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 내정자화끈한 자주외교, 확실한 ‘盧의 남자’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지명된 송민순 대통령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해외출장을 가더라도 새벽에 조깅을 거르지 않는다. 누군가 “왜 그렇게 열심히 뛰느냐”고 묻자 그는 “뛰고 움직이지 않으면 피가 굳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열혈남아’의 뜨거움을 발산하지 않으면 못 참는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로 인해 그는 선이 굵고 대가 세다는 평을 받는다.
1990년대 초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담당하던 외교부 미주국 안보과장 시절, 미국 측 협상대표단은 테이블을 치며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그에게 “군인보다 더하다”면서 ‘커널(colonel·대령) 송’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청와대 앞 내자동에 있던 미군 숙소용 내자호텔을 철거한 것도 이런 그의 뚝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 대통령 신임 각별 … 美 자극 발언으로 반발 부르기도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대미(對美) 업무로 채웠던 그는 외교부에서 잘나가는 주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서울대 독문과를 나와 외무고시 9회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요직인 북미 1과장, 대통령 비서실 국제안보비서관, 북미국장, 주 폴란드 대사,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등을 두루 거쳤다. 그의 업무 스타일을 두고 주변에선 ‘프로페셔널’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는 김영삼 정부 말기에 태스크포스 팀을 이끌고 미국, 일본, 이스라엘, 독일을 방문했다. 외교안보 분야의 위기관리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사전준비 작업에 나선 것. 출장을 마친 뒤 작성한 보고서는 김대중 정부 초기에 구성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근간이 됐다. 그는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수석 밑에서 비서관의 신분으로 햇볕정책 입안 과정에도 참여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폴란드 대사를 마치고 2003년 본부로 복귀한 그는 경기도 국제관계자문대사라는 한직을 발령받았다. 당시 유력한 차관보 후보였으나, 동기인 이수혁 현 주독일 대사에게 밀렸다. 참여정부의 시각으로 볼 때 그는 외교부의 ‘주류’라는 딱지를 떼지 못한 셈이다.
그런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눈에 들어온 것은 2005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4차 6자회담을 통해서다. 6자회담에서 한국 수석대표를 맡은 그는 저돌적인 협상력을 발휘했다.
협상의 걸림돌이 나타날 때면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힐(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미국 측 수석대표) 같은 친구를 도와야지, 아니면 다른 (미) 강경파와 협상하고 싶으냐”고 몰아붙였다고 한다.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사정을 이해하고 달래면서 핵 폐기라는 성과를 이뤄내야 한다며 미국 대표단을 설득했다. 폴란드 대사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힐 대표에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미국의 반대편에 서는 일이지만, 미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나에게 반대편에 서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9·19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성공적으로 회담을 마무리하자 “송민순이 없었다면 9·19성명이라는 작품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6자회담의 성공으로 그는 파격적으로 차관보에서 장관급인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으로 발탁됐다.
그런데 그가 달라졌다. 청와대로 가면서 그의 성향이 바뀌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왔다. 참여정부 초기 노 대통령이 외교노선의 비자주성을 문제삼아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을 경질한 직후만 해도 그는 지금과 달랐다. 당시 경기도 자문대사이던 그는 “외교란 상대 이익을 존중해야 내 이익도 챙길 수 있는 것”이라면서 “‘열린 자주’가 아니라 ‘닫힌 자주’를 하면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으로선 국제 미아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석에선 노 대통령의 ‘자주’를 비판하던 그였지만 청와대로 들어간 뒤에는 앞장서서 ‘자주외교’에 코드를 맞추기 시작했다. 화끈한 성격이니만큼 변신 또한 누구보다 화끈했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그는 전시 작전통제권을 단독 행사하면 안보가 불안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대놓고 비난할 정도다.
외교부 관계자는 “참여정부에 코드를 맞추는 사람을 두고 ‘생계형 코드 변화’ 또는 ‘위장형 코드 변화’라는 얘기를 하곤 한다”면서 “그러나 송 실장은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DNA 자체가 전이된 케이스라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만큼 그는 이젠 자타가 공인하는 외교안보 정책의 사령탑으로 자리를 굳혔다. 정부 관계자는 “이종석 통일부 장관에게 있던 무게중심이 올해부터 송 실장에게 옮겨갔다”면서 “송 실장이 외교안보 정책을 좌지우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외교부 장관으로 지명된 현시점은 건국 이래 최대 위기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백척간두의 시기다.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임을 자처하는 북한을 설득 또는 압박해 핵 폐기를 이끌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사회와의 공조,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최근 그의 행적을 둘러싼 미국의 시각이 곱지 않다. 그는 최근 한 포럼에서 “인류 역사상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가 미국”이라고 발언해 미국 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이 “외교안보팀 개각은 전면적인 주의를 기울일 만한 중차대한 이슈”라며 이례적인 관심을 나타낼 정도였다. 야당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송 실장이 외교 코드에 집착하다가 외교관으로서는 지나친 발언을 자주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코드’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를 소외시킨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물론 그가 외교부 장관으로서 청와대에서의 ‘행적’과는 다른 색깔을 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A 교수는 “미국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대통령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면서 “이젠 청와대와 물리적인 거리도 생겼고 외교부 장관이라는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동안과는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뚝심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추진력이 트레이드마크인 송 신임 외무장관. 그가 외교부 수장으로 다시 태어나 코드의 틀을 벗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영식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spear@donga.com 外
이재정 통일부장관 내정자철저한 대북 포용파 … ‘햇볕’ 계승 불 보듯
신임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된 이재정(62)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평통) 수석부의장은 철두철미한 대북 포용주의자로 일컬어진다. 일각에서는 북한 핵실험으로 인한 대북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이종석 장관보다 더 강력한 ‘햇볕’을 주장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장관이 이 내정자를 후임으로 천거한 데도 대북정책 기조 유지에 대한 기대가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포용정책에 대한 신념은 평통 수석부의장 재직 시절에 행한 강연과 언론 인터뷰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됐다. 이를 종합해볼 때, 그는 남북관계에 대해 △북한이 스스로 변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역량을 집중해야 하고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하며 △남북 교류협력을 지속, 강화해 통일을 위한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이 내정자는 10월9일 북한 핵실험 이후 미국이 북한 권부에 대한 달러 유입 창구로 지목하면서 축소 내지 중단을 촉구하고 있는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에 대해 “대북제재 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되며, 남북관계에 미치는 상징성을 고려해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히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미국의 강경한 대북 압박정책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내정자는 10월4일 ‘북한 핵실험 선언과 관련 대통령께 드리는 건의문’에서 “미국의 다각적인 대북 압박이 결국 북한이 미국의 핵 비확산 정책에 위협을 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미국이 한 발짝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대북 지원에 대한 신념은 훨씬 강하다. 이 내정자는 3월 호주 시드니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평화유지를 위한 투자이며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절대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선진국이 후진국을 도우려면 국내총생산(GDP)의 0.5% 수준은 돼야 하는데, 우리의 대북지원은 2500억원 규모로 인색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인도적 지원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 내정자는 정부가 7월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항의 표시로 쌀과 비료지원을 유보한 직후, 평통 수석부의장 명의로 낸 성명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문제를 인도적 사안과 연계한 것에 대한 나름의 불만 표시로 해석된다.
불법 대선자금 사건 연루 … 가시밭길 청문회 예고
대북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인권은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인정하고 △정부는 북한 주민의 실질적 인권개선을 위해 실천적 노력을 하지만 △공개적으로 인권을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행위는 절제한다는 현재의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내정자는 2월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북한의 인권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북한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지도록 할 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핵문제 해결에 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확고한 인도주의적 대북지원 철학은 성직자 출신이면서 오랜 기간 재야에서 시민운동을 해온 경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내정자와 가까운 한 지인은 “신학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 북한 주민들에게 일종의 연민이 있다”면서 “북한을 끌어안아 단계적, 점진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통일부 장관으로서의 직무수행 능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준비 안 된’ 통일부 장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는, 이 내정자가 북한과 실제 협상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에 근거한다. 쌀과 비료 지원이 유보된 이후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적 관계마저 사실상 모두 단절된 남북관계의 실타래를 원만히 풀어나갈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내정자는 재야 시절 기독교계 대표로 북한과 협상하고 평양 등을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정치권에 입문한 2000년 이후로는 북측 인사와 만날 기회가 없었다. 정치 현안을 두고 협상을 벌여본 경험도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한 뒤 캐나다에서 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6권의 저서도 모두 교회운동과 신학에 관한 것으로 남북관계를 다룬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6대 국회에서도 교육위원회에서만 활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내정자는 최근 본보와의 통화에서 “지난 2년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활동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 뒤 “1972년부터 재야에서 통일운동을 한 이래 기독교계의 통일운동에서 늘 중심에 서 있었는데, 통일 분야 비전문가라고 폄훼하다니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내정자에 따르면, 197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KNCC) 사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통일운동에 발을 디뎠고, 89년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기독교지도자회의에 한반도평화통일협의회 한국대표로 참가함으로써 남북간 만남의 주역이 됐다. 97년에는 KNCC 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이듬해에는 북한을 방문해 조선기독교도연맹 북측대표와 공식회담을 가진 적도 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제도권이 아닌 바닥에서 통일운동을 해온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업무 스타일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1981년부터 20년 넘게 보수 진영이 장악해오던 평통 자문위원을 진보인사로 대대적으로 물갈이한 것에 대해 여권에서는 “강한 추진력과 뚝심으로 군사정권의 유산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혁신의 대표적 사례”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여당과 대통령에 가까운 사람으로 인위적인 개편을 함으로써 관변, 어용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혹평했다.
이달 말로 예정된 이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도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벌써부터 이 내정자가 2002년 대선 때 한화그룹으로부터 10억원의 채권을 받아 노 대통령 측에 전달한 혐의로 구속됐던 전력을 중심으로 ‘보은인사’ 문제를 집중 부각할 예정이다. 북한 핵실험으로 실패가 입증된 포용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이 내정자의 대북관이 도마에 오를 것은 물론이다.
하태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taewon_ha@donga.com
김장수 국방부장관 내정자‘안보 위기 관리’ 총대 멘 작전통
“고심 끝에, 정부 말기인 데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흐트러질 수 있는 군 조직을 확실히 다잡고 국방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그가 최적의 대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1월1일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에 승진, 내정된 배경에 대해 정부 고위 소식통은 이같이 밝혔다.
외형적으로 보면 김 총장의 국방수장 기용은 ‘예상 밖’이고 ‘파격’이다. 우선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국방개혁의 핵심인 군 문민화와 3군 균형발전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김동진 합참의장을 비롯해 과거 합참의장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간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현역 육참총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수직 상승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불과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윤광웅 장관의 후임으로는 현역 국회의원과 외교안보 핵심요직을 지낸 인사들이 거론됐다. 특히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에서 국방개혁을 앞당기고 군 문민화를 완성하려면 문민장관이 배출돼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열린우리당의 유재건, 장영달 의원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또 한편에서는 문민장관은 너무 이르고 군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권진호(육사 19기) 전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안광찬(육사 25기) 비상기획위원장, 김종환(육사 25기) 전 합참의장, 이한호(공사 17기) 전 공군참모총장 등 군 출신 인사들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현역 출신 장관’이 배출되리라는 예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난달 초 북한의 핵실험 강행 이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주도해온 외교안보 라인의 인책론이 급부상하면서, 국방수장에는 6·25전쟁 이후 최악의 안보 위기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군 출신 전문가가 기용돼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된 것이다.
김 내정자가 총장에 재임하면서 육군 병력 감축, 3군 균형발전, 군 구조개편을 과감히 추진함으로써 현 정부의 국방 개혁에 크게 기여한 점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내정자는, 2004년 말 육군 장성진급 비리의혹사건 수사에 반발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는 등 현 정부와 심한 마찰을 빚은 남재준 총장의 후임으로 지난해 4월 ‘육군 수장’에 임명됐다. 당시 군 안팎에선 김 총장이 과연 ‘조직 감싸기’의 관행과 내부 반발을 극복하고 육군을 국방 개혁에 제대로 동참시킬 수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는 총장 취임사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에 입각해 변화와 혁신, 개혁을 스스로 주도해나감으로써 육군의 제도와 정책을 시스템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대부분 실천해 ‘합격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만큼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를 비롯한 대미(對美) 현안을 원만히 풀어나갈 수 있으리란 기대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군의 한 소식통은 “이와 같은 여건들을 종합해볼 때 김 내정자가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으리라는 일각의 분석은 잘못됐다”며 “김 내정자야말로 현 정부와 제일 코드가 잘 맞는 현역이라는 점이 파격적인 기용의 배경이 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관리 철저 ‘소문’ … 재산 신고 때 93년식 콩코드 신고
일각에선 김 내정자의 발탁에는 군 수뇌부의 전면 쇄신을 통한 군심(軍心) 장악과 권력 핵심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 일부 군 수뇌부를 교체하려는 복안이 깔려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9월 임명된 김성일(공사 20기) 공군참모총장과 김명립(공사 19기) 합참차장을 제외하고, 이상희(육사 26기) 합참의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 수뇌부 임기가 5개월 이상 남았음에도 대폭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한 데는 권력 윗선의 의중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관련해 권력 핵심부 일각과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온 특정 군 수뇌부를 조기 교체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얘기도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 수뇌부는 공식, 비공식석상에서 각종 안보 현안에 대해 정부 방침과는 거리가 좀 있는 ‘소신’을 밝혔고, 이후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 퍼졌다는 것이다.
한편 김 내정자의 발탁으로 육사 30기까지 군 사령관(대장) 진출을 바라볼 수 있게 돼 고질적인 인사적체가 해소됐다는 점에서 육군은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김 내정자는 9사단 대대장과 7사단 5연대장, 6사단장, 합참작전부장, 7군단장 등 야전 지휘관과 주요 정책부서를 두루 거친 대표적인 작전 전략통이다.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때는 1군 사령부 작전처장으로서 50여 일간 귀가도 하지 않은 채 작전을 지휘하는 바람에 제때 치과 치료를 받지 못해 이를 크게 상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합참작전본부장으로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지를 키르쿠크에서 아르빌로 변경하는 방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라크로 날아가 미군 사령관과 막판 협상을 벌였다.
김 내정자의 아들 용우(25·생도 62기) 씨는 프랑스 육사를 졸업하고 9월 소위로 임관했는데, 이때 아들의 계급장을 직접 달아줘 화제가 됐다.
많은 군 관계자들은 김 내정자가 ‘독주’(獨走)보다는 ‘화합’을 중시하고 ‘부하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덕장(德將)’이라고 평가한다. 과거 지역 차별로 대령 시절 보직 등에서 불이익을 당했지만, 본인은 지역과 임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측근을 중용해 부하들의 신망도 두텁다고 한다. 금전 문제를 비롯한 철저한 자기 관리로 잡음이 거의 없는 김 내정자는 3월 공직자 재산 신고 때 5억4275만원의 재산과 93년식 콩코드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신고했다.
한편에선 성격이 온화하고 매사 원만한 해결을 위한 관리 및 조정 임무에 주력하는 만큼 대가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가 국방 개혁의 마무리 과정에서 한층 거세질 외풍(外風)을 어떻게 이겨내면서 산적한 국방 현안을 처리해나갈지 주목된다.
윤상호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ysh1005@donga.com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위기 때마다 업그레이드 ‘타고난 관운’
“그사람 골프 실력이 싱글이다. 그런데 마지막 서너 홀을 남겨놓고 꼭 보기나 더블보기를 범한다. 함께 플레이하는 사람을 고려해 일부러 자기 점수를 80점대 초반에 맞추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김만복 당시 주미대사관 정부참사관과 함께 이따금 골프를 쳤다는 한 중견 언론인은 그에 대해 “매사에 무척 조심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노무현 정부 이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 국정원 기조실장 및 해외담당 1차장 등 현기증 날 정도의 고속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정보 수장(首長)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지만, 그의 인간적 면면까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심지어 국정원 내부에서조차 그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을 정도다.
김 내정자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74년 특채로 중앙정보부에 들어갔다. 그 전에 잠시 동아일보에서 업무직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는 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정규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정보기관에서 줄곧 ‘마이너리티’ 그룹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정에 들어간 그는 70년대 학원 담당에서 시작해 국내, 해외 업무를 두루 거쳤다. 90년대 후반 과장 시절에는 탈북한 황장엽 씨의 안가를 담당한 적도 있었다. 당시 임동원 원장이 황씨의 대외활동을 극도로 제한했고, 이에 황씨가 “안가에서 나가겠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김 내정자가 중간에서 꽤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김 내정자는 ‘관운(官運)을 타고난 사람’이다. 공직생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반드시 이를 극복할 전기(轉機)가 찾아온 것을 두고 이런 말이 나온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가 그의 첫 번째 위기였다. 당시 이종찬 원장은 기관명을 바꾸는 등 대대적인 내부 개혁을 단행했는데, 부산 출신에다 정규 공채 출신도 아니었던 그에겐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대북 업무를 전담하는 3차장제가 신설됐고, 김 내정자는 남북 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조율했던 김보현-서훈 라인에 발탁됐다. 정상회담의 성공으로 그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 위기는 그가 세종연구소에 1년간 파견 나갔던 2002년 무렵. 정보기관원이 연구소로 파견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공직생활의 마감이 코앞에 닥쳤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 ‘기회’가 됐다. 세종연구소에서 훗날 노무현 정부의 통일부 장관까지 오른 이종석 박사를 만난 것이다. 이종석 씨는 NSC 사무차장이 된 후 김 내정자를 자기 바로 밑의 실장급으로 불러들였다.
김 내정자가 매번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데는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이 바탕이 됐다는 얘기가 많다. 게다가 자리에 대한 그의 ‘집념’도 한몫했다고 한다. 국정원에서 파견 근무를 했던 국책 연구기관의 한 인사는 “김 내정자가 세종연구소로 쫓겨날 때 후배 직원들에게 ‘두고 봐라.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지금도 국정원 일부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는 얘기다”라고 전했다.
특채 신분 탓 줄곧 마이너리티 … 4~5년 만에 초고속 승진
그러면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이때 ‘김만복 국정원’은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전망보다 회의적인 시각이 더 큰 게 사실이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요인은 그가 ‘이종석 사람’이라는 점. 즉, 무조건적인 대북 포용정책을 밀어붙였던 이종석 전 장관과 호흡을 맞춰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계속 노무현 정부의 ‘코드’에 충성할 게 뻔하다는 시각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중 정부 이래 줄곧 약화돼온 대북-해외정보 역량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김 내정자가 자기 소신을 주장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말 잘 듣는 관료 기질’이 더 강한 인물이라는 점도 그런 우려가 나오는 또 하나의 배경이다.
김 내정자가 대통령과 동향인 부산 출신이라는 점도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정권 말기에 동향 인사를 정보기관장에 앉힌 ‘의도’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것. 이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 초기에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일했던 상지대 서동만 교수는 최근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만복 국정원’은 정치화될 수밖에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다른 시각도 있다. 정보기관의 생리 및 조직 특성과 관련해 완전 백지 상태로 취임한 김승규 전 원장에 비하면 국내와 해외, 대북 분야를 두루 거친 김 내정자가 나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김 전 원장에 대해선 해외-대북 분야보다 국내 정보 쪽에 더 역점을 뒀고, 첩보수집 우선순위에서도 경제-산업정보 등 이른바 국익 정보를 최우선에 두는 바람에 가뜩이나 취약한 해외-대북 분야가 더 약화됐다는 내부 비판이 없지 않다. 정보기관의 생리를 잘 아는 김 내정자가 이처럼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다고는 하지만, 김 내정자의 앞날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이 벼르고 있는 국회 청문회가 첫 번째 넘어야 할 관문이다. 그 관문을 무사히 넘는다고 해도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국정원 내부를 어떻게 추스르냐가 당면 과제다. 김 내정자는 기조실장을 맡은 이래 국정원 개혁 및 조직 차원의 과거사진상규명 작업을 주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부 반발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 구성원이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리더의 말로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불과 4~5년 만에 단장급에서 국가정보의 수장으로 올라선 김 내정자. 관료로서 크게 성공한 것과는 별개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제부터 엄격한 채점에 들어갈 것이다.
송문홍 기자 songmh@donga.com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지명된 송민순 대통령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해외출장을 가더라도 새벽에 조깅을 거르지 않는다. 누군가 “왜 그렇게 열심히 뛰느냐”고 묻자 그는 “뛰고 움직이지 않으면 피가 굳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열혈남아’의 뜨거움을 발산하지 않으면 못 참는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로 인해 그는 선이 굵고 대가 세다는 평을 받는다.
1990년대 초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담당하던 외교부 미주국 안보과장 시절, 미국 측 협상대표단은 테이블을 치며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그에게 “군인보다 더하다”면서 ‘커널(colonel·대령) 송’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청와대 앞 내자동에 있던 미군 숙소용 내자호텔을 철거한 것도 이런 그의 뚝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 대통령 신임 각별 … 美 자극 발언으로 반발 부르기도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대미(對美) 업무로 채웠던 그는 외교부에서 잘나가는 주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서울대 독문과를 나와 외무고시 9회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요직인 북미 1과장, 대통령 비서실 국제안보비서관, 북미국장, 주 폴란드 대사,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등을 두루 거쳤다. 그의 업무 스타일을 두고 주변에선 ‘프로페셔널’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는 김영삼 정부 말기에 태스크포스 팀을 이끌고 미국, 일본, 이스라엘, 독일을 방문했다. 외교안보 분야의 위기관리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사전준비 작업에 나선 것. 출장을 마친 뒤 작성한 보고서는 김대중 정부 초기에 구성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근간이 됐다. 그는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수석 밑에서 비서관의 신분으로 햇볕정책 입안 과정에도 참여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폴란드 대사를 마치고 2003년 본부로 복귀한 그는 경기도 국제관계자문대사라는 한직을 발령받았다. 당시 유력한 차관보 후보였으나, 동기인 이수혁 현 주독일 대사에게 밀렸다. 참여정부의 시각으로 볼 때 그는 외교부의 ‘주류’라는 딱지를 떼지 못한 셈이다.
그런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눈에 들어온 것은 2005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4차 6자회담을 통해서다. 6자회담에서 한국 수석대표를 맡은 그는 저돌적인 협상력을 발휘했다.
협상의 걸림돌이 나타날 때면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힐(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미국 측 수석대표) 같은 친구를 도와야지, 아니면 다른 (미) 강경파와 협상하고 싶으냐”고 몰아붙였다고 한다.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사정을 이해하고 달래면서 핵 폐기라는 성과를 이뤄내야 한다며 미국 대표단을 설득했다. 폴란드 대사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힐 대표에게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미국의 반대편에 서는 일이지만, 미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나에게 반대편에 서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9·19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성공적으로 회담을 마무리하자 “송민순이 없었다면 9·19성명이라는 작품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6자회담의 성공으로 그는 파격적으로 차관보에서 장관급인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으로 발탁됐다.
그런데 그가 달라졌다. 청와대로 가면서 그의 성향이 바뀌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왔다. 참여정부 초기 노 대통령이 외교노선의 비자주성을 문제삼아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을 경질한 직후만 해도 그는 지금과 달랐다. 당시 경기도 자문대사이던 그는 “외교란 상대 이익을 존중해야 내 이익도 챙길 수 있는 것”이라면서 “‘열린 자주’가 아니라 ‘닫힌 자주’를 하면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으로선 국제 미아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석에선 노 대통령의 ‘자주’를 비판하던 그였지만 청와대로 들어간 뒤에는 앞장서서 ‘자주외교’에 코드를 맞추기 시작했다. 화끈한 성격이니만큼 변신 또한 누구보다 화끈했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그는 전시 작전통제권을 단독 행사하면 안보가 불안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대놓고 비난할 정도다.
외교부 관계자는 “참여정부에 코드를 맞추는 사람을 두고 ‘생계형 코드 변화’ 또는 ‘위장형 코드 변화’라는 얘기를 하곤 한다”면서 “그러나 송 실장은 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DNA 자체가 전이된 케이스라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만큼 그는 이젠 자타가 공인하는 외교안보 정책의 사령탑으로 자리를 굳혔다. 정부 관계자는 “이종석 통일부 장관에게 있던 무게중심이 올해부터 송 실장에게 옮겨갔다”면서 “송 실장이 외교안보 정책을 좌지우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외교부 장관으로 지명된 현시점은 건국 이래 최대 위기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백척간두의 시기다.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임을 자처하는 북한을 설득 또는 압박해 핵 폐기를 이끌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사회와의 공조,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최근 그의 행적을 둘러싼 미국의 시각이 곱지 않다. 그는 최근 한 포럼에서 “인류 역사상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가 미국”이라고 발언해 미국 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이 “외교안보팀 개각은 전면적인 주의를 기울일 만한 중차대한 이슈”라며 이례적인 관심을 나타낼 정도였다. 야당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송 실장이 외교 코드에 집착하다가 외교관으로서는 지나친 발언을 자주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코드’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를 소외시킨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물론 그가 외교부 장관으로서 청와대에서의 ‘행적’과는 다른 색깔을 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A 교수는 “미국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대통령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면서 “이젠 청와대와 물리적인 거리도 생겼고 외교부 장관이라는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동안과는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뚝심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추진력이 트레이드마크인 송 신임 외무장관. 그가 외교부 수장으로 다시 태어나 코드의 틀을 벗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영식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spear@donga.com 外
이재정 통일부장관 내정자철저한 대북 포용파 … ‘햇볕’ 계승 불 보듯
신임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된 이재정(62)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평통) 수석부의장은 철두철미한 대북 포용주의자로 일컬어진다. 일각에서는 북한 핵실험으로 인한 대북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이종석 장관보다 더 강력한 ‘햇볕’을 주장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장관이 이 내정자를 후임으로 천거한 데도 대북정책 기조 유지에 대한 기대가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포용정책에 대한 신념은 평통 수석부의장 재직 시절에 행한 강연과 언론 인터뷰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됐다. 이를 종합해볼 때, 그는 남북관계에 대해 △북한이 스스로 변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역량을 집중해야 하고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하며 △남북 교류협력을 지속, 강화해 통일을 위한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이 내정자는 10월9일 북한 핵실험 이후 미국이 북한 권부에 대한 달러 유입 창구로 지목하면서 축소 내지 중단을 촉구하고 있는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에 대해 “대북제재 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되며, 남북관계에 미치는 상징성을 고려해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히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미국의 강경한 대북 압박정책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내정자는 10월4일 ‘북한 핵실험 선언과 관련 대통령께 드리는 건의문’에서 “미국의 다각적인 대북 압박이 결국 북한이 미국의 핵 비확산 정책에 위협을 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미국이 한 발짝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대북 지원에 대한 신념은 훨씬 강하다. 이 내정자는 3월 호주 시드니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평화유지를 위한 투자이며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절대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선진국이 후진국을 도우려면 국내총생산(GDP)의 0.5% 수준은 돼야 하는데, 우리의 대북지원은 2500억원 규모로 인색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인도적 지원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 내정자는 정부가 7월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항의 표시로 쌀과 비료지원을 유보한 직후, 평통 수석부의장 명의로 낸 성명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문제를 인도적 사안과 연계한 것에 대한 나름의 불만 표시로 해석된다.
불법 대선자금 사건 연루 … 가시밭길 청문회 예고
대북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인권은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인정하고 △정부는 북한 주민의 실질적 인권개선을 위해 실천적 노력을 하지만 △공개적으로 인권을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행위는 절제한다는 현재의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내정자는 2월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북한의 인권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북한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지도록 할 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핵문제 해결에 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확고한 인도주의적 대북지원 철학은 성직자 출신이면서 오랜 기간 재야에서 시민운동을 해온 경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내정자와 가까운 한 지인은 “신학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 북한 주민들에게 일종의 연민이 있다”면서 “북한을 끌어안아 단계적, 점진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통일부 장관으로서의 직무수행 능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준비 안 된’ 통일부 장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는, 이 내정자가 북한과 실제 협상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에 근거한다. 쌀과 비료 지원이 유보된 이후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적 관계마저 사실상 모두 단절된 남북관계의 실타래를 원만히 풀어나갈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내정자는 재야 시절 기독교계 대표로 북한과 협상하고 평양 등을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정치권에 입문한 2000년 이후로는 북측 인사와 만날 기회가 없었다. 정치 현안을 두고 협상을 벌여본 경험도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한 뒤 캐나다에서 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6권의 저서도 모두 교회운동과 신학에 관한 것으로 남북관계를 다룬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6대 국회에서도 교육위원회에서만 활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내정자는 최근 본보와의 통화에서 “지난 2년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활동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 뒤 “1972년부터 재야에서 통일운동을 한 이래 기독교계의 통일운동에서 늘 중심에 서 있었는데, 통일 분야 비전문가라고 폄훼하다니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내정자에 따르면, 197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KNCC) 사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통일운동에 발을 디뎠고, 89년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기독교지도자회의에 한반도평화통일협의회 한국대표로 참가함으로써 남북간 만남의 주역이 됐다. 97년에는 KNCC 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이듬해에는 북한을 방문해 조선기독교도연맹 북측대표와 공식회담을 가진 적도 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제도권이 아닌 바닥에서 통일운동을 해온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업무 스타일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1981년부터 20년 넘게 보수 진영이 장악해오던 평통 자문위원을 진보인사로 대대적으로 물갈이한 것에 대해 여권에서는 “강한 추진력과 뚝심으로 군사정권의 유산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혁신의 대표적 사례”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여당과 대통령에 가까운 사람으로 인위적인 개편을 함으로써 관변, 어용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혹평했다.
이달 말로 예정된 이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도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벌써부터 이 내정자가 2002년 대선 때 한화그룹으로부터 10억원의 채권을 받아 노 대통령 측에 전달한 혐의로 구속됐던 전력을 중심으로 ‘보은인사’ 문제를 집중 부각할 예정이다. 북한 핵실험으로 실패가 입증된 포용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이 내정자의 대북관이 도마에 오를 것은 물론이다.
하태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taewon_ha@donga.com
김장수 국방부장관 내정자‘안보 위기 관리’ 총대 멘 작전통
“고심 끝에, 정부 말기인 데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흐트러질 수 있는 군 조직을 확실히 다잡고 국방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그가 최적의 대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1월1일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에 승진, 내정된 배경에 대해 정부 고위 소식통은 이같이 밝혔다.
외형적으로 보면 김 총장의 국방수장 기용은 ‘예상 밖’이고 ‘파격’이다. 우선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국방개혁의 핵심인 군 문민화와 3군 균형발전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김동진 합참의장을 비롯해 과거 합참의장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간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현역 육참총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수직 상승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불과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윤광웅 장관의 후임으로는 현역 국회의원과 외교안보 핵심요직을 지낸 인사들이 거론됐다. 특히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에서 국방개혁을 앞당기고 군 문민화를 완성하려면 문민장관이 배출돼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열린우리당의 유재건, 장영달 의원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또 한편에서는 문민장관은 너무 이르고 군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권진호(육사 19기) 전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안광찬(육사 25기) 비상기획위원장, 김종환(육사 25기) 전 합참의장, 이한호(공사 17기) 전 공군참모총장 등 군 출신 인사들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현역 출신 장관’이 배출되리라는 예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난달 초 북한의 핵실험 강행 이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주도해온 외교안보 라인의 인책론이 급부상하면서, 국방수장에는 6·25전쟁 이후 최악의 안보 위기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군 출신 전문가가 기용돼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된 것이다.
김 내정자가 총장에 재임하면서 육군 병력 감축, 3군 균형발전, 군 구조개편을 과감히 추진함으로써 현 정부의 국방 개혁에 크게 기여한 점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내정자는, 2004년 말 육군 장성진급 비리의혹사건 수사에 반발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는 등 현 정부와 심한 마찰을 빚은 남재준 총장의 후임으로 지난해 4월 ‘육군 수장’에 임명됐다. 당시 군 안팎에선 김 총장이 과연 ‘조직 감싸기’의 관행과 내부 반발을 극복하고 육군을 국방 개혁에 제대로 동참시킬 수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는 총장 취임사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에 입각해 변화와 혁신, 개혁을 스스로 주도해나감으로써 육군의 제도와 정책을 시스템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대부분 실천해 ‘합격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만큼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를 비롯한 대미(對美) 현안을 원만히 풀어나갈 수 있으리란 기대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군의 한 소식통은 “이와 같은 여건들을 종합해볼 때 김 내정자가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으리라는 일각의 분석은 잘못됐다”며 “김 내정자야말로 현 정부와 제일 코드가 잘 맞는 현역이라는 점이 파격적인 기용의 배경이 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관리 철저 ‘소문’ … 재산 신고 때 93년식 콩코드 신고
일각에선 김 내정자의 발탁에는 군 수뇌부의 전면 쇄신을 통한 군심(軍心) 장악과 권력 핵심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 일부 군 수뇌부를 교체하려는 복안이 깔려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9월 임명된 김성일(공사 20기) 공군참모총장과 김명립(공사 19기) 합참차장을 제외하고, 이상희(육사 26기) 합참의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 수뇌부 임기가 5개월 이상 남았음에도 대폭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한 데는 권력 윗선의 의중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관련해 권력 핵심부 일각과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온 특정 군 수뇌부를 조기 교체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얘기도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 수뇌부는 공식, 비공식석상에서 각종 안보 현안에 대해 정부 방침과는 거리가 좀 있는 ‘소신’을 밝혔고, 이후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 퍼졌다는 것이다.
한편 김 내정자의 발탁으로 육사 30기까지 군 사령관(대장) 진출을 바라볼 수 있게 돼 고질적인 인사적체가 해소됐다는 점에서 육군은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김 내정자는 9사단 대대장과 7사단 5연대장, 6사단장, 합참작전부장, 7군단장 등 야전 지휘관과 주요 정책부서를 두루 거친 대표적인 작전 전략통이다.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때는 1군 사령부 작전처장으로서 50여 일간 귀가도 하지 않은 채 작전을 지휘하는 바람에 제때 치과 치료를 받지 못해 이를 크게 상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합참작전본부장으로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지를 키르쿠크에서 아르빌로 변경하는 방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라크로 날아가 미군 사령관과 막판 협상을 벌였다.
김 내정자의 아들 용우(25·생도 62기) 씨는 프랑스 육사를 졸업하고 9월 소위로 임관했는데, 이때 아들의 계급장을 직접 달아줘 화제가 됐다.
많은 군 관계자들은 김 내정자가 ‘독주’(獨走)보다는 ‘화합’을 중시하고 ‘부하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덕장(德將)’이라고 평가한다. 과거 지역 차별로 대령 시절 보직 등에서 불이익을 당했지만, 본인은 지역과 임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측근을 중용해 부하들의 신망도 두텁다고 한다. 금전 문제를 비롯한 철저한 자기 관리로 잡음이 거의 없는 김 내정자는 3월 공직자 재산 신고 때 5억4275만원의 재산과 93년식 콩코드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신고했다.
한편에선 성격이 온화하고 매사 원만한 해결을 위한 관리 및 조정 임무에 주력하는 만큼 대가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가 국방 개혁의 마무리 과정에서 한층 거세질 외풍(外風)을 어떻게 이겨내면서 산적한 국방 현안을 처리해나갈지 주목된다.
윤상호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ysh1005@donga.com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위기 때마다 업그레이드 ‘타고난 관운’
“그사람 골프 실력이 싱글이다. 그런데 마지막 서너 홀을 남겨놓고 꼭 보기나 더블보기를 범한다. 함께 플레이하는 사람을 고려해 일부러 자기 점수를 80점대 초반에 맞추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김만복 당시 주미대사관 정부참사관과 함께 이따금 골프를 쳤다는 한 중견 언론인은 그에 대해 “매사에 무척 조심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노무현 정부 이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 국정원 기조실장 및 해외담당 1차장 등 현기증 날 정도의 고속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정보 수장(首長)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지만, 그의 인간적 면면까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심지어 국정원 내부에서조차 그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을 정도다.
김 내정자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74년 특채로 중앙정보부에 들어갔다. 그 전에 잠시 동아일보에서 업무직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는 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정규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정보기관에서 줄곧 ‘마이너리티’ 그룹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정에 들어간 그는 70년대 학원 담당에서 시작해 국내, 해외 업무를 두루 거쳤다. 90년대 후반 과장 시절에는 탈북한 황장엽 씨의 안가를 담당한 적도 있었다. 당시 임동원 원장이 황씨의 대외활동을 극도로 제한했고, 이에 황씨가 “안가에서 나가겠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김 내정자가 중간에서 꽤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김 내정자는 ‘관운(官運)을 타고난 사람’이다. 공직생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반드시 이를 극복할 전기(轉機)가 찾아온 것을 두고 이런 말이 나온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가 그의 첫 번째 위기였다. 당시 이종찬 원장은 기관명을 바꾸는 등 대대적인 내부 개혁을 단행했는데, 부산 출신에다 정규 공채 출신도 아니었던 그에겐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대북 업무를 전담하는 3차장제가 신설됐고, 김 내정자는 남북 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조율했던 김보현-서훈 라인에 발탁됐다. 정상회담의 성공으로 그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 위기는 그가 세종연구소에 1년간 파견 나갔던 2002년 무렵. 정보기관원이 연구소로 파견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공직생활의 마감이 코앞에 닥쳤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 ‘기회’가 됐다. 세종연구소에서 훗날 노무현 정부의 통일부 장관까지 오른 이종석 박사를 만난 것이다. 이종석 씨는 NSC 사무차장이 된 후 김 내정자를 자기 바로 밑의 실장급으로 불러들였다.
김 내정자가 매번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데는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이 바탕이 됐다는 얘기가 많다. 게다가 자리에 대한 그의 ‘집념’도 한몫했다고 한다. 국정원에서 파견 근무를 했던 국책 연구기관의 한 인사는 “김 내정자가 세종연구소로 쫓겨날 때 후배 직원들에게 ‘두고 봐라.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지금도 국정원 일부 직원들 사이에 회자되는 얘기다”라고 전했다.
특채 신분 탓 줄곧 마이너리티 … 4~5년 만에 초고속 승진
그러면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이때 ‘김만복 국정원’은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전망보다 회의적인 시각이 더 큰 게 사실이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요인은 그가 ‘이종석 사람’이라는 점. 즉, 무조건적인 대북 포용정책을 밀어붙였던 이종석 전 장관과 호흡을 맞춰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계속 노무현 정부의 ‘코드’에 충성할 게 뻔하다는 시각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중 정부 이래 줄곧 약화돼온 대북-해외정보 역량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김 내정자가 자기 소신을 주장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말 잘 듣는 관료 기질’이 더 강한 인물이라는 점도 그런 우려가 나오는 또 하나의 배경이다.
김 내정자가 대통령과 동향인 부산 출신이라는 점도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정권 말기에 동향 인사를 정보기관장에 앉힌 ‘의도’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것. 이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 초기에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일했던 상지대 서동만 교수는 최근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만복 국정원’은 정치화될 수밖에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다른 시각도 있다. 정보기관의 생리 및 조직 특성과 관련해 완전 백지 상태로 취임한 김승규 전 원장에 비하면 국내와 해외, 대북 분야를 두루 거친 김 내정자가 나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김 전 원장에 대해선 해외-대북 분야보다 국내 정보 쪽에 더 역점을 뒀고, 첩보수집 우선순위에서도 경제-산업정보 등 이른바 국익 정보를 최우선에 두는 바람에 가뜩이나 취약한 해외-대북 분야가 더 약화됐다는 내부 비판이 없지 않다. 정보기관의 생리를 잘 아는 김 내정자가 이처럼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다고는 하지만, 김 내정자의 앞날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이 벼르고 있는 국회 청문회가 첫 번째 넘어야 할 관문이다. 그 관문을 무사히 넘는다고 해도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국정원 내부를 어떻게 추스르냐가 당면 과제다. 김 내정자는 기조실장을 맡은 이래 국정원 개혁 및 조직 차원의 과거사진상규명 작업을 주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부 반발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 구성원이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리더의 말로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불과 4~5년 만에 단장급에서 국가정보의 수장으로 올라선 김 내정자. 관료로서 크게 성공한 것과는 별개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제부터 엄격한 채점에 들어갈 것이다.
송문홍 기자 songm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