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8월28~30일 평양에서 마주 앉는다. 정상회담은 남북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사된 것이다. 노 대통령은 ‘북한 카드’로 임기 말 정국을 주도하면서 승부수를 던질 수 있게 됐고, 김 위원장은 경제 지원이라는 선물을 챙기고 내부 불만도 얼마간 달랠 수 있을 전망이다.
- 그러나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가 도출되지 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국에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제의하기에 앞서 지방을 시찰했다. 7월29일 함남 함주군 협동농장에서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투표를 한 뒤 잇따라 군 부대를 방문했다. 지방 시찰은 체제에 대한 불만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 단속에 나선 것이다.
7월 말부터 북한에선 ‘간부사업’이라 불리는 ‘숙정’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방침에 따라 대대적 인사개편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 파견된 고급 간부가 평양으로 소환되고 있으며 내각과 경제, 대남 분야뿐 아니라 당과 군의 권력기관 엘리트의 세대교체도 이뤄지고 있다.
평양에서 열리는 이번 정상회담은 남측의 거듭된 요청에 북측이 응했다기보다는 북측이 역제안한 측면이 강하다. 김 위원장은 또다시 대량 아사(餓死) 조짐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내부 통제를 위해 분위기 반전이 필요했다.
2000년 6월의 김대중-김정일 회담 때 발표된 합의문은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라는 문구로 시작된 반면, 이번 합의문은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합의에 따라”라고 돼 있다. 남측의 정상회담 구애를 외면하던 북측이 ‘앞장서’ 역제안한 까닭은 무엇인가. 북측은 어떤 의제를 들고 테이블에 앉고자 하는가.
고난의 행군
“너희들 잘 알아두라. 이젠 나라에서두 백성을 일일이 돌보지 못한대누나. 오죽하면 고난의 행군이라구 하갔네. 거저 이 세상에 믿을 건 우리 식구밖엔 없다구 생각해야 해. 할마니 말 명심하라.”
황석영 소설 ‘바리데기’의 한 대목이다. 작가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식량난과 통제 이완을 소설에서 생생하게 묘사한다. 아버지가 교역 일을 맡은 함북 무산군의 부위원장이라 여축한 양식과 알탄이나마 창고에 남아 있던 주인공의 집도 몰락하고 만다.
대북 소식통들은 북한의 ‘요즘’이 극심한 식량난이 시작된 1995년 무렵과 비슷하다고 평가한다. 통제 기제도 느슨해져 대다수 주민은 “국가가 식량 배급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통제만 하지 말라”며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뒷돈’ 5억 달러(4600억원)를 주기로 약속한 김대중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2000년 1차 정상회담은 남측의 즉각적 지원으로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이번 정상회담도 남측의 대북지원 유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혁명 4세대와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용주의적 성향을 가진 혁명 4세대가 요직에 진출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 내부에서 ‘새로운 틀’을 갈구하던 이른바 ‘경제부흥파’에 정상회담은 하나의 기회로 작용할 것 같다. 그들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마냥 늦출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방향은 ‘경제실리주의’다. 10년 넘게 북한 체제를 이끌어온 선군정치 슬로건을 뒤로하고, 경제 실리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전역에 대한 새로운 통제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사람들의 불만이 높은 상황에서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2·13합의 이후 북한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예상보다 더뎌지자, 7월부터 “6자회담에 대한 기대를 접어라”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통지문이 하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7년 전 1차 정상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해 돌파구를 마련하고, 체제 유지와 후계구도 안정화를 위해 북한이 남북관계 공고화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우리 민족끼리
8월8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개된 남북간 합의문을 잠시 살펴보자. 두 정상이 이달 말 평양에서 테이블에 올려놓을 주제는 이 합의문에 개괄적으로 담겨 있다.
“남북 정상분들의 상봉은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과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바탕으로 남북관계를 좀더 높은 관계로 확대 발전시켜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공동의 번영,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는 데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키워드는 크게 다섯 가지다. ‘6·15 공동선언’ ‘남북한 관계 확대발전’ ‘한반도 평화와 민족공동 번영’ ‘조국통일의 새 국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키워드에 대한 해석은 남과 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의제를 맞춰나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의제 조율 기간이 20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측의 ‘중대 제안’으로 성사된 정상회담이기에 평양은 자신들이 원하는 의제에 집중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상회담을 위한 준비 접촉 등에서 남북간 의제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질 전망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에서 논의하기를 원하는 의제는 핵 포기, 평화체제 구축 등 ‘국제문제’보다는 경제협력, 정치·군사 현안 등 ‘남북문제’에 포커스가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동상이몽(同床異夢)
사전조율 과정 및 정상회담에서 대두될 의제는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 구축 △군사현안 △획기적 경제협력 △이산가족 문제 △납북자 문제 △남북철도 연결 △쌀 비료의 추가 지원 등으로 요약된다.
공동선언 등의 형식으로 발표될 합의문은 핵심 의제 중심으로 이뤄지겠으나 이들 현안이 모두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양 정상이 큰 틀에 합의하면 9월 중 후속 실무 회담을 통해 각론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논의는 북핵 문제의 순조로운 해결을 전제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선언’을 제안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양 정상의 평화선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
비핵화, 평화체제 등의 주제는 북한이 정상회담에서 얻으려는 실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주제다. 다만 북한도 더디게 관계정상화 절차를 밟고 있는 미국 압박용으로 평화선언에 얼마간 관심이 있다는 분석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선 북한이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원칙을 천명하는 수준에서 논의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노무현 정부가 ‘핵 포기’라는 단언적인 표현을 공동선언 등에 넣을 수 있다면 그건 큰 성과다.
평화선언과 비핵화 원칙 표명만으로는 2·13합의 이행과 평화체제 구축과정의 모멘텀은 될 수 있으나 레토릭으로 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 문제는 ‘남북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국제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비핵화 달성과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가 이뤄지려면 관련국들의 정치적 결단이 필수적이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미국의 관점은 ‘겉으론 환영, 속은 씁쓸’이라고 말했다.
평화의 바다
남성욱 교수는 정상회담의 의제가 돼서는 안 되는 주제로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한미 합동훈련 중지) △서해 북방한계선(NLL) 재설정 △통일방안의 섣부른 합의 △국내 정치 문제를 꼽았다. 이들 중 일부는 북측이 “남북관계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공동의 이정표”라며 단골로 제기해온 의제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꾼 상황에서 북측이 주한미군 철수 등의 의제를 제안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로 가는 길을 담보한다며 NLL 재설정을 정상회담에서 포괄적으로 협의하려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NLL은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만큼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체제 구축 논의가 시작될 경우 필연적으로 대두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북측의 주장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획기적인 제안을 북측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그러나 NLL은 영토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평화수역’이라는 수사를 동원해 일부 양보할 경우 남측 여론의 반발이 예상된다. 한 대북소식통은 “현 정부는 NLL 문제에서 일부 양보하면서 다른 것을 얻으려 할 것이다. 평화수역으로 만들자는 게 진보세력의 주장 아니었는가”라고 말했다.
쇼(SHOW)
정상회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노무현-김정일 만남은 각 현안에 대해 포괄적이고 원칙적으로만 합의할 가능성이 크다. 물밑에서 합의한 내용은 공동선언 등엔 담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후속 실무회담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물이 없으면 역풍을 맞거나 그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6·15 정상회담의 논의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공사가 완료되고 올해 5월 시험운행까지 마친 남북철도 연결이 성사돼 정상회담 이후 고조된 분위기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정상회담 이후 철도를 통한 쌀 차관 제공을 기정사실로 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추석을 전후로 이산가족 문제와 관련한 놀랄 만한 행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대규모 이산가족 상봉은 물론 고향방문단 수준의 해법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 남북철도를 이용해 고향방문단이 오간다면 이 역시 큰 성과다. 역설적으로 이 같은 행사는 12월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납북자 문제를 의제로 제기할지도 관심사다. 일본은 북일정상회담을 통해 같은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현재로선 ‘끼워넣기’ 수준의 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지만 경제지원 규모에 따라 이 문제와 관련해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북 경제공동체
정상회담에선 쌀, 비료의 추가지원 등 낮은 수준의 경제지원 논의뿐 아니라 SOC(사회간접자원) 지원 등 높은 수준의 경제지원 논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경제공동체 추진에 대한 합의나 경협을 위한 상호대표부 설치를 제안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번 정상회담은 평양발(發) 중대 제안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해 평양은 최대한 얻어내려 할 것이다. 경협 확대로 실리를 추구하면서 경제 재건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8월 초 남북한이 국내 독립관세구역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인 경제협력강화약정(CEPA)을 체결해 남북간 특수관계를 반영하면서도 FTA 효과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한 경제공동체 협정이나 삼성경제연구소가 제기한 CEPA 형태가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면 임기 만료를 앞둔 정부가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경제지원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한 경제교류를 실사구시에 입각한 형태로 업그레이드할 것이다. 교류협력 강화는 항구적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정상회담의 정례화도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걸 전하라. 방식이나 자리는 어떻든 관계없다. 개성도 좋고 금강산도 좋다. 개성이라면 왔다 갔다 하며 수시로 봐도 좋다”고 북측에 전한 바 있다.
정상회담이 정례화된다면 그 자체로 성과다. 현 정부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체제로의 전환 기틀을 마련하면서 북핵 폐기 해법을 찾고, 경협을 비롯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
이번 정상회담은 현안에 대해 두 정상이 ‘통 큰 합의’로 미래지향적인 변곡점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남북문제에서 그동안 정부가 보여준 아마추어리즘의 재현(再現)을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