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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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이여 독재의 짐을 벗어라

집안의 ‘대장’ 아닌 ‘인생 선배’로서 자녀 대해야

  • 이경식 작가·산문집 ‘나는 아버지다’ 저자 leeks8787@hanafos.com

    입력2007-01-24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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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부재(不在)시대’에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돈 버는 기계? 당당한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모습? 한 가정의 ‘껍데기’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0대 아들 둘을 키우는 한 40대 작가가 체험적 깨달음으로 제시하는 21세기형 아버지상(像). <편집자>
    아버지들이여 독재의 짐을 벗어라
    첫아이를 가졌을 때 어떤 ‘선배 아빠’가 나에게 충고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두 아들의 아빠였던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예절교육을 엄하게 시켜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버릇없는 것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결국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이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중추가 될 것이라고 상상하면 우리 사회가 문화적·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까지 얼마나 끔찍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적어도 우리 아이만큼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본예절을 갖춘 아이로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첫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녀석은 똘똘했고, 돌이 지난 뒤에는 말을 곧잘 알아듣고 자기 의사표시도 잘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아이를 훌륭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비장한 생각까지 하면서 녀석에게 예절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과자봉지나 휴지를 아무 데나 버리면 꼭 휴지통에 버리라고 말했다. 물론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는 매를 들고 벌을 세웠다. 돌이 갓 지난 녀석이었지만 몇 차례 혼난 뒤부터는 ‘규칙’을 잘 지켰다. 나는 녀석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했다. 녀석이 훌륭한 아이로 성장하고 있구나, 장차 이 사회에서 훌륭히 제 몫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첫돌 때부터 시킨 예절교육 ‘효과는 제로’

    그런데 웬걸, 녀석이 더 커서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는 ‘규칙’을 거의 무시했다. 그때마다 지적했지만 녀석은 자기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나더러 왜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이 갓 지나면서부터 시킨 나의 예절교육은 녀석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아버지들이여 독재의 짐을 벗어라

    헛기침 하나로도 집안을 다스리던 가장의 권위는 사라졌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한 장면.

    사실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해보면,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예절교육이라니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런 이야기를 예전의 그 선배에게 했더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예절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말을 내가 했다고?”

    “그럼요. 증인도 있는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믿었단 말이야? 그래봐야 그때는 나도 초보 아빠였는데…. 초등학생밖에 안 된 아들의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았겠니? 애들이 장가갈 나이가 된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거참, 이제 와서 따질 수도 없고, 따진다고 될 일도 아니고…. 돌 지나자마자 가혹한 예절교육을 받느라 고생한 우리 큰아이에게 미안할 뿐이다. 녀석의 무의식 속에 나를 향한 증오의 감정이 있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금의 청소년들은, 전체 인구 가운데 3차산업 종사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시대에 성장한 그들의 30, 40대 아버지들과는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어떻게 보면 ‘인종’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을 상대로 우리가 스스로를 ‘가정의 대장’으로 생각하면서 녀석들을 다스리고 때로 군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헛기침 하나만으로도 온 집안을 다스리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농경사회에서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경험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식에게 가르칠 게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의 경쟁력은 자식에게 소용이 없어졌다. 그러니 권위는 껍데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껍데기 권위를 휘두르고자 할 때 그 모습은 너무도 추하다.

    큰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녀석도 이제 충분히 컸으니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또 그 판단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휴대전화 때문에 기어코 말썽이 생겼다.

    큰아이의 휴대전화로 시도 때도 없이 문자가 날아왔고 녀석은 그때마다 답장을 보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대화를 나눌 때도 그랬다. 그래서 그것을 타박했는데 녀석은 내 타박에 삐딱하게 대꾸했고, 그 뒤로 몇 차례 되넘김이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내가 녀석의 휴대전화를 낚아챈 뒤 부숴버렸다. 그러자 녀석은 험악한 인상으로 돌변해 거세게 대들었다. 무리를 지배하던 기존 수컷의 권위에 도전하는 또 한 마리 젊은 수컷의 모습이었다.

    녀석의 그런 동물적인 모습에 나 역시 동물적 본능으로 대응했다. 권위에 도전하는 또 다른 수컷의 도전을 가차없이 물리치는 것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의무사항이 아니던가.

    대드는 아들에 손찌검했다 ‘후회막급’

    잠시 이성을 잃고 동물이 된 나는 녀석에게 그만 일격을 날렸다. 한때 무술을 연마했던 나의 손은 나도 모르게 실전을 치를 때처럼 녀석의 급소를 찌르고 말았다. 녀석은 나무토막처럼 풀썩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녀석의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내가 도대체 아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녀석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빌었다.

    다행히 녀석은 곧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녀석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녀석은 덜덜 떨면서 잘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공포 때문에 그 자리를 모면하고자 한 말이었다.

    다시 한 번 참담했다. 그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적절한 상황이 아니었다. 동물행동학자인 아이블 아이베스펠트는 “독재자는 테러라는 방법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면 나는 야수와 같은 독재자였다. 설령 우리 아이들이 우리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 수컷으로 볼지라도 우리는 녀석들을 사랑스러운 자식으로 바라보아야 마땅한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대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가장’의 개념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지도력도 아니다. 그저 늘 함께 생활하는 인생의 선배로,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와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심성을 가르치고 북돋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 아닐까 싶다. 사실 이것만 잘해도 그게 어딘데…. 그리고 솔직히, 우리 역할을 이렇게 규정하면 우리도 더 편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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