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
그러나 책에 대한 팬터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책이라는 물건은 따분한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마법의 문이다. 미하엘 엔데의 동명소설 절반을 각색한 볼프강 페터젠의 ‘네버엔딩 스토리’는 책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환상을 보여준다. 불량소년들한테 쫓겨 헌책방에 들어선 어린 소년 바스티안이 발견한 건 ‘끝없는 이야기’라는 동화책이다. 바스티안이 책을 읽는 동안, 책을 읽는 독자인 바스티안과 붕괴돼가는 세계를 구하려는 어린 전사 아트레이유의 세계는 서서히 합쳐진다. 바스티안의 독서 행위가 바로 그 세계를 구하는 열쇠인 것이다. 영화의 끝에서 바스티안은 책 속 환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물론 ‘네버엔딩 스토리’는 좀 과격한 예다. 일반적인 영화 속에서 책의 역할은 비교적 온화하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힘이 없는 그냥 종이 묶음이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만만치가 않다.
‘미저리’는 책이라는 물건이 한 사람의 정신을 얼마나 완벽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미저리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리즈 소설로 유명해진 작가 폴 셸든은 주인공의 죽음을 다룬 마지막 편을 완성하고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그만 소설의 팬인 간호사 애니 윌크스의 구조를 받게 된다. 원고를 읽고 분노한 간호사는 셸든을 감금하고 새로운 결말을 강요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에서 책은 세상과 동떨어진 만만한 오락물이 아니다. 그건 두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무시무시한 칼이다.
다행히 온화한 역할을 하는 책들도 있다. ‘세렌디피티’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두 연인을 운명적으로 엮어주는 큐피드다. ‘채링 크로스 로드 84번지’에서 미국인 여성 독자와 영국인 서점 주인은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채 수십 년에 걸쳐 플라토닉한 로맨스에 빠진다.
최근 나온 영화들 중 책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한 작품으로 ‘투모로우’를 꼽고 싶다. 제2의 빙하기를 다룬 이 재난영화의 주 무대 중 하나는 뉴욕시립도서관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책은 정말 온몸을 던져 봉사한다. 이 영화에서 책들은 난로에 들어가 몸을 태워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선정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며, 독서광의 품 안에서 인류에게 문명의 희망을 약속하기도 한다. 특수효과로 도배된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책이 이렇게 효율적으로 쓰일지 누가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