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리버 피닉스가 죽었을 때, ‘아이다호’를 촬영하면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됐던 구스 반 산트는 큰 절망감과 상실감에 휩싸였다. 물론 죽음이 리버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리버 피닉스는 요절했고, 언론은 슬퍼했다.
1년 뒤인 1994년엔 너바나의 멤버 커트 코베인이 자신의 온실에서 머리에 엽총을 쏘았다. 핫 칠리 페이퍼와 데이비드 보위의 뮤직 비디오를 연출했고, 두 장의 앨범을 낸 뮤지션이기도 한 구스 반 산트는 자신이 사랑했던 얼터너티브 록의 대가의 죽음에 연이은 충격을 받는다. 당시 ‘투 다이 포’, ‘파인딩 포레스터’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던 구스 반 산트는 이 일을 계기로 뭔가 다른 영화, 자신의 밑바닥을 뒤흔든 ‘죽음’에 대한 명상과 이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미학을 개척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렇게 해서 구스 반 산트의 레퀴엠 3부작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는 빛을 보게 된다.
전작인 ‘엘리펀트’와 마찬가지로 ‘라스트 데이즈’의 전략은 단 한 가지다. 죽음을 앞둔 한 가수의 마지막 나날을 무심히 뒤따라가 보는 것. 이미 ‘엘리펀트’에서도 수많은 아이들의 뒷모습이 스크린에 아로새겨졌었다. 게다가 밤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레퀴엠 3부작은 아름다워서 더 슬픈, 죽음에 대한 서정시나 명상록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엘리펀트’가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으로 죽은 13명 아이들의 얼굴로 이루어진 점묘화라면, ‘라스트 데이즈’는 13명에서 단 한 명의 화자로 시선을 좁힌 한 남자의 방백이나 독백에 가깝다. 벗어나려 해도 자꾸 시간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마지막 날의 초상화. 죽음과 폭력이 함께하는 총이라는 물건에 대한 매혹이 바깥으로 향했을 때 사회적인 이슈를 점화시킨 ‘엘리펀트’가 탄생됐다면, 이번에는 그 매혹이 내면화된 것이다. 따라서 ‘엘리펀트’의 아이들이 아이들이 아니듯, ‘라스트 데이즈’ 속의 블레이크, 아니 커트 코베인 역시 화려한 콘서트와 대저택, 그리고 팬들에 둘러싸인 스타가 아니다.
얼터너티브 록 대가 커트 코베인 자살 재구성
첫 장면에서부터 숲 속을 정처 없이 거닐고 죽음보다 깊어 보이는 우울과 사념의 늪을 헤매는 그의 그림자는 스크린에 긴 발자국을 남긴다. 울창한 숲 속에 덩그맣게 서 있는 블레이크의 집은 황량하고 텅 비어 있는 영도(靈都)의 공간이며, 벽시계는 거듭해서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거대한 저택의 괘종소리. 시간은 오래 지속되고 그의 내면은 점점 더 비어간다.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집은 세 사람의 방문자를 맞는다. 효율적인 광고를 해주겠다며 나타난 옐로 페이지의 광고사원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모르몬 교도와 블레이크의 전 아내. 돈과 구원과 사랑을 약속하는 듯 보이는 이들, 즉 현실의 침입에도 방문객들이 떠난 빈자리에 앉아 있는 커트 코베인은 고개를 숙이고 마루에 쓰러져 있다.
이렇게 ‘라스트 데이즈’는 배우와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미장센(화면 짜기)’이 더 많은 말을 하는 영화다. 사실에 얽매이기보다 자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시간들을 재구성한 영화는 낯설고도 이질적인 음악의 향취를 불어넣는다. 일례로 여자들의 검은색 슬립을 입은 브레이크가 약에 취해 쓰러져 있을 때, 오히려 감독의 카메라는 그의 축 처진 육체, 불쌍한 노래기계가 돼버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블레이크와 거실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 속 ‘보이즈 투 맨’의 아름다운 화음을 번갈아 가면서 비춘다. 최고의 얼터너티브 록 가수가 최고 흥행그룹의 하모니를 들으며 약에 취해 있는 상황. 이곳에는 깊은 허망함과 공허만이 침잠돼 있다. 이때 구스 반 산트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그는 커트 코베인에 대한 뮤직비디오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화려한 외면과 외면 사이의 깊은 심리적 굴곡을 탐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라스트 데이즈’에는 그 흔한 주인공의 시점 샷조차 없고,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하는 일도 드물다. 막간에 등장하는 옐로 페이지의 영업사원이 배우가 아닌 구스 반 산트가 직접 만난 진짜 영업사원일 만큼 여기에는 프로페셔널한 연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집 거실에서 혼자 기타를 치고 있는 블레이크를 창문 너머로 잡은 카메라는 TV 속의 ‘보이즈 투 맨’을 잡을 때와는 정반대로 서서히 블레이크의 연주에서 멀어져간다(물론 동성애자인 구스 반 산트답게 블레이크의 밴드 멤버들 간의 동성애적인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엘리펀트’에 이어 또 한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보여주지만).
이미지와 음악으로 자유분방한 상상력 발휘
‘라스트 데이즈’에 나오는 음악은 팬들의 기대와 달리, 너바나의 곡이 아니라 벨벳 골드마인의 ‘Venus in Fur’나 블레이크 역의 마이클 피트가 직접 작곡한 ‘Death to Birth’, ‘That day’ 같은 곡들이다. 구스 반 산트는 이러한 모호하고 펑크적이며 흐느적거리는 음악 사이로 커트 코베인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존재했을, 나른하고 퇴폐적이며 자유롭고 초현실적인 공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더 아이로니컬하게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커트 코베인의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담담히 지켜보는 카메라 위로는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이 같은 모든 파격이 ‘라스트 데이즈’의 본질이다. 이러한 외로움과 고독의 산물이 음악의 본질일 것이다. 블레이크의 죽음이 TV를 통해 전해지자, 절친했던 동료들은 그에게 약을 대준 것이 탄로날까 봐 줄행랑을 친다. 달리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멤버의 기차 소리는 시적인 우아함과 최면 같은 잔혹함으로 인해 ‘ 한 외로운 남자의 죽음’이라는 그날의 상흔을 다시 한번 떠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그날, 그 죽음의 시간 속에 갇혀버린 블레이크란 가수의 삶은 재현될 수 없는 시간이다. 재현돼서는 안 되는 시간이다.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장르를 대중과 한층 가깝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더에 있는 록을 수면 위로 끄집어냄으로써 그 본질을 흐렸던 너바나. 그렇다면 자살한 천재 뮤지션의 전설이야말로 커트 코베인이 죽으면서까지 피하고 싶었던 죄의식과 원죄는 아니었을까?
전혀 다른 음악 영화 ‘라스트 데이즈’. 구스 반 산트의 언더스런 영화 찍기 방식에 하늘에 있을 커트 코베인도 무척 좋아했을 것만 같다.
1년 뒤인 1994년엔 너바나의 멤버 커트 코베인이 자신의 온실에서 머리에 엽총을 쏘았다. 핫 칠리 페이퍼와 데이비드 보위의 뮤직 비디오를 연출했고, 두 장의 앨범을 낸 뮤지션이기도 한 구스 반 산트는 자신이 사랑했던 얼터너티브 록의 대가의 죽음에 연이은 충격을 받는다. 당시 ‘투 다이 포’, ‘파인딩 포레스터’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던 구스 반 산트는 이 일을 계기로 뭔가 다른 영화, 자신의 밑바닥을 뒤흔든 ‘죽음’에 대한 명상과 이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미학을 개척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렇게 해서 구스 반 산트의 레퀴엠 3부작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는 빛을 보게 된다.
전작인 ‘엘리펀트’와 마찬가지로 ‘라스트 데이즈’의 전략은 단 한 가지다. 죽음을 앞둔 한 가수의 마지막 나날을 무심히 뒤따라가 보는 것. 이미 ‘엘리펀트’에서도 수많은 아이들의 뒷모습이 스크린에 아로새겨졌었다. 게다가 밤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레퀴엠 3부작은 아름다워서 더 슬픈, 죽음에 대한 서정시나 명상록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엘리펀트’가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으로 죽은 13명 아이들의 얼굴로 이루어진 점묘화라면, ‘라스트 데이즈’는 13명에서 단 한 명의 화자로 시선을 좁힌 한 남자의 방백이나 독백에 가깝다. 벗어나려 해도 자꾸 시간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마지막 날의 초상화. 죽음과 폭력이 함께하는 총이라는 물건에 대한 매혹이 바깥으로 향했을 때 사회적인 이슈를 점화시킨 ‘엘리펀트’가 탄생됐다면, 이번에는 그 매혹이 내면화된 것이다. 따라서 ‘엘리펀트’의 아이들이 아이들이 아니듯, ‘라스트 데이즈’ 속의 블레이크, 아니 커트 코베인 역시 화려한 콘서트와 대저택, 그리고 팬들에 둘러싸인 스타가 아니다.
얼터너티브 록 대가 커트 코베인 자살 재구성
첫 장면에서부터 숲 속을 정처 없이 거닐고 죽음보다 깊어 보이는 우울과 사념의 늪을 헤매는 그의 그림자는 스크린에 긴 발자국을 남긴다. 울창한 숲 속에 덩그맣게 서 있는 블레이크의 집은 황량하고 텅 비어 있는 영도(靈都)의 공간이며, 벽시계는 거듭해서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거대한 저택의 괘종소리. 시간은 오래 지속되고 그의 내면은 점점 더 비어간다.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집은 세 사람의 방문자를 맞는다. 효율적인 광고를 해주겠다며 나타난 옐로 페이지의 광고사원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모르몬 교도와 블레이크의 전 아내. 돈과 구원과 사랑을 약속하는 듯 보이는 이들, 즉 현실의 침입에도 방문객들이 떠난 빈자리에 앉아 있는 커트 코베인은 고개를 숙이고 마루에 쓰러져 있다.
이렇게 ‘라스트 데이즈’는 배우와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미장센(화면 짜기)’이 더 많은 말을 하는 영화다. 사실에 얽매이기보다 자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시간들을 재구성한 영화는 낯설고도 이질적인 음악의 향취를 불어넣는다. 일례로 여자들의 검은색 슬립을 입은 브레이크가 약에 취해 쓰러져 있을 때, 오히려 감독의 카메라는 그의 축 처진 육체, 불쌍한 노래기계가 돼버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블레이크와 거실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 속 ‘보이즈 투 맨’의 아름다운 화음을 번갈아 가면서 비춘다. 최고의 얼터너티브 록 가수가 최고 흥행그룹의 하모니를 들으며 약에 취해 있는 상황. 이곳에는 깊은 허망함과 공허만이 침잠돼 있다. 이때 구스 반 산트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그는 커트 코베인에 대한 뮤직비디오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화려한 외면과 외면 사이의 깊은 심리적 굴곡을 탐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라스트 데이즈’에는 그 흔한 주인공의 시점 샷조차 없고,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하는 일도 드물다. 막간에 등장하는 옐로 페이지의 영업사원이 배우가 아닌 구스 반 산트가 직접 만난 진짜 영업사원일 만큼 여기에는 프로페셔널한 연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집 거실에서 혼자 기타를 치고 있는 블레이크를 창문 너머로 잡은 카메라는 TV 속의 ‘보이즈 투 맨’을 잡을 때와는 정반대로 서서히 블레이크의 연주에서 멀어져간다(물론 동성애자인 구스 반 산트답게 블레이크의 밴드 멤버들 간의 동성애적인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엘리펀트’에 이어 또 한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보여주지만).
이미지와 음악으로 자유분방한 상상력 발휘
‘라스트 데이즈’에 나오는 음악은 팬들의 기대와 달리, 너바나의 곡이 아니라 벨벳 골드마인의 ‘Venus in Fur’나 블레이크 역의 마이클 피트가 직접 작곡한 ‘Death to Birth’, ‘That day’ 같은 곡들이다. 구스 반 산트는 이러한 모호하고 펑크적이며 흐느적거리는 음악 사이로 커트 코베인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존재했을, 나른하고 퇴폐적이며 자유롭고 초현실적인 공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더 아이로니컬하게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커트 코베인의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담담히 지켜보는 카메라 위로는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이 같은 모든 파격이 ‘라스트 데이즈’의 본질이다. 이러한 외로움과 고독의 산물이 음악의 본질일 것이다. 블레이크의 죽음이 TV를 통해 전해지자, 절친했던 동료들은 그에게 약을 대준 것이 탄로날까 봐 줄행랑을 친다. 달리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멤버의 기차 소리는 시적인 우아함과 최면 같은 잔혹함으로 인해 ‘ 한 외로운 남자의 죽음’이라는 그날의 상흔을 다시 한번 떠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그날, 그 죽음의 시간 속에 갇혀버린 블레이크란 가수의 삶은 재현될 수 없는 시간이다. 재현돼서는 안 되는 시간이다.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장르를 대중과 한층 가깝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더에 있는 록을 수면 위로 끄집어냄으로써 그 본질을 흐렸던 너바나. 그렇다면 자살한 천재 뮤지션의 전설이야말로 커트 코베인이 죽으면서까지 피하고 싶었던 죄의식과 원죄는 아니었을까?
전혀 다른 음악 영화 ‘라스트 데이즈’. 구스 반 산트의 언더스런 영화 찍기 방식에 하늘에 있을 커트 코베인도 무척 좋아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