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하버 풍경 (호주 관광청 제공· 이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사시사철 파란 색깔을 띠는 시드니 하버에는 하얀 돛단배들이 두둥실 떠다니면서 해외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어 모은다. 이 배들은 제2의 인생을 향해 출항하는 신혼부부의 결혼식장이 되기도 하고, 한평생의 항해를 마치고 또 다른 피안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영결식장이 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전 세계로 휴가 여행을 떠나는 유람선의 출항지가 되어 심심치 않게 오색 종이테이프가 휘날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토록 낭만적인 수상도시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울 때가 있다. 휴가지로 떠나는 유람선에서 광란에 가까운 섹스파티가 열리고 사람이 죽기까지 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로 떠돌던 ‘유람선 요지경’이 최근 속개되고 있는 한 재판에서 백일하에 드러나 호주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1989년 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복잡하게 얽힌 네 남녀의 관계를 통해 성적으로 억압된 현대인의 상처와 그 치유 과정을 그린 영화다.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최근 시드니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호화유람선 살인사건을 보도하면서 이 영화와 똑같은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뽑았다.
유람선 ‘퍼시픽 스카이’의 객실 내부.
퀸즐랜드 주 출신의 이혼녀인 다이안 브림블(42) 씨. 그녀는 2002년 9월22일 열두 살짜리 딸과 여동생, 조카, 친구 등과 함께 남태평양 바누아투의 포트빌라까지 다녀오는 ‘퍼시픽 스카이’ 유람선을 타고 시드니항을 떠났다.
“엑스터시 은밀히 제공” 충격 증언
브림블 씨 일행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 망망대해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바다만큼이나 큰 해방감에 젖어들었다고 한다. 평소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브림블 씨는 일명 ‘네 멋대로 놀아라!’로 소문난 ‘출항파티’에서 한껏 고조된 분위기에 젖었다고 사고 당일의 목격자들은 증언했다. 문제는 댄스파티장에서 발생했다. 그곳에는 8명의 남자 일행이 있었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에서 온 30대 남자들은 진작부터 질펀하게 벌어지는 선상파티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퍼시픽 스카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들(왼쪽). ‘유람선 요지경’에 대한 법정 증언에 나선 여성.
더 충격적인 증언은 그 다음에 나왔다. 테일러 씨는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이성을 잃은 여행객들은 옷을 다 벗은 채로 선상을 돌아다니는가 하면 공공장소에서 성관계를 갖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 일쑤”라고 밝혔다.
그런 유람선의 ‘핑크빛 상황’에서 브림블 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튿날 새벽 4시20분경까지 그녀와 함께 춤을 추었던 남자 일행 중 4명이 쓰던 객실에서 오전 8시30분경 그녀가 알몸 시체로 발견됐다.
이 끔찍한 사건은 마치 유람선의 밑창처럼 수면 아래 잠겨 있다가 가족의 지속적인 항의와 경찰의 수사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됐다. 또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속속 증언대에 서고 퇴직한 유람선 직원들도 ‘요지경 유람선’ 관광 실태를 폭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은 “브림블 씨가 오히려 우리에게 치근거렸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모처럼의 휴가를 망치고 말았다”며 “사실 그녀는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었다”고 해 유족의 분노를 샀다.
용의자들이 살인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자 이 사건을 수사해온 연방경찰은 6월15일 법정에서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증언한 비디오테이프(사건 당시 현장녹화 포함)를 증거물로 법정에 제출했다. 그러자 퍼시픽 스카이의 전 연예담당 대표가 심경 변화를 일으켜 사망 사고의 경위를 증언하기 시작했다.
2년 전 한국 여성도 성폭행당해
브림블 씨 측 변호사는 “퍼시픽 스카이의 모회사인 P·O유람선사가 남성 고객에게 보내는 광고엽서에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과 진탕 마시고 떠들기(orgies with bikini-clad women)’라는 광고문구가 적혀 있다”고 폭로했다.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8명의 남자들도 이 광고엽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P·O유람선사는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다음에야 문제의 광고를 중단하고 공개사과를 했다.
미국 속어 ‘스파이크(spike)’는 음료수에 술이나 마약을 몰래 섞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런데 퍼시픽 스카이 유람선 사건 이후 호주에서는 ‘드링크 스파이킹(drink spiking)’이라는 용어가 각종 뉴스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스파이크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속어다.
2년 전 시드니를 여행하던 한국 여성 2명이 처음 만난 알제리 국적의 남자 2명한테서 약물이 섞인 술을 얻어 마신 뒤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여성들은 2월 화상전화로 법정 증언에 나섰다. 이들은 “술을 마신 후 심한 두통이 몰려오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거절했지만 피고가 계속 옷을 벗겼다. 한동안 혼절했다가 깨어나자 그는 또다시 성폭행을 했다”고 증언했다. 자이트와 사마드라는 이름을 가진 드링크 스파이킹 범죄단은 6월2일 유죄 평결을 받았다. 한편 퍼시픽 스카이 유람선 재판도 곧 선고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다.
세계적인 관광국가인 호주에서 국내 및 해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잇따라 발생하자 호주 국민은 크게 실망한 가운데 재판 결과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호주의 저명한 심리학자 이안 히키 박사는 최근 TV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주 국민 4명 중 1명이 우울증을 앓을 정도로 현대인의 고독이 심화되고 있다. 전에 없는 유형의 성범죄 또한 늘고 있다. 물신숭배의 시대에 정신 건강을 잃은 탓이다. 정신 건강을 회복하는 데 더없이 좋은 여행 문화가 변질되지 않도록 관광업계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