 화면은 단지 찬란한 색채의 얼룩으로 만개해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것은 이젤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내 그림이었다.”
자신의 그림이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놓여 있지 않아서 주제도 형상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까닭에 오히려 그림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는 칸딘스키의 고백은, 미술의 감동이 스토리나 형상을 넘어 순수한 조형요소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점을 토로한 것이다. 흔히 최초의 추상 수채화로 꼽히는 칸딘스키의 ‘추상 수채’(1910)를 보면 그가 이런 발견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구현하려 했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움직이는 덩어리들, 그리고 자유롭게 풀어진 터치와 무리 지어 맴도는 색채로부터 우리는 규칙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무정부적으로 항해하는 영혼의 율동을 느낀다. 유럽이 극단적인 모순과 갈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을 때 칸딘스키는 이렇듯 인간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그 내면의 울림을 지키려 했다.
칸딘스키와 더불어 유럽 추상회화의 앞길을 개척한 또 다른 중요한 화가가 피터 몬드리안이다. 칸딘스키가 외부세계에서 내면으로 눈을 돌려 추상회화를 개척했다면, 몬드리안은 외부세계를 그리되 그것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끝에 자연의 형태를 벗어난 순수구성의 추상화를 개척했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유럽 추상화 개척
몬드리안은 수평선과 수직선, 그리고 그것이 교차하는 데 따라 생긴 사각형만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구성을 반복해 그리면서 그는 결국 모든 주제는 하나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아무리 달라 보여도 사물의 근원은 같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연은 그렇게도 활기 있게 끊임없이 변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절대적인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현대 추상화는 이처럼 내면의 순수 혹은 세계의 근원으로 나아간 조형 흐름이었다. 이 흐름이 현대 서양 문명의 복잡한 모순으로부터 형성됐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고통이 순수를 낳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상화는 그런 역사적 연단의 산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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