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산행(山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고. 이 시구처럼 인생의 황혼이 청춘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은퇴 이후 자원봉사를 하고, 새로운 꿈을 찾고, 창업을 하면서 더욱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그들은 하나같이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한다.
‘한국 민속전도사’로 통하는 사진작가 이상수(72) 씨. 그는 사진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기 전까지 35년 동안 서울 마포에 소재한 중·고교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학교에서 해마다 한두 차례 민속촌을 갔는데, 군불 냄새 나는 옛집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래서 방학이면 민속촌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러면서 점차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아졌고, 어떻게 하면 우리 문화유산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죠. 그러다 사진을 생각해낸 거예요. 마침 사진에도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기 위해 91년 집(서울 대현동) 부근에 있는 중앙문화센터를 찾아갔어요.”
4년 정도 사진을 배운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학교 일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사진을 포기하든지. 그는 전업작가로 나서기 위해 4~5년 남은 정년을 포기하고 1995년 8월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당시만 해도 명예퇴직이라는 것이 참 생소했다. 가족은 물론 학교 동료, 선후배 교사들까지 나서서 퇴직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작가로 직업을 바꾼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벽 4시면 일어나 지하철과 기차를 타고 민속촌과 문화유적지 등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새벽에 문화재를 관람하기 위해 수위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고, 무거운 장비를 메고 전국을 누비느라 엄지발가락 물렁뼈가 닳아 2000년엔 수술까지 받았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크레인을 동원하기 위해 입씨름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그는 매번 번거롭게 동원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아예 크레인을 한 대 구입했다.
사진촬영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작품집 한 권을 내려고 해도 몇 백만원이 들었다. 명예퇴직을 할 때 일시금으로 받은 연금 2억원을 3년도 채 안 되어 다 쓰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다. 은퇴 후 농사를 지으려고 오래전에 경기도 화성시 인근에 사놓은 땅이 값이 크게 오른 것. 요즘 그 땅 중 일부를 팔아서 그리 어렵지 않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고희가 넘은 요즘도 꾸준히 사진집을 펴내고 국내·외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몸이 건강해 아직까지 이렇게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요즘 소박한 꿈을 하나 꾸고 있다고 귀띔했다. 고향 화성에 전시관을 지어 작품 전시도 하고 지방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싶다는 것. “아직까지 무언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인터넷 서핑하며 일거리 찾아요”
박경화(68) 씨의 이력은 화려하다. 1995년 8월에 31년간 일해오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를 정년퇴직한 뒤 한국금융선문협회에서 1년, 전남도청 외국인 투자유치자문관으로 2년을 더 근무했다. 그가 현직에서 은퇴한 것은 그의 나이 62세였던 2000년 6월 말.
박씨는 요즘 미국 첨단기술 이전 컨설팅 회사의 한국 연락 담당자로 재택근무 중이다. 미국 회사에서 원하는 정보를 수집해 전달하는 게 주요 업무. 비교적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도 한때 심각한 퇴직 후유증을 앓았다.
KOTRA에서 퇴직한 후 5년은 참으로 험난했다. 1993년 정년퇴직이 2년 정도 남았을 무렵부터 박씨는 나름대로 재취업을 준비했다. 회사를 운영하는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넌지시 퇴직 후 일자리를 부탁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모두들 “염려 말라”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스스로도 젊다고 생각한 그는 그들의 말만 믿고 별다른 준비 없이 정년을 맞았다. 하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너무도 참혹했다. 약속했던 사람들이 모두 모르는 척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살아가야 할 날은 많은데 모아놓은 돈은 별로 없고….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 같은 참담한 심경이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퇴직은 감당하기 힘들더군요. 온 가족이 변화와 충격 속에서 한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박씨는 매우 부지런하다. 은퇴 후 그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가 맨처음 눈을 돌린 곳은 외국이었다. 2002년 호주 대사관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호주 자연보호 자원봉사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 40일가량 호주에 다녀왔다. 2003년에는 KOTRA의 소개로 3개월 동안 한국국제협력단 자원봉사자로 에티오피아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곳 수출진흥청에 파견 나가 컴퓨터를 통해 수출업무를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것이 인연이 돼 에티오피아에서 기업인이 올 때마다 안내자 역할을 한다.
지난해부터 그는 한 달에 세 번 정도 성남아트센터에 나가 관람객들을 안내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실버 컴퓨터반 조교로 활동 중이다. 그 속에서 나름의 보람을 찾았다.
“자원봉사는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알아봅니다. 인터넷을 뒤지면 할 일이 얼마든지 있거든요. 할 일이 없다고 집에만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요.”
그는 요즘 버리면서 산다. 과천에서 분당으로, 48평형 아파트에서 38평형으로 옮겨가면서 그 차액으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퇴직 후 고통스런 세월 속에서 배운 그만의 삶의 지혜다. 20평대 아파트로 옮겨야 할 날도 멀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부부가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도 돈 생각 않고 자원봉사하면서 보람 있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자원봉사로 시간 가는 줄 몰라요”
30여 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말 정년퇴직한 오원구(58) 씨. 그가 은퇴 이후의 삶으로 선택한 것은 자원봉사다.
“은퇴하기 10년 전부터 개인연금을 들어 은퇴 후를 준비했어요. 공무원연금과 개인연금을 합하면 넉넉하지는 않아도 아내와 둘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재취업을 생각하진 않았죠. 그보다는 무언가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았어요.”
오씨는 중구청 사회복지과에 근무한 덕분에 자원봉사에 대한 정보와 노하우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철저히 준비했다. 정년퇴직 전 6개월간의 공로 휴가 기간에 명지대 사회교육원과 한국웃음복지연구소에서 사회복지사, 노인교육사, 케어복지사, 웃음치료사 등 4종류나 되는 자격증을 획득했다.
막상 은퇴를 하고 자원봉사를 시작해보니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버거웠다.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경제적 어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동안 준비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요즘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음성 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 봉사와 한양대 병원에서 발마사지 봉사를 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퇴직 이전부터 담당 공무원이자 후원자로 인연을 맺어온 장애인복지관에서 배식과 설거지를 돕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칭 ‘문화 자원봉사자’다. 올 초부터 동사무소 문화센터에서 민요와 한국무용을 배우고 있는데, 가끔 경로잔치 등에서 공연 의뢰가 들어오면 무료로 공연을 하기도 한다.
“봉사를 하려면 무엇보다 건강하고 체력이 강해야 해요. 하지만 나이가 있으니 체력이 달려 힘들 때도 많아요. 그럴 때마다 저를 기다리고 있을 분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독이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요.”
자원봉사를 계기로 그는 새로운 직업도 찾았다. 매주 금요일마다 과천 노인복지관에서 치매나 중풍 환자를 대상으로 웃음 치료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는 것. 게다가 종종 복지관에서 자원봉사 관련 강의도 한다.
“퇴직 이후 오히려 더 활동적으로 생활하면서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예전보다 얼굴이 더 좋아졌다고 해요.직장 다닐 때는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깟 체면 버리니 용기가 쑤~욱”
화장실 청소대행업체 ㈜하이진 INC 사장 이재준(60) 씨는 은행원 출신이다. 1984년 16년간 잘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일반회사를 잠시 다니다가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라는 큰 벽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다.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한 선배가 화장실 청소대행업을 추천해주더군요. 처음엔 일언지하에 거절했죠. 냄새 나는 사업을 왜 하나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꼼꼼히 따져보니 괜찮은 사업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위험성이 없었죠. 처음에 이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족은 물론 주위 친구들까지도 말렸어요. 점잖게 은행원 생활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3D 업종에 뛰어드느냐면서 말이에요.”
주변의 만류에도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과거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는 노릇.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이씨는 먼저 선배의 소개로 화장실과 주방의 청결 위생관리 전문 기업으로 나스닥에 상장된 ‘스위셔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에 부사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료로 일을 봐주면서 공부도 하고 현장 경험도 쌓았다. 그리고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1년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부터 쉬운 일은 없었다. 우선 화장실 청소대행업체 사장이라는 명함을 어디 가서 쉽게 건네지 못했다. 배고픔보다 쑥스러움이 앞섰던 것.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는 화장실 청소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명함을 건넬 수 있게 됐다.
“제가 창업을 망설인 것도, 이 업종을 꺼린 것도, 체면을 앞세운 것도 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일을 갖는 데 체면이 다 뭐고, 나이가 다 뭡니까? 그 모든 것을 훌훌 던져버리고 나니까 용기와 확신이 생기더군요.”
그는 이제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화장실을 쾌적하고 깨끗한 위생공간으로 만들어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는 일이 자랑스럽다. 인생 후배들에게 “제2 인생을 새롭게 살 각오를 했다면 과거는 잊어버려야 한다”고 조언하는 그는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밝혔다.
“제 목표는 앞으로 5년 내에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복지시설 같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화장실 청소 할아버지’가 될 생각입니다.”