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장 3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선보인 ‘카니발 판타지 퍼레이드’.
가족놀이터라면 으레 ‘유원지’와 ‘창경원’을 떠올리던 1981년 여름, 우민경(33·회사원·서울 서초구 잠원동) 씨는 가족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자연농원(경기 용인시)에 다녀오는 ‘호사’를 누렸다.
그는 자연농원이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서울에서 자연농원은 2시간 남짓 걸렸다. 관광버스가 하루 5회(주말 20회) 운영됐는데, 예약자가 밀려 있어 버스 일정에 휴가 계획을 맞추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녀온 며칠 동안 달콤한 꿈
어느덧 아이(3) 엄마가 된 그는 고색창연한 ‘그날’의 가족사진을 액자에 넣어 간직하고 있다. ‘사진사 아저씨’가 찍어준 촌스러운 구도의 스냅샷은 온 가족이 함께 찍은 ‘몇 안 되는’ 어린 시절 가족사진이란다.
삼성에버랜드가 4월17일 개장 30주년을 맞았다. 우 씨가 3세 때 세워져 한 세대를 넘긴 것이다. 자연농원으로 문을 연 이래 1억4500만명이 방문했으니, 국민 한 사람당 세 번씩은 이곳을 찾은 셈이다. 그 사이 1인당 국민소득(GNI)은 818달러(1976년)에서 1만6291 달러(2005년)로 늘었다.
사경준(32·무역업·중국 거주) 씨는 자연농원에서 첫 ‘일탈’을 경험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를 속여 돈을 타낸 뒤 용인행 시외버스에 오른 것.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저금통을 탈탈 털어 쌈짓돈을 마련한 초등학생 3명의 ‘어드벤처’는 홍콩영화보다도 달콤했다.
튤립이 만개한 포시즌스 가든.
‘모험’이었기 때문일까? 사 씨는 20년 전의 추억을 사진을 보듯 뚜렷이 기억해낸다. 70~80년대 부모 손을 잡고 이곳을 찾은 이들은 사 씨처럼 와일드사파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와일드사파리는 이 시기 에버랜드의 최고 인기상품이었다.
와일드사파리는 사자와 호랑이가 동거하는 기묘한 공간. 1976년 사자 사파리로 출발해 92년 사자와 호랑이를 합사했는데, 5000평 공간에서 벌어지는 맹수들의 권력다툼과 사랑, 질투는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진화의 어느 갈림길에서 엇갈린 사람의 그것을 보는 듯했다.
꿈 이룬 ‘에버랜드 키드’ 사육사
“유치원에 다닐 때 에버랜드 사파리에 놀러갔었는데, 한눈에 호랑이와 사자에게 매료됐어요.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예쁘던지 품에 안아주고 싶었죠.”
이솝 테마파크 ‘이솝 빌리지’.
“테마파크는 나에게 일종의 팬터지였어요. 꿈을 이루려고 대학에서도 동물을 전공했고요. 지금은 아이들에게 꿈을 전해주고 있지요.”
이 사육사의 일터인 에버랜드 동물원은 ‘주토피아(Zootopia)’로 거듭나고자 한다. 주토피아는 ‘Zoological(동물학의)’과 ‘Utopia(낙원)’를 합성한 조어로 동물과 인간이 서로 교감하며 하나가 되는 공간을 말한다. 삶의 질이 높아진 만큼 ‘동물권’도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 2월 ‘스토리가 있는’ 체험형 동물원 ‘애니멀 원더월드’를 세운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30년 동안 한국사회는 ‘동물권’을 이야기할 만큼 바뀌었다. 818달러→1만6291달러로 1인당 GNI가 늘어난 만큼 에버랜드의 문화도 크게 변한 것이다.
호랑이, 사자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이 사육사는 초등학교 때(90년대) 에버랜드에서 햄버거와 피자를 사먹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우민경 씨는 어땠을까? “집에서 김밥과 과일 도시락을 만들어 왔다”가 정답이다.
“70년대엔 자연농원에서 멧돼지 고기를 팔았거든. 고교 동창모임을 여기서 했었는데, 그때 막걸리깨나 들이켰지.” (건설회사 임원을 지낸 김태완 씨·64)
체험형 동물원 ‘애니멀 원더월드’.
4월16일 우민경 씨는 남편, 아이를 데리고 사촌 동생 부부와 함께 오랜만에 에버랜드를 다시 찾았다. 추억 속의 ‘사진사 아저씨’는 사라졌지만, 우 씨는 제부(弟夫)가 ‘디카’로 찍어준 또 다른 ‘에버랜드 가족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 ‘버너’를 대신한 필수품인 디카가 밤늦도록 곳곳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하루하루가 축제 같은 곳이다.
축제를 ‘축제답게’ 하는 건 신세대 손님들이다. 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유모차는 사치품이었다. 그 시절엔 아기를 들쳐업고 포대기를 맨 채 놀이기구 앞에 줄을 선 아낙들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캐리어에 아이를 앉혀 업은 남자들의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포대기’를 ‘캐리어’가 대신한 것처럼 테마파크의 주인은 TV에서 걸어나온 것 같은 스타일의 신세대(10~30대)로 바뀌었다. 이들이 가족과 함께 혹은 연인과 함께 즐기는 에버랜드의 축제는 유로페스티벌(3~6월)→썸머스플래시(6~8월)→해피할로윈(9~10월)→크리스마스홀리데이판타지(11~12월)→스노페스티벌(1~2월)로 끝없이 이어진다.
에버랜드의 축제는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미축제, 야간개장’이 그것이다. 1인당 GNI가 2000달러를 넘어서면서 여가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간 통금이 사라진 게 겨우 3년 전인 1982년 1월의 일이니 야간개장은 놀이문화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의 축제문화, 놀이문화를 우리가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에버랜드 리조트사업부 축제기획담당 유석준 차장)
유 씨 역시 에버랜드 축제를 통해 사랑을 꽃피웠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녀’와의 첫 키스도 장미축제가 한창이던 에버랜드 ‘장미원’에서였다. 그해 여름은 온통 장밋빛이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은 입을 맞췄다. 그는 “장미원 뒷산에서의 ‘아주 진한 스킨십’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30, 40대가 적지 않다”며 웃었다.
에버랜드는 다양한 ‘어트랙션’을 도입함으로써 레저문화를 발전시켜왔다. 70년대의 ‘사파리월드’, 80년대의 ‘눈썰매장’, 90년대의 ‘캐리비안 베이’는 ‘한국 최초’일 뿐더러 테마파크 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사례로 평가된다. 2005년 세계 최초의 이솝 테마파크인 ‘이솝 빌리지’를 오픈한 것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사람과 문화가 변한 만큼 30년 동안 에버랜드도 빠른 속도로 진화했다. 에버랜드 주변은 70년대 초반까지는 잡목과 잡초가 무성한 말 그대로 황무지였다. 1971년부터 6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친 뒤 패밀리랜드(현재의 에버랜드)와 경제조림단지, 유실수 단지, 양돈장, 양어장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