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켄 로치를 ‘세상에 마지막 남은 좌파 감독’이라 부른다. 또는 ‘블루칼라의 시인’ ‘노동자들의 대변인’ ‘좌파 영화의 십자군’ 등등. 아직도 켄 로치는 자신의 영화 속에 ‘인터내셔널가’를 집어넣고 민중의 연대와 혁명의 이상, 노동자 계급의 신성함을 믿는다. 옥스퍼드든 보스턴이든 서울이든 대학가 골방에서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본다는 것은 80년대에 금서였던 ‘자본론’을 읽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70세 거장, 오랜만에 거대 서사극에 도전
켄 로치가 일흔 살이 다 돼서, 할리우드가 재탕 삼탕했던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진부한 이야기를 새삼 들고 나왔다. 그것도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영국인들을 (영국 감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비열한 악당으로 그려서 말이다. 영국군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상과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어머니 앞에서 아들을 때려죽이고, 여자의 머리를 쥐 파먹은 듯 가위로 잘라내고, 낡은 펜치로 손톱을 뽑아 고문한다. 켄 로치의 눈으로 보자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아니라 아일랜드 국민을 탄압하는 부시의 사촌쯤 되는 인물이고,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영웅 마이클 콜린스는 영국과 타협한 배신자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빵과 장미’ ‘스위트 식스틴’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 ‘칼라즈 송’ 등 전 세계 노동자들의 현실과 일상에 천착하던 그가 왜 다시 ‘랜드 앤 프리덤’과 ‘히든 아젠다’ 같은 거대 서사의 세계로,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왔을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역사는 진화하지 않고 반복된다는, 역사는 과거의 무덤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열쇠라는 켄 로치의 신념이 오롯이 담겨 있는 그만의 영화다.
1920년 의사 지망생 데미안은 런던의 일자리를 포기하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평소 현실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 그였지만, 어머니 앞에서 아들을 때려죽이고 기차를 세운 채 시민을 폭행하는 영국군의 현실을 도저히 방관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일랜드 독립군의 리더인 형을 따라 그는 한발 한발 시민전쟁의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그러나 전쟁에 개입할수록 상황은 더욱 꼬여갈 뿐이다. 밀고자라는 이유로 동네 소년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영국의 협정안을 받아들이려는 형과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된다.
보리밭을 뒤흔드는 바람처럼 격랑의 역사는 데미안의 순수한 이상과 정의에 대한 열망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역사의 한복판으로 말려 들어가는 한 청년의 영적 성장담을 통해 켄 로치는 영국에 대한 날선 비판보다도 더 깊이, 더 오래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으로 변하는 아일랜드 독립 후의 상황을 성찰한다.
전투 장면보다 배우들 호연과 긴 토론 장면이 백미
일본이 물러가자 좌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총질을 했던 우리의 역사처럼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를 점령한 영국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로 내분을 겪었다. 사실 이 영화의 백미는 영국군과의 전투 장면이 아니라, 배우들의 호연과 에너지로 넘쳐나는 긴 토론 장면일 것이다. 영국은 30마일 위쪽으로 이동했을 뿐이니 나머지 1인치를 쟁취하자는 사람들과 파문을 빌미로 사람들을 회유하는 어용 종교인들. 이 와중에 데미안이 목격한 것은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아일랜드 민중의 삶이었다. 켄 로치는 독립 이후의 아일랜드가 오히려 남아 있는 자본과 토지를 누가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자본가 계급이 헐벗은 민중을 탄압하는 더 가혹한 전쟁 상황이었음을 역설한다. 아일랜드의 녹색 군복을 입은 형의 모습은 영화 초반부 가혹한 제국주의 규칙을 강요하던 영국군의 군복 입은 모습과 무척 닮아 있다.
그리하여 온건한 평화주의자, 미적지근한 기회주의자처럼 보이던 한 청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다. 그 역시 이미 죽어간 아일랜드 땅 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다가올 죽음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지난번에는 크리스, 이번에는 데미안. 순번이 바뀌고 명분이 바뀌고 논리가 바뀌었을 뿐, 보리밭을 물들이는 붉은 피의 색깔은 바뀐 것이 없다. 데미안 역시 스파이 노릇으로 사형에 처해진 동네 소년의 심장에 총을 겨누어야 했을 때 “아일랜드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좌파니 이상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의 한쪽에 몸을 담그면서도 늘 보는 이의 가슴 한쪽에 먹먹한 울림을 전하는 켄 로치의 신파성 혹은 멜로성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여전하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제작비를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가 이제 명실상부한 대가 반열에 우뚝 선 것도 전 세계 인류 누구의 마음에도 노크할 수 있는 켄 로치만의 정서적 윤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특히 ‘난 사랑의 정원으로 향했네. 검은 가운을 입은 사제들이 걷고 있고 들장미를 묶노라. 나의 기쁨과 갈망을’ 같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가 나오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신파를 넘어서 푸르른 서정성으로 반짝인다. 동네 소년을 죽이고 되돌아오는 독립군의 처연한 심정은 압도적인 아일랜드 풍광에 한 점으로 파묻히고, 벌판에는 푸른 자연만 넘실댄다.
아일랜드 풍광 인상적 … 푸르른 서정성도 돋보여
그리하여 켄 로치는 전 세계 영화사에 희귀한 전통을 수립하는 것이다. 거장의 승부처란 영화미학이 아니어도 좋고 스타일이 아니어도 좋다. 켄 로치의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 본연의 임무는, 이 혼란하고 소음뿐인 세상에 반짝이는 말 한마디 얹어놓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크리스는 죽어가면서 사랑하는 연인 시네이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다. 모든 아일랜드 시민의 대표 같았던 단이란 인물이 그에게 건네준 화두.
“네가 무엇과 싸우는지는 알기 쉽지만, 네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속도전이 지배하는 복마전 같은 세상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질문하게 하는 거대한 의문부호 같은 영화다. 이제는 마음 한구석에 빛바랜 송가처럼 희미해져 가는 것들을 눈부신 깃발처럼 나부끼게 만드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습해진 내 영혼을 오래오래 말리고 싶다.
70세 거장, 오랜만에 거대 서사극에 도전
켄 로치가 일흔 살이 다 돼서, 할리우드가 재탕 삼탕했던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진부한 이야기를 새삼 들고 나왔다. 그것도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영국인들을 (영국 감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비열한 악당으로 그려서 말이다. 영국군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상과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어머니 앞에서 아들을 때려죽이고, 여자의 머리를 쥐 파먹은 듯 가위로 잘라내고, 낡은 펜치로 손톱을 뽑아 고문한다. 켄 로치의 눈으로 보자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아니라 아일랜드 국민을 탄압하는 부시의 사촌쯤 되는 인물이고,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영웅 마이클 콜린스는 영국과 타협한 배신자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빵과 장미’ ‘스위트 식스틴’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 ‘칼라즈 송’ 등 전 세계 노동자들의 현실과 일상에 천착하던 그가 왜 다시 ‘랜드 앤 프리덤’과 ‘히든 아젠다’ 같은 거대 서사의 세계로,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왔을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역사는 진화하지 않고 반복된다는, 역사는 과거의 무덤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열쇠라는 켄 로치의 신념이 오롯이 담겨 있는 그만의 영화다.
1920년 의사 지망생 데미안은 런던의 일자리를 포기하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평소 현실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 그였지만, 어머니 앞에서 아들을 때려죽이고 기차를 세운 채 시민을 폭행하는 영국군의 현실을 도저히 방관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일랜드 독립군의 리더인 형을 따라 그는 한발 한발 시민전쟁의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그러나 전쟁에 개입할수록 상황은 더욱 꼬여갈 뿐이다. 밀고자라는 이유로 동네 소년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영국의 협정안을 받아들이려는 형과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된다.
보리밭을 뒤흔드는 바람처럼 격랑의 역사는 데미안의 순수한 이상과 정의에 대한 열망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역사의 한복판으로 말려 들어가는 한 청년의 영적 성장담을 통해 켄 로치는 영국에 대한 날선 비판보다도 더 깊이, 더 오래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으로 변하는 아일랜드 독립 후의 상황을 성찰한다.
전투 장면보다 배우들 호연과 긴 토론 장면이 백미
일본이 물러가자 좌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총질을 했던 우리의 역사처럼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를 점령한 영국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로 내분을 겪었다. 사실 이 영화의 백미는 영국군과의 전투 장면이 아니라, 배우들의 호연과 에너지로 넘쳐나는 긴 토론 장면일 것이다. 영국은 30마일 위쪽으로 이동했을 뿐이니 나머지 1인치를 쟁취하자는 사람들과 파문을 빌미로 사람들을 회유하는 어용 종교인들. 이 와중에 데미안이 목격한 것은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아일랜드 민중의 삶이었다. 켄 로치는 독립 이후의 아일랜드가 오히려 남아 있는 자본과 토지를 누가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자본가 계급이 헐벗은 민중을 탄압하는 더 가혹한 전쟁 상황이었음을 역설한다. 아일랜드의 녹색 군복을 입은 형의 모습은 영화 초반부 가혹한 제국주의 규칙을 강요하던 영국군의 군복 입은 모습과 무척 닮아 있다.
그리하여 온건한 평화주의자, 미적지근한 기회주의자처럼 보이던 한 청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다. 그 역시 이미 죽어간 아일랜드 땅 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다가올 죽음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지난번에는 크리스, 이번에는 데미안. 순번이 바뀌고 명분이 바뀌고 논리가 바뀌었을 뿐, 보리밭을 물들이는 붉은 피의 색깔은 바뀐 것이 없다. 데미안 역시 스파이 노릇으로 사형에 처해진 동네 소년의 심장에 총을 겨누어야 했을 때 “아일랜드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좌파니 이상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의 한쪽에 몸을 담그면서도 늘 보는 이의 가슴 한쪽에 먹먹한 울림을 전하는 켄 로치의 신파성 혹은 멜로성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여전하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제작비를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가 이제 명실상부한 대가 반열에 우뚝 선 것도 전 세계 인류 누구의 마음에도 노크할 수 있는 켄 로치만의 정서적 윤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특히 ‘난 사랑의 정원으로 향했네. 검은 가운을 입은 사제들이 걷고 있고 들장미를 묶노라. 나의 기쁨과 갈망을’ 같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가 나오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신파를 넘어서 푸르른 서정성으로 반짝인다. 동네 소년을 죽이고 되돌아오는 독립군의 처연한 심정은 압도적인 아일랜드 풍광에 한 점으로 파묻히고, 벌판에는 푸른 자연만 넘실댄다.
아일랜드 풍광 인상적 … 푸르른 서정성도 돋보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크리스는 죽어가면서 사랑하는 연인 시네이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다. 모든 아일랜드 시민의 대표 같았던 단이란 인물이 그에게 건네준 화두.
“네가 무엇과 싸우는지는 알기 쉽지만, 네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속도전이 지배하는 복마전 같은 세상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질문하게 하는 거대한 의문부호 같은 영화다. 이제는 마음 한구석에 빛바랜 송가처럼 희미해져 가는 것들을 눈부신 깃발처럼 나부끼게 만드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습해진 내 영혼을 오래오래 말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