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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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들고 상처난 한글 보면 가슴이 아려요”

‘우리말 편지’ 보내는 농업공학 박사 성제훈

  • 이미숙 주간동아 아트디렉터 leemee@donga.com

    입력2007-01-24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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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들고 상처난 한글 보면 가슴이 아려요”
    스팸메일이겠거니 했다. ‘우리말123’이라니, 순화시킨 제목으로 가장한 광고일 테지, 전자우편함의 절반을 더 채우고도 “아직 배고프다”며 밤낮없이 날아드는 광고더미가 지겨워 열어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리길 근 한 달. 돈 내라고 아우성인 온갖 고지서 외에 종이 편지라곤 만나기 힘든 세상이어서 편지가 ‘감동’보다 ‘피곤’이 된 요즘이 아닌가 말이다. ‘저는 절대 똥기지 않을 겁니다’, 한날 편지 머리에 붙어온 부제목이 웃겨 선심 쓰듯 한번 마우스를 눌러보았다. ‘똥기다’니, 읽는 이가 튕겨도 뭐할 판에 이 어인 낚시질?

    그러나 ‘똥기다’는 낚시가 아니었다. 모르는 사실을 깨달아 알도록 암시를 주는 행위가 똥기는 것이란다. 여기서 하나 더! 그럼 ‘뚱기다’는 뭘까? ‘뚱기다’는 팽팽한 줄 따위를 퉁겨 움직이게 한다는 뜻도 있지만, 알고 있는 어떤 일을 눈치채게끔 슬며시 일깨워준다는 의미로 쓰인다고 편지에 씌었다. 친절하게 비슷한 말도 일러준다. ‘귀띔’과 ‘내시(內示)’. 아무래도 한자어보다는 우리 말이 낫지 싶다. 우리말 편지의 ‘똥김’에 당겨 휴지통에 처박아둔 ‘우리말 편지’들을 간추려내고, 내친김에 발신인까지 찾아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교육 사교육 합쳐 십 몇 년 국어를 배우고, 이날 이때껏 공기처럼 쓰며 살아도 몰랐던 진짜배기 우리말을 찾게끔 그가 ‘똥겨준’ 까닭이다.

    “병들고 상처난 한글 보면 가슴이 아려요”

    그의 사무실은 우리말 편지의 산실인 셈.

    그가 누리꾼에게 우리말 편지를 보낸 지는 올해로 4년째 접어든다. 편지를 눈여겨본 출판사의 제의로 얼마 전 2권짜리 책(‘성제훈의 우리말 편지’, 뿌리와이파리)도 냈다. 책 날개에서 밝혔다시피 성제훈(40)은 농민들이 읽는 잡지에 ‘다비하면 도복한다(비료를 많이 주면 작물이 힘이 약해져 비바람에 쉽게 쓰러진다)’거나 ‘포장 내 위치별 지력의 변이가 상당하다(논 안에서도 이곳저곳의 땅심이 다르다)’는 투로 글을 써온 사람이다.

    공무원 사회에서 쓰이는 관용어더미를 습관처럼 구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마주친 ‘복불복(福不福)’이란 단어에 충격을 받았다. 꿈에도 ‘볶을복’인 줄로만 알았더니! ‘우리말 견성(見性)’에 이르게 한 충격이랄까. 그러던 2003년 여름, “다비하면 도복하니가 당최 뭔 말이냐”며 한 농부가 건 전화가 그를 본격적인 국어 공부로 이끌었던 것.

    곧장 국립국어원 교육과정에 등록하고 1주일간 매일 8시간씩 우리말을 다시 배웠다. 국립국어원은 누구나 신청만 하면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그가 사는 수원에서 국어원이 있는 서울 강서구 방화 3동까지는 오가는 데만 2시간 넘게 걸리므로 신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지만, 그 정도의 어려움쯤이야 교육기간 동안 일취월장한 우리말 실력으로 갈음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새로이 눈떠 본 우리말의 속살을 혼자 보는 건 아까운 일이었다.



    우리말 속살에 눈뜨고 나니 교열 생활화

    “병들고 상처난 한글 보면 가슴이 아려요”

    직접 개발한 ‘작물 건강도 센서’로 벼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위).<br>농촌진흥청에 딸린 온실에서 보리의 작황도를 살펴보는 성제훈 박사. 그는‘우리말’과는 거리가 먼 이공계 출신 과학자다(아래).

    처음 주위 동료들과 지인들에게 열흘에 서너 통씩 띄우던 편지가 차츰 늘어갔다. 알음알음 편지 추천이 늘어가자 “어느 순간부터 편지에 발이 달리기 시작하더라”고.

    “한번 ‘우리말’에 꽂히니까 교열이 생활이 되더군요. 귀나 눈에 우리말 거름망이나 달린 양 잘못 표기된 말이나 발음은 너무 쏙쏙 들어와요. 특히 공중파 진행자들, 아나운서들이 하는 말실수는 그냥 못 넘기죠. 반드시 적바림(메모)했다가 방송국에 지적합니다. 마찬가지로 길 가다가도 걸리는 게 있으면 꼭 고쳐놓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지난 가을 경남 김해로 출장을 갔더니 거기 걸린 안내판에 ‘노무현 생가 전방 50M’로 표기돼 있지 뭡니까. 바로 사진을 찍어서 해당부서로 메일을 보냈더니 ‘50m’로 고친 안내판을 찍어 제게 되보냈더군요.”

    단위에 관한 외래어 표기는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를 써야 맞다. 오늘 아침 TV뉴스 방송 전에 언뜻 스친 광고며 7시44분 ‘세상의 아침’(KBS)에 나온 자막 오기(誤記)도 그의 수첩에 적힌 상태다. W건설 아파트 광고를 보면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집을 선물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의 세 접속사는 쉼표를 찍어선 안 된다는 것, 방송 자막은 “좋은 남편이 될께’로 나왔으나 ‘될게’로 수정해야 맞는 말이란다. 지난 12월19일 저녁 9시20분에 방영된 KBS 뉴스도 마찬가지. ‘봇물 이루는 연말연시 해외여행객’이란 표현도 그의 그물망에 걸렸던가 보다. 봇물은 저수지에 괴는 물이므로 ‘봇물 터지듯’으로 바뀌어야 맞다고 다음 날짜 우리말 편지에 올라와 있었다.

    틀린 우리말보다 그가 더 진저리치는 말이 있으니 바로 병든 우리말이다. 외래어와 버물림된 우리말, 사람들이 이미 우리말인 줄로만 아는 일본어 찌꺼기가 그를 슬프게도 화나게도 한다. “아저씨, ‘아싸리’하게 이 돈이면 도다리 한 마리와 ‘똔똔’이니까 ‘아나고’ 1kg으로, ‘자부동’은 살짝만 깔아서 주고 ‘다대기’는 넉넉히 주세요”, 이런 말들 말이다. 여기에는 ‘간단(簡單·かんたん)히’처럼 일본어에서 어근이 온 것도 모르고 그냥 쓰이는 말들도 물론 포함된다.

    ‘볶을복’에서 비롯된 한글사랑을 몸으로 챙기고 있는 성제훈 박사의 전공은 우리말과 거리가 먼 농업기계공학(전남대 86학번)이다. 대학을 마치던 1991년부터 4년간 전남 광주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석사과정을 끝냈고, 98년 같은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다. 학위 수여 후 시험을 거쳐 농촌진흥청으로 발령이 났고 본청으로 오기 전까지 근무하던 산하 연구소에서 ‘작물 건강도 센서’를 개발했다. 작물 건강 측정 센서란 이름 그대로 카메라로 식물의 상태를 진단하는 감지기. 벼가 어느 부위에 병이 있는지, 사과의 당도가 얼마만큼인지 하는 것들을 수치로 알려주는 기계다.

    “병들고 상처난 한글 보면 가슴이 아려요”

    앞으로는 우리말 편지에 농사에 관련한 것들을 많이 담아볼 예정이다.

    “제가 개발한 감지기도 실용화 단계로 들어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겁니다. 더구나 별다른 팀도 없이 혼자 개발하던 분야였는데 본청으로 발령이 났으니 당분간은 손대기 어려울 테고….”

    ‘우리말지기’ 전엔 “빛으로 ‘놀았다’”고 했다. 석사 논문이 ‘컴퓨터 시각에 의한 사과 결정 추출 및 분석’이었던바, 박사과정 역시 빛과 카메라를 통한 농작물에 관한 연구를 했었다. 젊은 연구원으로, 주목받는 이공계 학자로 자리매김한 그인지라 영특한 유년기를 보냈을까 물었더니 정반대였다고 한다. 7녀1남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7대 독자요,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 절신(節臣)으로 꼽히는 성삼문의 후손으로, 귀양 간 성삼문이 일군 전남 해남군 명금리(鳴琴里) 성씨 집성촌에서 나고 자랐다. 거문고가 우는 마을이라니, 귀양 온 조상의 슬픔이 흐드득 퉁겨나오는 지명이야 어찌 됐건 천둥벌거숭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향은 100m만 나가면 엄마 품 같은 바다가 펼쳐진 곳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한다. 한 점 씨종손 잘 키우겠다고 앙주먹 쥐고 일하시던 부친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다. 왜 그때 고주망태 흉내를 내며 놀았는지 영문마저 아슴하다. 하라는 공부는 뒷전이요 갈지자걸음을 하며 낄낄대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반 초주검 꼴로 직사하게 터진 다음 날 뒷간을 갔더니 길다란 지겟발이 천장에 매달려 있더란다. “어차피 공부랑 담 쌓았응게 훗날 이거나 하믄 쓰겄다”며 부친이 준비해둔 지겟작대기였다.

    주변서 잘못된 사례 수집 날마다 글쓰기 4년째

    처음 고향을 떠나 광주로 유학 나왔을 때 일이다. 키가 작아 늘 2번을 벗어나본 적이 없던 성제훈은 광주 서석고등학교 입학식에서도 맨 앞줄 차지였다. 학부형석의 한 엄마가 귀엣말로 “쟤는 장애인인가보다”며 옆사람에게 하는 말을 들은 어머니. “하늘이 두 쪽 나도 제훈이는 잘 먹이라”는 특명이 함께 자취하던 누나들에게 내려졌다. 그가 지금 이 키(169cm)로 사는 것은 다 누이들 덕이란다.

    “병들고 상처난 한글 보면 가슴이 아려요”

    성제훈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세 가지는 농업과학과 우리말 편지, 그리고 가족이다. 아들네 집에 들른 어머니를 모시고 모처럼 나선 가족 외출.

    부친은 98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교직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장가 좀 가라”던 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일이나, 석사 졸업식 때 오겠다던 부친을 박사 졸업식 때 오시라고 참석을 막은 일이 가슴에 더께로 멍울져 있다. 석사 졸업 두 달 만에 아들의 손을 놓아버리던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 그 멍울이다. 돌아가신 지 1년 후 지금의 아내(조현아·전남대 법대 88학번)를 만나 3년 연애 끝에 결혼했고 냉동시험관 시술로 6년 만에 어렵사리 얻은 첫딸(성지안·40개월)을 품에 안으며, 가뭇없이 줄어 아이처럼 작았던 부친의 몸을 안던 기억이 교차 편집되는 것도 가슴 먹먹한 멍울이다. 젊음은 영탄법으로 가고 과거는 과장법으로 남는다 했던가. 그런 그에게 젊음은 영탄조가 아니라 탄식의 방점이다.

    “박사 때 하도 영어실력이 달려 3년간 영어학원을 다녔지요. 모교 대학원생이던 아내를 그때 만났습니다. 수업이 늘 새벽에 있었으니 날마다 새벽 데이트를 한 셈이지요. 98년 2월은 제 인생의 기념비로 꼽을 달입니다. 농촌진흥청에 2월1일 발령받고 26일 박사 졸업을 하고 28일 결혼했거든요.”

    가슴 쓰린 탄식의 행간을 ‘바른 우리말지기’ ‘착한 아빠’의 모습으로 채우려는 그는 그러나 좋은 남편은 아닐지 모르겠다. ‘땡’ 치면 ‘칼’퇴근하는 공무원이 아니라 어김없이 ‘칼야근’하는 공무원인 까닭이다. 바른 우리말 쓰기 전령사 노릇을 하라고, 직장에서 따로 시간을 내줄 턱은 없을 것이고 당연히 야근 한 귀퉁이를 쪼개 우리말 편지를 다듬고 보낸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 그것도 날마다 글에 매이는 일이 어디 호락호락한가. 적절한 글감을 찾아 쉽고 재미나게 글로 옮기기 위해 관련 자료를 구하고, 책을 사들이고, 주변에서 잘못 사용하는 사례들을 수집하는 데에 드는 품이 좀 예사로울까.

    결코 많지 않을 공무원 월급을 잘라 첫 임금부터 지금껏 기부를 실천에 옮기고 사는 이 남자, 책의 인세도 모조리 사회복지공동모금에 기부했다. 자신의 각막과 장기까지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한 성삼문 17대손은 그끄저께 이사를 했다. “아빠, 원준이(둘째·20개월) 또 똥 쌌어요. 저는 화장실 가서 누는데 원준이는 만날 기저귀에다 싸요. 그쵸?” 만 세 살에 ‘싸다’와 ‘누다’를 정확히 갈라 쓰는 ‘띠앗(형제자매 사이의 두터운 정)’ 좋은 남매나, 집에 있는 묵은쌀로 바람떡을 만들어 사무실 동료들에게 맛보이는 아내와 ‘콩켸팥켸(사물이 뒤섞여 뒤죽박죽인 상태)’ 산다지만 그의 가슴은 늘 뜨겁다는 걸 안다. 1월의 짧은 해를 등지고 선 성제훈의 눈동자에 사랑이 ‘짜장’ 실렸음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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