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현대카드의 일본 와인투어에 참가한 한국인들이 도쿄 와인숍에서 와인을 고르고 있다.
“와인값이 국내의 절반에 불과해요. 더욱이 엔화가 약세라 음식이나 술값이 강남보다 싸요. 인천공항에서 도쿄 시내 신주쿠까지 3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으니 KTX 타고 부산 가는 것보다도 가깝죠.”
이씨는 1999년산 샤토 오브리옹을 2만4000엔(약 18만7200원, 100엔 780원 기준)에 구입했다. 명품 와인으로 꼽히는 오브리옹을 국내 와인전문점에서 구입하려면 최소 50만원 이상이다.
요즘 이씨처럼 일본으로 원정 가는 와인쇼핑족이 늘고 있다. 일본의 와인값이 국내보다 훨씬 저렴한 데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고 엔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 와인전문가 조정용(41·아트옥션 대표) 씨는 “마니아층은 물론 이제 와인을 접하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본으로 당일치기나 1박2일 여행을 떠나는 와인쇼핑족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며 “일본 와인쇼핑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와인 가격은 국내의 50~60%. 고급에 해당하는 프랑스 그랑크뤼(Grand Cru), 이탈리아 슈퍼투스칸(Super Tuscan), 미국 캘리포니아 컬트와인(Cult Wine)은 국내의 절반 수준이다.
이는 주세 차이 때문이다. 일본의 와인값은 물품 용량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종량제이고, 한국은 물품 가격에 따라 매기는 종가세다. 국내에서 와인 한 병에 붙는 세금은 68%. 따라서 가격이 비쌀수록 세금의 무게도 커진다.
앞선 와인문화 체험도 가능
이에 반해 일본은 종량제이기 때문에 와인을 많이 구입할수록 세금이 싸지는 효과가 있다. 또 일본은 와인 수입이 전면 자유화돼 있어 수입회사끼리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소비자 가격이 낮게 책정돼 있다. 실제 같은 빈티지의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이라도 와인전문점에 따라 가격이 10~30%까지 차이 난다. 따라서 일본에서 와인쇼핑을 할 때는 와인전문점을 최소 세 곳 이상 돌아보고 살 필요가 있다.
일본 와인쇼핑족이 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곳에서 선진화된 와인문화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90년대 후반에 와인이 대중화되면서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구대륙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신대륙 와인까지 전 세계 모든 와인이 실시간으로 공급돼 굳이 유럽으로 와인투어를 떠날 필요가 없다. 시간과 비용을 고려했을 때 일본에서 와인을 마시거나 사올 경우 실제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부가가치는 와인 가격의 2배가 넘는다.”(조정용 씨)
이런 이점 때문에 일본 와인패키지 여행도 등장했다. 7월 현대카드 프리비아 여행팀에서 3박4일간 야마나시 지역의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도쿄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음하며 유명 와인 전문점을 방문하는 와인투어를 기획해 대성공을 거뒀다. 이 패키지의 백미는 와인쇼핑. 특히 일본은 매년 겨울철과 여름철에 대규모 와인세일을 한다. 7월은 여름철 세일기간으로 와인을 50~70% 싸게 구입할 수 있어 한국 와인쇼핑족이 넘쳐났다.
투어에 참여했던 회사원 김모(34) 씨는 “국내에서는 구할 수조차 없는 샤토 팔파스를 맛보고,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온 2004년산 무통 로실드를 국내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18만원에 샀다는 사실에 감격했다”며 일본 와인쇼핑 예찬론을 펼쳤다. 요즘 일본 항공편을 예약하면 도쿄의 경우 1박2일에 30만원, 3박4일도 50만원대에 갔다 올 수 있다.
도쿄 시내에서 와인전문점이나 와인바가 밀집한 곳은 크게 신주쿠, 긴자 두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촌에 해당하는 곳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신주쿠역 주변에는 고급 와인부터 저가 와인까지 갖춘 다양한 와인전문점이 늘어서 있다. 특히 신주쿠 이세탄백화점 지하 1층 와인전문점은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을 잘 갖춘 곳으로 유명하다.
긴자는 고급 백화점과 명품전문점이 늘어선, 전통 있고 고급스러운 거리다. 우리나라의 명동과 청담동을 합쳐놓은 지역이다. 백화점이 늘어선 이 거리 맞은편에 와인전문점과 와인바가 즐비하다. 특히 에노테카는 일본에서 가장 큰 와인전문 체인점으로 전 세계 와인을 가장 많이 갖춰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국내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지하에도 이 매장이 있다.
최근에는 롯폰기힐스와 에비스가든 플레이스 부근 와인바를 찾는 사람이 많다. 초고층 복합빌딩 단지인 롯폰기힐스는 고급 와인바가 많고 에비스가든 플레이스는 20, 30대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다.
일본은 와인을 요리로 인식
국내와 달리 일본의 바에서는 고급 와인을 잔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쇼핑 마니아들의 구미를 당긴다. ‘히딩크의 와인’으로 국내에서 인기 상한가인 샤토 탈보는 한 잔에 5000엔(약 4만원) 정도. 와인전문점에서 병으로 구입하는 가격과 맞먹는다. 잔은 병에 비해 비싼 게 흠. 최근 문을 연 오보테산도 힐스 쇼핑센터 지하의 와인바는 자판기를 갖추고 와인 종류별로 하우스와인을 서비스하고 있다. 물론 병으로 주문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직접 구매할 때보다 2배 이상의 가격이 붙는다.
와인 원정쇼핑족이 말하는 즐거움 중 또 하나가 와인과 요리의 환상적인 궁합(마리아주·mariage)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무박 ‘밤도깨비’ 여행으로 일본을 종종 간다는 이모(광고기획사 근무) 씨는 “일본에서는 와인만 마시는 게 아니라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중시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리조토와 같이 먹었던 이탈리아 와인은 요리와 어울리면서 풍미가 더 진해졌던 기억이 새롭다”고 말했다.
일본과 국내 와인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전문가들은 와인을 술로 보느냐 음식으로 보느냐는 관점의 차이를 들었다. 와인강사 유창호(BWS와인스쿨 부원장) 씨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와인을 꼭 바에서 먹어야 하는 술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일본은 와인문화가 우리나라보다 7~10년 앞서고,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다양한 실험을 거치면서 와인을 요리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와인 원정쇼핑 트렌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유창호 부원장은 “선진화된 와인문화를 비교 체험한다는 것은 좋지만 지나칠 경우 국내 와인시장의 혼란 등 부정적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해외에서 국내로 반입하는 술 제한(1병)을 넘어설 경우 세관 검색이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국내 와인 가격이 조정되지 않는 한 와인 마니아들의 일본 원정쇼핑은 계속될 듯하다.
와인명 | 일본 | 한국 |
샤토 무통 로실드(Cha^teau Mouton Rothschild, 2004) | 18만~19만원 | 50만원 |
샤토 오브리옹(Cha^teau Haut-Brion, 2002) | 48만~50만원 | 100만원 |
샤토 브라네르 뒤크뤼(Cha^teau Branaire-Ducru, 2004) | 18만~19만원 | 50만원 |
샤토 탈보(Cha^teau Talbot, 2002) | 4만원 | 11만~12만원 |
본 로마네(Vosne Romane′e, 2000) | 6만~7만원 | 14만원 |
* 가격은 수입업체에 따라 다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