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디자인 황금기를 연상시키는 복고적인 느낌의 음향기기들. CDP와 mp3 플레이어 기능을 겸한 것들이 많다. 대형 백화점이나 대형 가전매장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라디오 명가 ‘티볼리’에서 내놓은 iPAL. iPOD 같은 mp3에 연결해 ‘티볼리’ 고유의 음향을 들을 수 있게 한 초소형의 고성능 스피커 시스템이다.개성 있는 다이얼식 디자인이 ‘어느 집 자손’인지 한눈에 알아보게 한다. (좌). <br>삼성 프리미엄 디카 ‘블루’의 NV. 블랙에 커다란 줌렌즈 디자인이 클래식하고, 메탈에 슬림한 몸체는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반영했다(우).
“이거 최신형인데 어떻노?”
“요새 강남 압구정에서 누가 최신형 mp3 사니! 요즘 강남 압구정 유행은 축음기, 라디오 아니니!”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7080’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현재 모든 패션의 코드와 시계가 80년대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거니와, 최근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완전히 평정한 듯했던 전자 및 가전상품에서도 ‘과거로의 회귀’가 뚜렷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패션과 달리 테크놀로지 상품에서는 디지털 이외의 대안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복고 무드’는 일종의 ‘저항’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즘 압구정 유행은 축음기와 라디오”
1950년대에 세계 최초의 어쿠스틱 스피커AR-1을 발명해 ‘오디오계의 포드’로 불리는 미국 발명가 겸 디자이너 헨리 클로스가 만든 라디오 ‘티볼리’가 단적인 예. 이 라디오를 수입 판매하는 정한영 씨는 “첨단 테크놀로지를 동원한 수억원짜리 오디오도 있지만, 음악을 듣는 데도 그토록 엄청난 노력과 전문적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는지 회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생활이 복잡해질수록 휴식은 ‘심플’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들은 ‘좋은 소리’를 이해할 만큼 안목도 높기 때문에 전통 있는 아날로그 제품에서 더 큰 만족을 얻는다”고 말한다.
영국에서 태어난 ‘미니’의 원형. 독일 BMW의 기술로 다시 태어나 ‘유럽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의 전자제품 편집 매장의 매니저는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상품 중 하나가 고풍스런 TEAC의 턴테이블이다. 올해 5월부터 판매를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한두 대씩 나간다”고 말한다.
사라진 LP 음반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지만, 별도의 스피커나 이퀄라이저가 없어 마치 옛 축음기를 돌리는 듯 ‘생’음악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다. 서라운드 스피커로 재현된 스테레오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고색창연’한 소리다. 같은 매장에서 홈시어터와 mp3 제품도 함께 판매하는 그는 “고가의 앰프와 스피커로 디지털 음악을 듣던 이들에게는 턴테이블의 LP 음악이 새로운 스타일일 수 있다. 차가운 디지털 음악이 아니라 뭔가 흠도 있고, 녹음의 흔적도 느껴지는 아날로그 음악이 최신형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백화점의 또 다른 매장에서는 프랑스산 ‘세인트 루이스’사의 붐박스와 라디오를 판매 중이어서 ‘강남 압구정의 복고유행’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엔 대형 전자상가나 문구점에서도 고풍스런 라디오나 앤틱 디자인의 시계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럽 디자인 황금기를 연상시키는 복고적인 느낌의 음향기기들. CDP와 mp3 플레이어 기능을 겸한 것들이 많다. 대형 백화점이나 대형 가전매장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른바 ‘아나디지’족 또는 ‘디지로그’족들을 겨냥한 이런 ‘구식’ 혹은 클래식 제품들이 속까지 구식인 건 아니다. 아니,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을 구현해야 한다.
클래식하면서 ‘쿨’하게 그때 그 시절 추억
“소비자들은 복고적인 ‘분위기’를 선호하지 구식 기술을 원하진 않거든요. 옛날 것처럼 보이는 디자인도 자세히 보면 메탈을 적절히 사용해 현대적인 디테일을 살렸다는 걸 알 수 있어요.”(박대철, ‘세인트 루이스’ 수입사 트로이카)
'티볼리' 라디오
디지털 카메라에서도 ‘복고’가 대세다. ‘디카족’들의 ‘머스트해브’ 카메라가 된 삼성 프리미엄 디카 ‘블루(VLUU)’의 NV 시리즈는 마치 수동식 카메라인 척하고 있지만, 광학 7배의 고배율 줌과 화질 항목들을 수치화해 최적화된 화면을 만들어내는 F.U.P라는 첨단 시스템을 적용한 신제품이다. ‘블루’ 개발팀은 ‘사진을 못 찍어도 잘 찍는 것처럼 보이고 싶다’거나 ‘렌즈가 크면 사진이 잘 찍힐 것 같다’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착안, 기존의 디카 트렌드에 역행해 클래식 카메라와 닮은 ‘블루’를 개발, 성공을 거뒀다.
삼성테크윈 디자인팀 측은 “카메라는 추억을 기록하는 도구다. 추억이란 ‘과거의 회상’이다. 또한 우리에게 카메라는 ‘옛날에 아버지가 쓰던 물건’이라는 이미지가 담겨 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는 카메라의 이미지로 ‘카메라답게 만든다’는 것이 디자인 컨셉트”라면서 “단순히 클래식하다고 디자인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클래식하면서도 ‘쿨’하게 느껴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프린세스'의 클래식 토스텀(앞)와 커피메이커.
이런 복고적인 상품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 대형 전자점의 경우 복고적인 디자인의 가전제품을 판매하다가 매장에서 철수시키고 온라인 판매로만 돌렸다. “기능도 좋고 디자인도 뛰어나지만 할인전자매장을 찾는 소비자들은 너무 낯설어하더라”는 것이다.
대신 ‘감성적’인 이유로 구식 디자인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상품에선 보기 어려운 공감대가 형성돼 ‘마니아 그룹’을 이룬다. ‘베스파 동호회’나 ‘클럽미니’ 등이 그 예다.
인간 정서 살리고 싶어 복고에 열광
이런 이유 때문에 복고적 디자인 상품의 인기는 흔히 “인간을 위해 발전한 기술이 오히려 인간의 정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현상에 대한 반대심리 때문”(삼성 ‘블루’ 디자인팀)으로 설명된다.
패션지 ‘GQ’의 김형준 디지털 상품 전문 에디터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 초기에 남성 소비자들은 편리함, 속도, 성능에 열광했지만 점차 이런 제품에서도 ‘감성’을 느끼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클래식 디자인이란 결국 인간 중심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데다가, 디자인 전성기의 좋았던 시절을 되살린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는 “따라서 무엇을 ‘클래식’으로 볼 것인지가 중요하고 미묘한 문제”라고 덧붙인다. 그 정신보다는 단순히 복고적인 껍데기가 유행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의 목소리다.
첨단 디지털 전자기술에 에디슨 시대의 디자인과 감수성을 더한 제품들이 인기를 끌면서 더 이상 ‘새로운’ ‘감성’이란 불가능한 게 아닌가라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복고’에 대한 열광이 디지털 시대의 감성적 진공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