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식량난은 ‘고난의 행군’ 때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서 정상회담이 성사됐을까. 북한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이번 일의 모습이 확연해진다.
올해 북한의 식량난은 지독하다. 일각에선 북측의 경제 및 민생이 얼마간 유지되리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다급한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극심한 식량난(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5년 무렵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식량 사정을 포함한 사회환경이 크게 악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엔 내부 반발이 높아질수록 이를 통제하는 기능도 정비례해 강화됐다. 그런데 요즘엔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기아를 맞지 않으려 한다. 통제의 끈이 실리주의로 인해 느슨해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북측의 당면 과제는 나라의 미래와 관련한 ‘비전’이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북측 수뇌부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것으로 파악된다.
2·13합의 이후 북한은 ‘뭔가 달라지는 환경’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곧 싸늘하게 식었다. 6자회담도, 북미 관계도, 남북 관계도 평양이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등으로 북미 간 프로세스가 더뎌지면서 북측의 불안감은 점증됐다. 태양절(4월15일, 故 김일성 주석의 생일)이 지난 뒤 5월 말부터 불안감은 실질적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북미 관계 중심으로 현안의 해결 방향을 설정했던 수뇌부는 내치(內治)에서 어려움이 배증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식량난이었다. ‘춘궁기’라는 말이 북한을 지배하는 키워드가 된 것이다.
평양만 보고 돌아온 남측 인사들은 이런 식량난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고난의 행군’ 때도 평양만큼은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했다. 올 여름과 가을을 무망하게 보내면 북측은 과거 어느 때보다 고단한 겨울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 점을 걱정하는 북한 내부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 북측은 어느 쪽으로든 활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가려운 곳 긁어줄게, 허기진 배 채워다오?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북한 수뇌부는 다른 형식을 찾게 됐으며, 핵실험 직전인 지난해 9월과 엇비슷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저쪽을 부르면 어떻게 되나?”
이 말이 상징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는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정한 원칙인 ‘남북 관계와 6자회담의 선순환 발전론’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이는 6자회담이 성과를 거둬야 정상회담도 있다는 일종의 독트린이었다.
평양 시내 전경.
북미 관계 진전이 북측의 예상보다 더딘 점도 내부의 다급함을 해결해야 하는 숙제와 맞물려 돌아갔다. 남측 대선 국면의 난맥도 역설적이지만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는 계기가 된 듯하다. 서울의 정권 교체에 대한 북측 수뇌부의 불안감이 일종의 변수였다는 뜻이다. 그동안 북측에서는, 남한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북측이 받게 될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선개입 공작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8월8일 정부 발표에서도 나타났듯, 7월 초 서울은 남북 관계 진전 및 현안 사항의 협의를 위해 김만복 국정원장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고, 북측의 답은 7월 말에야 나왔다. ‘남측 국정원-북측 통일전선부’라는 전형적인 ‘국-통’라인이 가동된 것이다.
7월 초 서울발(發) 제안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통일전선부 부장으로 갓 취임한 김양건에 의해 서울의 김만복 국정원장에게 전달된 7월 말 평양발 제안이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한마디로 북측이 정상회담을 위해 남측을 불렀다는 얘기다. 이번 정상회담은 형식이야 어찌 됐건, 공식 창구를 통해 합의한 ‘공식라인’의 활동이라 볼 수 있다.
당면한 현실을 헤쳐나가는 데 남북 관계를 레버리지로 활용하겠다는 북한 수뇌부의 결심은 전격적이었다. 그에 반응한 남측의 대응도 빨랐다. 8월2~3일, 4~5일 두 차례의 평양 방문 및 토의와 합의는 이번 정상회담이 그간 설(說)로 분분하던 여러 정상회담 추진과는 틀을 달리한다는 점을 상징한다. 그 이전의 다양한 남측 제안이 이번 결정에 영향력을 미쳤다기보다 참고사항 수준이었고, 정확하게는 ‘국정원(청와대)-통일전선부(김정일 위원장 측근)’가 어떤 교합성을 갖게 된 것이다.
북측이 의도한 대로 남측은 정상회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남북 문제를 어떤 각도로건 내·외치에서 사용해야 할 타이밍에 이른 것은 양측 모두 동일하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구도이긴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북측에 의한 구동(驅動)이 더 강했다. 이는 김 국정원장이 “1차 방북(8월2∼3일) 때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김정일 위원장의 중대 제안 형식으로 ‘8월 하순 평양에서 수뇌 상봉을 개최하자’고 제의해왔다”고 밝힌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번 정상회담은 서울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평양발 ‘중대 제안’으로 이뤄진 셈이다.
7월 초, 남북 관계에서 공식-비공개 채널인 국정원은 지지부진한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런 일은 사실 공식적이고 공개된 채널인 통일부가 하기는 어렵다. 공식-비공개 라인을 통한 남측의 정상회담 제의는 쌀 차관 지원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벌써부터 예견된 일이다. 평양은 지난해 말에도 쌀과 비료 문제가 해결될 경우 정상회담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다는 쪽으로 의견이 거의 모아져 있었다.
덧붙여, 살아 있는 ‘정치 세력’인 노 대통령과 그 측근 그룹이 대선 국면에서 남북 관계를 변수로 여기지 않을 까닭이 없다. 정상회담은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 그 내용에 따라 연말 대선, 나아가 차기 정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인 것이다. 남북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접점을 찾으면서, 양측 정보기관의 ‘정상회담 기술자’들이 ‘작품’을 만들어낸 측면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각론’은 아직도 요원하다. 나는 지난해 10월30일 노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6·15공동선언 이후 오늘까지의 문제점들을 정리한 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각론’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점을 방기한 채로는 이번 정상회담이 일정 수준을 갖추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양측 ‘기술자’들의 사전 조율 내용보다 ‘노무현-김정일’ 두 정상이 가진 한반도 인식이 회담 성공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후속 없는 일회성 ‘정치 쇼’ 경계해야
우려되는 것은, 북측이 식량난을 비롯해 현재 당면 어려움만을 해결하기 위해 정상회담에 나서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치 쇼’가 될 수밖에 없다. 후속이 없는 일회성이 돼버리는 것이다. 남측이 국제문제를 과도하게 끌어들여 남북 관계의 현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로 쟁점을 좁히는 과정에서 알맹이는 없이 정치적 수사(修辭)만 난무할 가능성도 있다.
실사구시 입장에서 문제를 풀어나갈 기본 의지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정상회담 전에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두 정상이 논의할 의제의 상당 부분은 이미 국제정치의 틀에서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것이다. 핵문제, 6자회담의 진전, 평화체제 등이 그것이다. 이 과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정상회담이 틀 안에만 매몰돼 있으면 그 성과는 생각보다 적을 것이다.
나는 이번 정상회담이 남북 관계의 당면 현안을 풀어가는 데 집중하는 회담이 되길 바란다. 북측이 ‘중대 제안’을 해왔다는 점에서 보면, 이번 정상회담이 그간 보여졌던 정치적 목적으로 서로를 활용하는 ‘화장질’로 가지 않을 수 있는 기본 환경은 조성됐다 할 수 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제1차 실사구시 남북한 정상회담’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북측이 중대 제안을 하게 된 내부 사정을 헤아리고 그와 연동해 남북 관계의 현안을 해결해가는 상생(相生)의 정상회담이 돼야 한다. ‘함께 살기’의 의미가 결여된 채 정치적 수사만 난무하는 정상회담은 그 모양도 결과도 역사 속에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