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성의 내남문에서 바라본 외남문과 담양호.
담양 땅에 남은 정자나 원림으로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명옥헌, 면앙정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짜임새 있고 멋스럽기로 첫손 꼽히는 곳은 남곡 지곡리에 자리한 소쇄원이다. 조광조의 제자였던 소쇄옹 양산보(1503~1557)가 조성한 이 정원은 ‘우리나라 전통 원림의 백미’로 평가된다. 그렇다고 해서 규모가 대단한 곳은 아니다. 전체 면적이 1400평에 불과하지만 무엇보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완벽하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한때 10여 채에 이르던 소쇄원 부속건물은 이제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만 남았다. 쓸쓸해 보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앞섰지만 오히려 건물과 자연 사이의 공간이 넉넉해서 전체 분위기가 훨씬 자연스럽고 여유롭다. 이런 소쇄원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마치 딴 세상에 들어선 듯한 감흥에 젖는다. 그리 길지 않은 대숲 길과 산책로를 찬찬히 걸으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노라면, 자신과 옛 건물과 자연이 하나 된 듯한 경지도 잠깐이나마 누릴 수 있다.
소쇄원 들머리에서 큰길을 따라 광주호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개울 건너편의 언덕에 자리잡은 환벽당이 보인다. 인근의 식영정, 고서면 원강리의 송강정과 함께 송강 정철(1536~1593)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히는 환벽당은 송강이 어린 시절 학문을 익힌 곳이다. 환벽당 맞은편의 가사문학관 앞을 지나면 금세 식영정 어귀에 이른다. 송강은 이곳 솔숲에 자리잡은 식영정에서 자신의 대표작 ‘성산별곡’을 지었다.
소쇄원·식영정·환벽당 등 멋스럽고 운치있는 유적 가득
식영정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인 고서면 후산마을에는 수백 년 묵은 배롱나무와 노송이 장관을 이루는 명옥헌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사실 삼복염천에 굳이 담양의 원림을 둘러보는 것은 명옥헌의 배롱나무꽃을 구경하기 위함이다.
자미화(紫薇花), 백일홍, 목백일홍 등으로 불리는 배롱나무는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약 100일 동안이나 잇따라 피고 지는 붉은 꽃이 매혹적이다. 정열의 춤을 추는 무희 같기도 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조신한 규수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무희든 규수든, 만개한 배롱나무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바로 이곳 명옥헌은 오래된 배롱나무 고목들이 숲처럼 우거져 있어 여름 내내 섬뜩한 꽃불이 사그라지지 않는 곳이다.
명옥헌의 지척에 자리한 창평은 송강이 감성과 시심(詩心)을 키운 땅이다. 16세 때 할아버지 묘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온 송강은 기대승 김인후 송순 임억령 등 호남의 여러 대학자와 문인들에게 학문과 시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지금도 창평에 가면 고풍스런 멋이 느껴진다. 옛날 방식으로 창평엿과 창평한과가 제조되고, 지난해 6월 등록문화재 제265호로 지정된 삼천리 삼지천마을의 오래된 돌담길도 운치 있다.
우리나라 전통원림의 백미로 꼽히는 소쇄원의 광풍각(왼쪽), 배롱나무 고목들이 붉은 꽃불을 피워 올린 명옥헌의 여름날 풍경.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가운데 꼭 가봐야 할 곳은 담양읍에서 순창군 경계지점까지의 24번 국도 구간이다. 아름드리 고목이 촘촘히 늘어서 근사한 숲 터널을 이뤘다. 이곳에는 메타세쿼이아길 못지않게 아름답고 운치 있는 산책로가 또 있다. 담양읍내를 휘감아 도는 담양천 제방에 2km쯤 늘어선 관방제림(천연기념물 제366호)이 그것이다.
관방제림이 있는 담양읍내에서 서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인 추월산(731m)과 금성산(603m)이 우뚝하다. 그중 금성산 정상 부근의 암봉과 산허리에는 삼한시대 처음 축조됐다는 금성산성이 둘러져 있다. 튼실하게 축조된 성 자체도 볼만하지만, 무엇보다 주변의 산자락과 들녘과 마을을 죄다 끌어앉은 조망이 일품이다.
찻길이 끝나는 곳에서 산책하듯 가벼운 기분으로 20여 분만 걸으면 이 산성 관문인 외남문에 당도할 수 있다. 일단 이곳에만 올라서도 가슴이 뻥 뚫릴 듯 상쾌한 조망을 누릴 수 있다. 담양호 건너편 추월산은 손에 닿을 듯 가깝고, 멀리 광주 무등산과 광양 백운산까지도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2km 가까운 성벽길은 지형에 따라 율동감 있게 오르내려 산책을 겸한 등산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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