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기’가 좋아서 홈스쿨링을 선택한 이교산 군.
물론 부모는 처음에 반대했다. 미술평론가인 아빠 이주헌(45) 씨와 엄마 김선희(39) 씨는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다. 자식이 의무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다”라며 교산이를 말렸다. 하지만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또한 부모의 의무”라는 교산이의 설득에 그만 백기를 들고 말았다.
엄마 김선희 씨는 두 달이 돼가는 교산이의 홈스쿨링에 대해 98점을 매긴다. 혼자서도 하루 일과를 잘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형과 두 동생이 등굣길에 나서는 8시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강아지 ‘바우’를 산책시킨다. 9시부터 12시까지는 인터넷으로 EBS 강의를 들으며 공부한다. 국어·영어·수학·과학·사회 과목을 수강하는데, 수강시간표도 혼자서 직접 짰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보통 만들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케이블TV에서 매일 방송되는 영국의 만들기 프로그램 ‘아트어택’도 빠짐없이 시청한다. 매주 화요일에는 집 근처 공방에 가서 목공을 배운다. 엄마에겐 수납이 가능한 화장대 의자를 만들어줬고, 요즘은 아빠에게 선물할 책장을 만드는 중이다. 좋은 전시회가 열리면 엄마와 함께 다녀온다. 평일 낮에 다니니까 북적거리지 않아 좋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위대한 의자전’에 다녀와 독특한 디자인의 모형의자를 만들어보았다. 철사로 만든 의자 틀에 톱밥을 붙이는 데 무려 10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부모에게 배우거나 학원 수강·독학 등 홈스쿨링 방법 다양
교산이는 홈스쿨링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미술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다. 혼자서 EBS 강의로 공부하는 것도 대학 갈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교산이는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학습 진도가 더 빠르다”면서 실력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 씨는 “처음엔 내가 뭔가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많았지만 중학생 정도 되면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나이인 것 같다”면서 “오히려 나이 어린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아 즐겁다”고 했다.
획일적인 교육내용, 학교폭력, 왕따 등으로 공교육 위상이 무너져가면서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이 한 해에 5~6만 명에 달할 정도다. 특히 초등학교 취학유예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로 2003년 1만8956명에서 2004년 2만9602명으로 껑충 뛰었다.
학교를 떠난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해외유학을 떠나거나 대안학교에 입학하는 것 이외에도 최근 들어 집에서 공부하는 홈스쿨링을 선택하는 아이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지만 전국적으로 5000여 가정이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간디학교 홈스쿨 네트워크 ‘학교너머’의 김병삼 대표는 “작년에는 하루 한두 건이던 홈스쿨링 문의전화가 올해 들어 서너 건으로 늘었다”면서 “홈스쿨링 인구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나강혁 군과 엄마 신수정 씨. 오른쪽은 강혁 군이 쓴 홈스쿨링 일기.
열세 살 강혁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강혁이 엄마 신수정(39) 씨는 어느 날 아침 아이가 “엄마, 나 학교 안 갈래요” 하자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몇 개월 지난 뒤 신 씨는 아이가 쓴 글을 읽고 왜 학교 다니기를 싫어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혁이는 ‘이런 학교라면 다니겠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체육운동, 즐거운 생활을 다른 걸로 바꾸지 않는다. 자습을 너무 많이 시키지 않는다. 비겁한 반장은 GO AWAY!’라고 썼다. 신 씨는 “반장이 강혁이를 미워해서 떠들지도 않았는데 이름을 적어냈고, 반장 말을 그대로 믿은 선생님한테 혼이 났다고 속상해한 적이 있는데, 그게 큰 상처가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강혁이는 수학과 영어를 제외하고는 꾸준하게 공부하는 ‘과목’이 없다. 엄마 신수정(39) 씨는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지는 않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을 배우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행·예체능 등 학교에선 하기 힘든 다양한 경험 가능
대신 강혁이는 관심사에 따라 자유롭게 공부한다. 오전에는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관심 있는 책을 골라 읽고, 오후에는 농구와 태권도를 배운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영어와 수학을 공부한 다음 컴퓨터를 하거나 만화책을 읽으며 논다. 엄마와 함께 틈틈이 청소년수련원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열리는 강좌나 캠프에도 참여한다. 지금까지 인문학, 동양화, 만들기 수업 등을 듣고 녹색연합에서 주최하는 캠프에도 참가했다. 신 씨는 “혹시나 학교에 가고 싶어할까봐 두세 달에 한 번씩 ‘학교 가고 싶니?’라고 물으면 ‘지금이 훨씬 좋은데 엄마 왜 그래’라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열여섯 살 가진이는 엄마의 제안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 엄마 신미경(49) 씨는 “학교의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이 디자이너가 꿈인 아이에게 오히려 해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질문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성격에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이 맞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
인테리어 디자이너 출신인 신 씨는 교과목 학습은 사교육에 맡기고, 자신은 디자인에 대한 아이의 관심을 충족시키고 창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엄마와 함께 전시회나 건축물 등을 보러 다니고 디자인 전문잡지를 읽으면서 토론하는 것은 가진이의 중요한 일과다. 지난해에는 국제자동차전시회에 출품된 이탈리아 작품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당장 짐을 꾸려 이탈리아로 열흘간의 디자인 여행을 다녀왔다. 가진이 책장은 엄마가 골라준 디자인, 산업, 경영 관련 책으로 가득하다.
홈스쿨러라고 해서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학교와 학원, 집만을 왕복하며 지내는 아이들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세상을 배워나간다. 경기 양평에 사는 홈스쿨링 4년차 종건(17)이는 벌써 ‘저자’가 됐다. 홈스쿨링 경험담을 책으로 묶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겨 지난 연말 ‘학교탈출! 이제는 선택이다!’라는 책을 펴냈다. 책·영화 등을 통해 역사 공부하기, 거문고 배우기, 새만금 야외학습, 광주 순례, 강화도 유적답사, 백두대간 종주 등의 현장학습 등 지난 기록을 담아냈다. 3월부터는 국가청소년위원회, 청소년참여위원회의 위원으로 뽑혀 활동 중이다. 종건이는 “20명 위원들 중 홈스쿨러는 나 혼자뿐”이라면서 “홈스쿨러 지원 정책안을 제출해뒀다”고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한 이종건 군의 연주 실력은 수준급이다.
학교처럼 공부 강요하기 금물 … 갈등 빚다 학교 돌아가기도
홈스쿨링의 단점은 또래 친구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진이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이제 중3이 되니까 주말에도 학원을 다녀서 만나서 놀기가 쉽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종건이는 “학교 다니는 애들은 청소년참여위원회에 올 때도 문제집을 싸가지고 온다”며 혀를 내둘렀다.
홈스쿨링 아이들에게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간디학교 홈스쿨 네트워크 ‘학교너머’는 매달 한 차례씩 홈스쿨러 캠프를 열고 있는데, 30여 명의 참가자 중 80%는 매달 꼬박꼬박 캠프에 참가하는 아이들이다. 홈스쿨링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과의 만남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인 셈. 김병삼 대표는 “지역 중심의 홈스쿨링 네트워크가 조직돼 평소에도 홈스쿨링 아이들이 또래와 어울릴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디자이너가 꿈인 홈스쿨러 김가진 군은 엄마와 함께 디자인 전문잡지를 즐겨 읽는다.
이에 김병삼 대표는 “홈스쿨링을 선택하기 전에 부모와 아이가 홈스쿨링이란 새로운 교육방법이지, 학교 공부를 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그는 “좀더 빨리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방편으로 홈스쿨링을 택하려 할 때 아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학교에 계속 다니게 하는 것이 낫다”고 덧붙였다.
홈스쿨링에 도전하고 있는 부모와 아이들은 ‘학교 밖에도 길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가만 생각해보면 국가가 교육을 일임받은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신미경 씨는 “세상이, 사회가, 또 우리 아이들이 변했는데도 학교만큼은 내가 다니던 3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이주헌 씨는 “이제는 시스템 밖에서 살아도 굶어죽지 않는 시대가 됐기 때문에 굳이 학교를 다녀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신수정 씨는 “앞으로 ‘간판’보다는 진짜 ‘실력’을 요구하는 시대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온 홈스쿨러들이 더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모든 아이들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올 필요가 없듯이, 학교가 싫은 아이들이 꾹 참으면서 학교에 다닐 필요도 없다. 싫든 좋든, 옳든 그르든 이미 실험은 시작됐다. 이왕이면 성공적인 실험이 되도록 관심과 지원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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