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젊은 여자만 밝히던 찰스(잭 니콜슨)는 결국 중년의 애인(다이앤 키튼)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중년 독신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이혼한 사람들이 ‘돌아온 싱글’이라며 명랑하게 인사하니까, 내가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참석자들은 ‘유부녀’인 내가 먼저 가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굴기도 했다.”
한 씨는 중년의 싱글들이 서로에게 새로운 상대를 소개해주고, 얼굴을 붉히며 데이트한 얘기를 들려줄 때는 부럽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베이비붐 세대의 중년 싱글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40~49세 남녀 중 독신은 1990년 7.9%에서 2000년에 10.3%, 2005년엔 13%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보다 앞서 베이비붐 현상을 보인 미국에서는 45~59세 성인 중 독신 비율이 1980년 18.8%, 2003년엔 28.6%였다. 중년의 미국인 3~4명 중 한 명 정도가 싱글인 셈이다.
이처럼 중년 싱글의 수가 늘고, 중년들이 스스로를 젊게 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중년을 맞은 베이비붐 세대의 성(性)과 사랑은 이제 사회적 화두 중 하나가 됐다.
이혼율과 성의식 변화,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충격
“이혼율과 성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각종 데이터를 보면, 지난 10년간 중년의 성의식 변화는 우리나라가 축구 변방에서 하루아침에 월드컵 4강에 들어간 정도의 충격입니다. 10년 전의 중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교적, 도덕적 엄숙주의에 의해 금욕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성 관련 약물 처방과 수술, 치료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가 됐습니다. 아마 이렇게 성적으로 활기(?)찬 나라도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에 ‘케겔 운동’을 전파해 유명해진 성의학자 설현욱 박사의 말이다. 그는 1998년 ‘비아그라’ 류의 발기부전제가 판매되기 시작한 것을 1905년 프로이트의 성이론 발표와 60년대 피임약 시판 이후 가장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인들이 손쉽게 발기부전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중년의 성과 사랑에 대한 인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성적 욕망이란 정말 강력합니다. 가정, 경제력, 사회적 지위 등 많은 것을 이룬 중년이 성적 욕망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45~50세의 남성과 40~45세의 여성들은 성적 욕망과 팬터지에 달뜬 10대 청소년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 성적 에너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이트의 과격한 수제자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빌헬름 라이히(1897~1957)는 성적 욕망을 해방시켜 계급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30년대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결합시키려 했던 그의 이론은 양쪽에서 파문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최근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 의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베이비부머 중년의 가장 큰 특징은 ‘몸’에 돈과 시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박사는 “중년기에 이르러 상실에 대한 깨달음이 뚜렷해지면, 자기 성취 욕구에 대한 ‘성질’이 달라진다. 젊은 시절에는 남이 보기에 멋진 한 방을 날리고 싶어하지만, 중년이 되면 대중의 인정보다는 나를 아는 한 사람의 인정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고 말한다. 중년기에 이상적인 상대는 자신에게 ‘참 열심히 살았다’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철없던 시절 연애보다 지금이 더 애틋”
중년의 한 싱글 여교수(50)는 “7년 전에 이혼했다. 남편에게 다른 상대가 생긴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마흔을 넘긴 내가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만은 분명히 들었다. 그때 몹시 절망했다. 몇 년 동안 아이의 대입 준비에 매달리다가 최근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이도 많고, 남편에 비해 사회적 지위나 돈도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나를 여자로 인정해준다는 점 때문에 행복하다. 그도 나도 섹스가 쉬운 나이는 아니다. 내가 발기부전제 처방을 받아와야 하지만 서로 노력하는 것이 행복하다. 철없던 시절의 연애보다 지금이 더 애틋하다”고 말한다.
설 박사는 “특히 50대를 넘은 중년의 성적 욕망은 성욕과 거의 관계가 없다. ‘외로워서’다. 약물을 사용하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중년 남자가 섹스에 집착하는 것은 외로움의 ‘액팅 아웃(표출)’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중년이 성과 연애에 적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도록 사회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년의 사랑과 성에 대한 관심은 때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각종 대중매체가 성적 욕망과 몸에 대한 관심을 수시로 자극하지만, 지금 40대를 넘어선 중년층은 그것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젊었을 때 사랑이란 쟁취하거나 억눌러야 하는 ‘무엇’이었다.
아트 상품을 만들어 기업 홍보용품으로 납품하는 일을 하는 한 젊은 여성 디자이너는 “사업상 중년 남성을 많이 만나는데 여성들과의 관계에 대한 욕구가 종종 성희롱으로 귀결되곤 한다. 정서적으로 서투르니까, 권력관계로 여자를 정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여성 사업가는 일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성적 욕망의 표출이 극단적으로 왜곡돼 나타나는 것이 ‘치정’이다. 서울 경찰청 과학수사계의 한 관계자는 “살인이나 살인미수 같은 강력범죄 중 애정 문제가 관련된 것으로 보이면 이를 ‘치정’이라고 한다. 강력사건의 70%가 치정으로 추정된다. 강도보다는 애인에게 살해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특히 40대 이상 중년층의 치정 사건이 많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인 듯하다”고 말했다.
‘애인 많은 여자가 열심히 사는 여자’ 소리 나올 정도
치정 사건보다 더 흔한 건 ‘간통 사건’, 즉 불륜이다. ‘남편만 바라보는 여자는 한심한 여자이고 애인이 하나면 양심 있는 여자, 둘이면 세심한 여자, 그 이상이면 열심히 사는 여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서구에서는 혼외정사 경험률이 남자는 75%, 여자는 65%라고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비뇨기과와 정신과 의사들은 각종 데이터로 유추해볼 때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일 것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이제 갓 50세를 넘어선 한 중년 여성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도, 남편도 여러 차례 불륜의 위기를 겪으며 서로 의심하고 싸우고 적당히 체념하면서 살아왔다. 다행스러운 점은 서로 이런저런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다. 얼마 전 남편이 ‘주몽’이란 드라마 보는데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늙은 남자가 드라마 보면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 못나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남편이 젊은 여자와의 불같은 연애가 아니라, 같은 꿈을 향해 가는 주몽과 소서노의 ‘의리의 사랑’을 그리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도 사랑이 아닐까?”
중년의 사랑은 흔히 ‘뒤늦게 찾아온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중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낡고, 추하고, 사소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에 도달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중년에 이른 사람들의 깨달음이다.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이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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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일부는 여성동아 2006년 7월호에서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