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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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에서 소리채집가로 “우리 가락 미치도록 좋을씨고”

  • 이미숙 기자 leemee@donga.com

    입력2006-07-19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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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작가에서 소리채집가로 “우리 가락 미치도록 좋을씨고”
    ‘미친놈’이라 불러도 좋았다. 무모하기 짝이 없기야 누가 본들 매한가지일 터. 하여 무시로 등짝을 향해 꽂히는 비난 정도는 예사가 되었다. 온몸의 잔털이 일제히 오스스 일어서던 그날의 ‘소름’ 이후 잘나가던 사진작가 김영일(45)은 생의 궤도를 틀었다. 일생을 걸고 매달렸던 사진을 젖혀두고 뜬금없는 ‘우리 소리 채집가’가 되어 전국을 누비길 몇 차례. 우리 가락이 미치도록 좋았다. 스스로도 ‘미쳤나 보다’고 생각했던 세월이었다. ‘삼천리 광야를 광인이 되어(廣野狂人之行)’-산으로 골로 바닷가로, 목에 건 카메라보다 손에 든 녹음기와 마이크를 걱정하며 산 12년 끝에, 국내 처음이자 세상에서 딱 하나뿐일 국악전문 음반회사 악당(樂黨) 이반을 만들고 7장의 국악 음반도 내놓았다.

    “원래 저는 국악만 나오면 채널을 돌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부친이 클래식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만 듣고 자란 탓도 있고요. 근데 그날은 정말 소름이 확 돋더라구요. 웬만해선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타입이어서 남들이 참 냉정하다고 하거든요. 그런 내가 소리하는 채수정(이화여대 박사과정, ‘흥보가’ 이수자) 씨를 만났던 날은 셔터를 못 눌렀어요.”

    1994년으로 기억한다. 한 국악잡지의 사진 의뢰로 촉망받는 젊은 음악가들을 스튜디오로 불렀다. 채수정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각기 전공을 살린 자연스러운 사진이 나와야겠기에 아무 노래나 부르며 동작을 잡아보라 했던 청이 그의 운명을 뒤틀 줄 몰랐다.

    “아~서라~세에~상사~쓸~데없다~….” 난생처음 듣는 남도소리, 편시춘(片時春)이라 했다. 인생사 마치 춘몽 같다는 가락이 등골을 훑었다. 좋아서 돋는 소름은 진한 박하처럼 사람을 떨게 한다. 경험해본 적 없는 전율이었다. 그날은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숱하게 보고 찍어온 유명인사들, 정명화 경화 명훈 형제를 찍을 때도 없었던 일이었다.

    12년간 전국 누비며 국악인 150명 만나 채집



    홍조에 두 볼이 달뜬 앳된 소리꾼은 그날부터 김영일의 ‘국악 인도자’가 되었다. 소리를 하는 이들은 각지에 은적(隱迹)한 고수(鼓手)를 찾아 헤맨다. 소리는 북을, 북은 그 소리를 넘어서야 비로소 평정이 되는 소리 공부, 그와 함께 명인 명창을 찾아 낚았던 것이 소리였던가 세월이었던가.

    사진작가에서 소리채집가로 “우리 가락 미치도록 좋을씨고”

    ‘악당 이반’ 3층에 있는 국악전문 녹음실은 창덕궁 연경당 내부와 똑같이 설계되었다.

    록이나 블루스, 힙합은 알아도 우리 단가는 한 가락도 모르는 무정한 세상, 양이(洋夷)의 음악에 밀려 세월을 피해 숨은 국악인을 어림잡아 150여 명 만났고, 300여 장의 마스터테이프를 떠놓았다. 음반을 녹음하기 전 단계가 마스터테이핑인데, 제대로 된 소리를 뜨기 위해 그가 들인 공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의 유수 음반사 견학을 포함해 리코딩 엔지니어링부터 음향까지 독학으로 배우며 ‘미친놈’ 외에 ‘독하다’는 소리를 덤으로 들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은수의 콧노래를 담던 그 기계, 이동식 고성능 스위스제 녹음기 나그라(Nagra)나 채널 4개짜리 노이만 M149 튜브마이크는 공부를 하지 않고 에둘러 덤비기엔 너무 고가의 장비들이었다. IMF 사태가 한국을 덮친 1999년이었다.

    “우리 국악의 음역은 초저역도 초고역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 소리에 맞는 녹음이 필요했어요. 국내 음반사 중에 저희(樂黨)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녹음하는 데가 별로 없어요. 현재 활동하는 가수 대부분이 외국에서 음반을 리코딩해 오는 것도 그래서죠. 그 비싼 기계들을 차에 싣고 산으로 들로 헤맸으니, 미친놈 소릴 안 듣는 게 더 이상하죠.”

    멀쩡하던 가장들이 길거리로 나앉던 그 시기에 녹음장비 구입에 그가 쏟아 부은 돈은 중형차 몇 대 값이 넘었다. 그렇게 뜬 제 피 같은 테이프를 들고 음반사 문을 두드렸다. 국가 존망이 걸렸던 경제 환란에다 MP3의 등장으로 어지간한 음반사도 줄줄이 문을 닫던 상황에서 국악 음반을 내자고 덤비던 서른 후반의 사내. 무모함도 때로는 덕(德)이 될지니. 이를테면 중용(中庸)의 3덕 중 용(勇)쯤으로 해두자. 그 용맹으로 온 세상에서 하나뿐일 국악 음반 주식회사가 생겼으니 말이다. 그런 음반사가 어찌 하나일 리 있겠냐고 묻지도 말 일이다. 1년에 산조 음반 스무 장도 안 팔리는 현실이니까.

    사실 이 12년의 작업과 결실은 그루비주얼이라는 화수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루비주얼은 그가 오랫동안 운영해온 사진·영상회사다. 중앙대(81학번) 사진학과 4학년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3년을 더 공부하고 돌아와 1989년부터 본격적인 상업사진을 찍다가 차렸다. 실장이 11명인 회사이니 작은 규모가 아니다. ‘샘이 깊은 물’의 포토디렉터, ‘행복이 가득한 집’ ‘월간 음악’을 포함한 다수의 잡지와 사보, 인물 사진, 지면광고와 영상광고까지 많은 작업을 그루비주얼을 통해 이뤄냈다. 제일기획과 웰컴 등 국내에서 손꼽히는 광고회사나 외국계 광고회사의 작업 수주도 상당량이다. 그렇게 사진으로 번 돈을 소리에 쏟았던 것.

    2003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악당 이반’을 차린 뒤 국악 음반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욕구(樂欲)가 욕심(物慾)도 버리게 했다. 그루비주얼을 법인으로 바꾸고 대표자리를 후배에게 넘겼다. 대신 회사의 수익 중 10%는 ‘악당’에 투자하도록 조건을 달았고 지난해 4월 ‘악당’ 역시 법인으로 만들었다. 그가 낸 첫 음반 외 어느 음반에도 그의 이름이 없고 ‘악당 이반’의 ‘악’자도 찾아볼 수 없으니 판권마저 갖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보였다.

    사진작가에서 소리채집가로 “우리 가락 미치도록 좋을씨고”

    그의 생가를 개조한 한옥 ‘소리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판소리 명창 박송희 씨.

    “첫 음반을 내고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에 음반 뒤에 제 이름을 넣었던 게 어설픈 짓이었어요. 국악은 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콘텐츠지요. 사진이나 찍던 놈이 덤벼들어 녹음기 마이크 하나 가지고 이 큰판을 휘저어선 안 될 일이지 않습니까? 제가 잠시 맡은 이 작업을 하루빨리 전공자들이 나서서 이어가주길 바랄 뿐입니다.”

    7장 음반 발매 … 기악 독주악곡 산조에 푹 빠져

    김영일은 종로구 계동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다. 조상대부터 치면 17대째 같은 동네를 지키고 있으니 원조토박이쯤 될까. 고조부께서 순종을 가르친 대제학이었다고 한다. 광나루에 있던 여름 집 누마루에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여름 한철을 보내시던 할아버지와 반대로 부친(김승태·85)은 클래식 마니아였다. 일제강점기, 도쿄에서 배로 한 번에 20~30장씩 묶여 들어오던 LP판은 언제나 서울이 아니라 예향으로 이름난 평양으로 직행하게 마련이어서 딴 볼일 없이 LP 쇼핑을 하러 평양을 드나들곤 했다던 젊은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빛바랜 60여 년 전 아버지의 등 뒤에 오버랩되는 자신의 이런 오늘이 생경스럽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육사 9기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동기였던 아버지는 쭉 군에 몸담았다가 5·16 후 예편했다.

    악당 대표 사무실 한 벽을 다 채우고 천장까지 빼곡히 쌓여 있는 클래식 음반은 살아온 날만큼 닦여 있을 그의 음악 공력으로 다가온다. 남의 음악을 듣다 보니 어느 날 깬 우리 소리를 비유하자면 ‘득음(得音)’이 아닐까. 6남매 중 막내인 그에게 생가를 임대하고 경기도 광주에서 만년을 보내는 부친은 이즈음 말러의 음악에 중독돼 있다. 부자간이지만 물질에 관한 한 아버지에게 손 벌리지도, 자식이라고 주지도 않는 국화빵 부자다. 회사 바로 옆에 있는 그 집을 ‘소리재’로 꾸며 소리꾼들에게 무료로 개방했지만 집세는 꼬박 부친에게 내고 있다고 한다. ‘소리재’는 그가 만난 국악인 중 가장 강한 인상을 받았던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송희(79) 선생이 제자들을 기르는 강습실이자 소리꾼들의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다.

    최근 회사 건물 3층에 창덕궁 연경당과 똑같은 넓이와 크기로 국악전문녹음실을 만든 그는 음반을 만들 때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녹음을 마치는 퓨어리코딩을 고집한다. 녹음실을 짓기 전에도 서원이나 마당 있는 전통 한옥을 찾아가 관객을 모아놓고 녹음을 해왔다. 우주 삼라만상과 같은 파동을 타야 살아 있는 우리의 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객과 주고받는 추임새와 지저귀는 새소리, 물소리가 가락에 함께 어우러진 소리, ‘노니소(逍), 노닐어요(遙), 놀아유(遊)’, 구속 없는 절대 자유에서 누리는 소요유(逍遙遊)의 경지가 바로 우리 소리다.

    사진작가에서 소리채집가로 “우리 가락 미치도록 좋을씨고”

    조선시대의 운치를 그대로 간직한 ‘소리재’ 앞마당.

    “연경당은 조선시대 왕들이 백성들이 어찌 사나 현장체험용으로 지은 별당이에요. 악기 다리의 70~80%가 바닥에 닿아야 하는 우리 악기는 서양악기와 음원 형성 위치가 완연히 달라요. 녹음 위치에 따라 음색이 좌우되는데 연경당은 우리 가락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죠.”

    연경당에서 얼마 전 월드컵 기념앨범 ‘대한민국 국악 응원가’를 만들었다. 음반 한 장을 녹음하는 데 드는 비용이 최소 1000만원, 앞으로 남은 마스터테이프를 모두 CD로 낼 그의 계획에 돈이 장애가 되리라는 사실을 얼마 전 절감했다. 살면서 아이들 학비를 걱정할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남의 눈에 한심하게 보일 정도니 당사자의 아내(이은미·43)가 보기엔 얼마나 한심할까.

    친한 대학 동기의 동생인 아내와 1990년에 결혼해 중학교 3학년 딸과 1학년 아들을 뒀다. 드라마틱한 줄거리 없는 연애가 그렇듯 별로 해줄 얘기는 없지만 살면서 불평 한 마디 안 하는 아내, 그녀에게서 얻는 영혼의 정화(淨化)가 고맙다.

    판소리와 구음(口音·입으로 악기 소리를 흉내 내어 연주하는 악곡), 악기를 넘나드는 그의 국악 사랑은 이 여름, 산조에 꽂혀 있다. 산조는 가야금·거문고·대금·해금·피리의 각 악기가 장구의 반주로 연주하는 기악 독주악곡이다. 19세기 초 김창조가 시나위 가락에 판소리 가락을 도입해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산조를 만든 이후,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음악 ‘산조’. 선생의 가락을 온전히 체득하면 그 가락을 모조리 작파하고 자신의 산조류(類)를 다시 집대성하므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사마귀처럼, 검은 거미처럼, 스승을 먹고 올라서는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음악이 그를 삼키고 있다. 이미 머리부터 심장까지 그 입 속으로 빨려든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악당(樂黨)’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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