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이 좋다. 죽을 때까지 춤추고 싶다”
“욕심을 버리니 행복이 찾아오더군요.”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중년을 ‘인생의 정오’라고 불렀다. 중년은 인생의 중간결산기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란 뜻이다. 그러나 중년에 갖게 되는 성취 욕구는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생의 정오’에 살사 춤바람이 난 의사가 있고, 잘나가던 회사원에서 여행작가로, 간호사에서 연극배우로, 억대 연봉 CEO에서 산골 카페 주인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강승식(41) 씨는 춤추는 의사 선생님이다. 강 씨가 살사를 추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우연히 후배를 따라간 살사 동호회에서 그는 춤바람(?)이 나고 말았다. 춤추는 게 무척 재미있어서 병원이 끝나면 일주일 내내 동호회에 나가 살사를 췄다. 강 씨는 “춤을 추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인생도 즐거워진다”고 말한다. 살사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현재 ‘살사인’이라는 살사 클럽·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사장님인 동시에 ‘아시아 라틴문화 페스티벌’의 조직위원장이다.
7월27일부터 시작되는 ‘2006 아시아 라틴문화 페스티벌’ 준비로 한층 더 바쁜 강 씨는 병원은 동료 의사에게 맡긴 채 행사를 위해 플로어와 관계사들을 종횡무진 찾아다니고 있다. 지금은 의사와 살사 댄서라는 ‘투잡스’를 갖고 있지만, 춤이 좋아 죽을 때까지 춤을 추고 싶단다.
중년에 접어든 뒤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명예를 얻지는 못해도 그들은 하나같이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직장을 그만둘 땐 반드시 아내와 상의하라”
여행작가 이종원(40) 씨는 여행이 좋아서 11년 동안 다니던 직장(손해보험사)을 그만두었다. 평소에도 여행을 좋아하던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작가의 길로 들어선 결정적 계기는 1999년 부인과 함께 다녀온 유럽 여행.
“유럽의 명소를 돌면서 우리나라도 구석구석 한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후 틈만 나면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라 곱하기 4를 해야 돼요. 같은 여행지라도 계절마다 느낌이 다르거든요.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그래서 그는 2002년 9월 직장에 사표를 냈다. 일부터 저지르고 나서 부인에게는 “사표를 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부인은 당연히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고, 밤새도록 바가지를 긁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직장을 그만둘 땐 반드시 아내와 상의하라”고 충고한다.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작가’가 되긴 했지만, 처음엔 과연 누가 내 글을 사줄까, 누가 나를 여행작가로 인정해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 여행 카페 ‘모놀과 정수’(모놀은 ‘모여서 놀자’의 줄임말이며, 정수는 딸아이의 이름이다)를 만들었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등록했다. 열심히 하니까 길이 열렸다. 현재 그는 월간 ‘여행스케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각종 잡지와 사보에 여행 관련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수입이 일정치 않아 생활은 어렵다. 그래서 늘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제 글을 읽고 사람들이 좋아해주니까 좋고,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좋아요. 아내도 이젠 ‘잘했다’고 해요. 사실 취미가 일이 되니까 안 좋은 점도 있어요. 취미로 여행을 다닐 때는 부담이 없었는데, 지금은 여행을 하면 꼭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니까 부담이 되긴 해요.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저는 취미를 직업으로 가진 행운아이니까요. 이 세상을 떠날 때 미련은 없을 것 아니에요.”(웃음)
“더 늦기 전에 변화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경남 하동 지리산 기슭에서 녹차 농사를 짓고 있는 이창수(47) 씨는 언론사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 씨가 농부의 꿈을 갖게 된 것은 1999년 봄 지리산 녹차밭을 취재하면서부터다.
“10여 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안 가본 곳이 없는데, 유독 그 광경만은 잊혀지지 않더라고요. 차밭을 떠올릴 때마다 ‘쳇바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죠. 더 늦기 전에 변화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씨는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무조건 지리산으로 향했다. 마을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녹차 농장에 찾아가 온갖 잔심부름을 맡아 하면서 빈집 터를 기웃거렸다. 그러던 1999년 겨울, 마침내 지리산 중턱에 셋집을 한 채 얻고 “산 위에서 내 나이 마흔과 2000년을 맞겠다”며 사표를 썼다.
서울내기 이 씨에게 농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농부 이 씨는 “솔직히 현재는 농사만으로 먹고살기는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현재 생활비는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던 부인의 연금과 이 씨가 전남 순천대에서 사진학을 가르치며 받는 강의료로 충당하고 있다. 농사만으로 먹고살려면 얼마나 더 애를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처럼만 하면 금세 자리 잡을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행복하다는 게 뭔지를 아예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몸이 아무리 고돼도, 이게 바로 평화로구나 싶어요.”
”새롭게 시작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내 자신을 다시 조금씩 채워가야죠”
연극배우 지영란(56) 씨의 전업은 연세의료원 수술실 마취과 간호과장이었다. 그런 그가 1988년 서른여덟이란 나이에 ‘자신을 채우기 위해’ 20년을 일해온 병원에 사표를 던지고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사람은 시기별로 욕구가 바뀌어요. 각 시기별로 무엇을 우선으로 하느냐가 삶에서 중요한 문제죠. 그런데 병원을 그만둘 무렵, 제 욕구의 중심은 직장에서 아이들과 제 자신으로 바뀌었어요. 아이들과 나누어 가질 추억거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죠.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그것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더불어 나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간호사는 지 씨의 꿈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뜻이었다. 여자도 전문직을 가져야 남편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며 어머니가 간호대를 권했고, 지 씨는 순종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지 씨는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내가 전공을 잘못 선택했구나 싶을 정도로 연극이 무척 좋은 거예요. 학교 다닐 때 정말 열심히 연극을 했어요. 그러다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연극과 멀어졌죠. 그런데 그 연극이란 것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연극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 씨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기약도 없이 배역을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에게 주어진 배역이 바로 간호사 역. 작은 역이었지만 그는 연극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처음엔 그렇게 연극만 할 수 있으면 됐다. 그런데 일단 시작하니까 더 많은 배역과 더 좋은 배역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질수록 그는 뿌듯함을 느끼고 한층 더 젊어지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나 자신을 다시 조금씩 채워가야 하죠. 그것이 기쁨과 행복이에요.”
“억대 연봉 버리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 얻었어요.”
“억대 연봉 버리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 얻었어요.”
김종헌(59) 씨는 억대 연봉을 받는 ㈜비비안의 CEO였다. 그런 그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2003년 강원도 홍천에 ‘피스 오브 마인드(Peace of Mind)’라는 북 카페를 냈다. 김 씨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카페를 열자 많은 사람들이 억대 연봉을 받는 ‘그 좋은 자리’를 버리고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면 그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더 잘 살기 위해서”라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돈도 많고 명예도 있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의 평화와 가족의 화목을 상실한 채 외롭게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물론, 돈과 명예 다 좋죠. 하지만 인생에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죠.”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김 씨는 일에 묻혀 산 ‘회사형 인간’이었다. 30대에 회사 중역이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실적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숨가쁘게 살아야만 했다. 야근과 출장이 빈번하고, 저녁마다 이어지는 접대와 회식으로 과음 및 과식을 반복하다 보니 건강도 서서히 망가졌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졸도한 적도 여러 번, 게다가 호흡장애와 심장질환까지 생기기도 했다.
“80년대 초 독일에서 근무할 때 포도밭에 둘러싸인 중세 귀족의 성을 개조한 레스토랑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나도 언젠가 은퇴하면 전원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살겠다는 소망을 품게 됐죠.”
김 씨가 그 소망을 현실로 옮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형의 죽음이었다. 이혼 후 두 딸마저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혼자 외롭게 살던 그의 형이 정년 퇴임을 불과 며칠 앞두고 급성간염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 형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그는 가족의 소중함과 직장생활의 허망함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동안 일에 묻혀 사느라 식구를 돌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예전에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하루 24시간을 부인과 함께 지낸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다”
CJ그룹 상무였던 황석기(47) 씨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임원 자리를 버리고 지난해 홀연히 ‘준오 헤어’로 몸을 옮겼다.
“주변에서 다들 미쳤냐고 했죠. 바보란 말도 들었어요. 대기업 임원에서 남성들에겐 생소한 미용업에 오너도 아닌 전문경영인으로 뛰어들었으니, 이상해 보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제 결정에 만족합니다.”
황 씨가 준오 헤어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 CJ그룹에 와서 강의를 했던 준오 헤어의 강윤선 대표가 그에게 지점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부탁했다. 준오 헤어 가족들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정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호응했고, 그는 그것이 고마워 자원봉사로 컨설팅을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강 대표는 준오 헤어 가족들과 호흡이 잘 맞는 그에게 사장으로 와달라고 줄기차게 부탁했다. 처음엔 그도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다 2005년 3월, 그는 드디어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정했다.
“서로 격의가 없고 꿈을 공유하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 같은 직장을 만드는 것이 제 역할이고 소망이에요. 그런데 이미 준오 헤어는 파라다이스였습니다. 게다가 직원은 물론 고객 모두에게 커다란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제 가슴을 더 뛰게 했죠.”
황 씨는 지금 신명나게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 인생의 가운데에서 바라보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법이다.
댄서가 된 의사 강승식 씨(외쪽).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중년을 ‘인생의 정오’라고 불렀다. 중년은 인생의 중간결산기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란 뜻이다. 그러나 중년에 갖게 되는 성취 욕구는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인생의 정오’에 살사 춤바람이 난 의사가 있고, 잘나가던 회사원에서 여행작가로, 간호사에서 연극배우로, 억대 연봉 CEO에서 산골 카페 주인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강승식(41) 씨는 춤추는 의사 선생님이다. 강 씨가 살사를 추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우연히 후배를 따라간 살사 동호회에서 그는 춤바람(?)이 나고 말았다. 춤추는 게 무척 재미있어서 병원이 끝나면 일주일 내내 동호회에 나가 살사를 췄다. 강 씨는 “춤을 추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인생도 즐거워진다”고 말한다. 살사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현재 ‘살사인’이라는 살사 클럽·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사장님인 동시에 ‘아시아 라틴문화 페스티벌’의 조직위원장이다.
7월27일부터 시작되는 ‘2006 아시아 라틴문화 페스티벌’ 준비로 한층 더 바쁜 강 씨는 병원은 동료 의사에게 맡긴 채 행사를 위해 플로어와 관계사들을 종횡무진 찾아다니고 있다. 지금은 의사와 살사 댄서라는 ‘투잡스’를 갖고 있지만, 춤이 좋아 죽을 때까지 춤을 추고 싶단다.
중년에 접어든 뒤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명예를 얻지는 못해도 그들은 하나같이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직장을 그만둘 땐 반드시 아내와 상의하라”
여행작가 이종원 씨.
“유럽의 명소를 돌면서 우리나라도 구석구석 한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후 틈만 나면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라 곱하기 4를 해야 돼요. 같은 여행지라도 계절마다 느낌이 다르거든요.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그래서 그는 2002년 9월 직장에 사표를 냈다. 일부터 저지르고 나서 부인에게는 “사표를 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부인은 당연히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고, 밤새도록 바가지를 긁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직장을 그만둘 땐 반드시 아내와 상의하라”고 충고한다.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작가’가 되긴 했지만, 처음엔 과연 누가 내 글을 사줄까, 누가 나를 여행작가로 인정해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 여행 카페 ‘모놀과 정수’(모놀은 ‘모여서 놀자’의 줄임말이며, 정수는 딸아이의 이름이다)를 만들었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등록했다. 열심히 하니까 길이 열렸다. 현재 그는 월간 ‘여행스케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각종 잡지와 사보에 여행 관련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수입이 일정치 않아 생활은 어렵다. 그래서 늘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제 글을 읽고 사람들이 좋아해주니까 좋고,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좋아요. 아내도 이젠 ‘잘했다’고 해요. 사실 취미가 일이 되니까 안 좋은 점도 있어요. 취미로 여행을 다닐 때는 부담이 없었는데, 지금은 여행을 하면 꼭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니까 부담이 되긴 해요.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저는 취미를 직업으로 가진 행운아이니까요. 이 세상을 떠날 때 미련은 없을 것 아니에요.”(웃음)
“더 늦기 전에 변화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경남 하동 지리산 기슭에서 녹차 농사를 짓고 있는 이창수(47) 씨는 언론사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 씨가 농부의 꿈을 갖게 된 것은 1999년 봄 지리산 녹차밭을 취재하면서부터다.
“10여 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안 가본 곳이 없는데, 유독 그 광경만은 잊혀지지 않더라고요. 차밭을 떠올릴 때마다 ‘쳇바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죠. 더 늦기 전에 변화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씨는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무조건 지리산으로 향했다. 마을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녹차 농장에 찾아가 온갖 잔심부름을 맡아 하면서 빈집 터를 기웃거렸다. 그러던 1999년 겨울, 마침내 지리산 중턱에 셋집을 한 채 얻고 “산 위에서 내 나이 마흔과 2000년을 맞겠다”며 사표를 썼다.
서울내기 이 씨에게 농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농부 이 씨는 “솔직히 현재는 농사만으로 먹고살기는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현재 생활비는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던 부인의 연금과 이 씨가 전남 순천대에서 사진학을 가르치며 받는 강의료로 충당하고 있다. 농사만으로 먹고살려면 얼마나 더 애를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처럼만 하면 금세 자리 잡을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행복하다는 게 뭔지를 아예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몸이 아무리 고돼도, 이게 바로 평화로구나 싶어요.”
”새롭게 시작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내 자신을 다시 조금씩 채워가야죠”
간호사에서 연극배우로 변신한 지영란 씨.
“사람은 시기별로 욕구가 바뀌어요. 각 시기별로 무엇을 우선으로 하느냐가 삶에서 중요한 문제죠. 그런데 병원을 그만둘 무렵, 제 욕구의 중심은 직장에서 아이들과 제 자신으로 바뀌었어요. 아이들과 나누어 가질 추억거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죠.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그것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더불어 나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간호사는 지 씨의 꿈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뜻이었다. 여자도 전문직을 가져야 남편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며 어머니가 간호대를 권했고, 지 씨는 순종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지 씨는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내가 전공을 잘못 선택했구나 싶을 정도로 연극이 무척 좋은 거예요. 학교 다닐 때 정말 열심히 연극을 했어요. 그러다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연극과 멀어졌죠. 그런데 그 연극이란 것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연극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 씨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기약도 없이 배역을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에게 주어진 배역이 바로 간호사 역. 작은 역이었지만 그는 연극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처음엔 그렇게 연극만 할 수 있으면 됐다. 그런데 일단 시작하니까 더 많은 배역과 더 좋은 배역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질수록 그는 뿌듯함을 느끼고 한층 더 젊어지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나 자신을 다시 조금씩 채워가야 하죠. 그것이 기쁨과 행복이에요.”
“억대 연봉 버리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 얻었어요.”
CEO에서 카페 주인이 된 김종헌 씨 부부.
김종헌(59) 씨는 억대 연봉을 받는 ㈜비비안의 CEO였다. 그런 그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2003년 강원도 홍천에 ‘피스 오브 마인드(Peace of Mind)’라는 북 카페를 냈다. 김 씨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카페를 열자 많은 사람들이 억대 연봉을 받는 ‘그 좋은 자리’를 버리고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면 그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더 잘 살기 위해서”라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돈도 많고 명예도 있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의 평화와 가족의 화목을 상실한 채 외롭게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물론, 돈과 명예 다 좋죠. 하지만 인생에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죠.”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김 씨는 일에 묻혀 산 ‘회사형 인간’이었다. 30대에 회사 중역이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실적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숨가쁘게 살아야만 했다. 야근과 출장이 빈번하고, 저녁마다 이어지는 접대와 회식으로 과음 및 과식을 반복하다 보니 건강도 서서히 망가졌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졸도한 적도 여러 번, 게다가 호흡장애와 심장질환까지 생기기도 했다.
“80년대 초 독일에서 근무할 때 포도밭에 둘러싸인 중세 귀족의 성을 개조한 레스토랑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나도 언젠가 은퇴하면 전원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살겠다는 소망을 품게 됐죠.”
김 씨가 그 소망을 현실로 옮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형의 죽음이었다. 이혼 후 두 딸마저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혼자 외롭게 살던 그의 형이 정년 퇴임을 불과 며칠 앞두고 급성간염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 형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그는 가족의 소중함과 직장생활의 허망함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동안 일에 묻혀 사느라 식구를 돌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예전에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하루 24시간을 부인과 함께 지낸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다”
준오 헤어 황석기 사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주변에서 다들 미쳤냐고 했죠. 바보란 말도 들었어요. 대기업 임원에서 남성들에겐 생소한 미용업에 오너도 아닌 전문경영인으로 뛰어들었으니, 이상해 보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제 결정에 만족합니다.”
황 씨가 준오 헤어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 CJ그룹에 와서 강의를 했던 준오 헤어의 강윤선 대표가 그에게 지점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부탁했다. 준오 헤어 가족들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열정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호응했고, 그는 그것이 고마워 자원봉사로 컨설팅을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강 대표는 준오 헤어 가족들과 호흡이 잘 맞는 그에게 사장으로 와달라고 줄기차게 부탁했다. 처음엔 그도 못 들은 척했다. 그러다 2005년 3월, 그는 드디어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정했다.
“서로 격의가 없고 꿈을 공유하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 같은 직장을 만드는 것이 제 역할이고 소망이에요. 그런데 이미 준오 헤어는 파라다이스였습니다. 게다가 직원은 물론 고객 모두에게 커다란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제 가슴을 더 뛰게 했죠.”
황 씨는 지금 신명나게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 인생의 가운데에서 바라보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